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서른일곱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날로 해 지는 시간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민감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더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 같아요. 해가 빨리 지는 건 왠지 슬프지만 동시에 또 부드러운 겨울볕을 볼 생각을 하니 기쁘기도 합니다. 두 시만 넘겨도 얼굴을 환하게 비춰주는. 오늘은 다른 글을 쓰다가 떠오른 생각을 확장시켜서 글을 써봤어요.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으신가요? 거기에 대해서 다루어 보았습니다.
그 좋았던 시절로
얼마 전에는 브랜딩을 맡고 있는 업체의 카피를 작성하다가 갑자기 괜한 감상에 빠졌다. 과거에 대한 향수, 그 좋았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 그런 주제였는데. 글을 쓰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이 드러내고자 하는 테마의 글감을 잘 빚어 괜찮은 텍스트를 써내는 것. 거기에 내 기억을 투영하거나 몰입하는 건 권장사항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생각들은 멈추기가 어렵다.
어떤 주제에 공감이 많이 될 때만큼이나, 공감할 수 없을 때에도 생각은 세차게 흐른다. 삶의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그 좋았던 과거에 대해 떠올린다거나…나는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들이 던진 그런 질문이나 감상에 아무리 골똘히 머리를 굴려보려 해도 돌아가고 싶을 만큼 그리운 순간들은 떠올릴 수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굉장히 불행한 과거를 가진 사람 같지만 딱히 그렇지는 않은 것 같고, 그냥 어느 때로 돌아가면 좋을 것이다 하는 생각 자체가 떠오르지 않을 뿐이다.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 시절이나 모두가 추억하는 학창시절, 혹은 아득한 어린이 시절. 군인 시절? 음, 이건 확실히 아닌 것 같아.
골똘히 떠올려 보니 자취하던 때 좀 좋았는데 하는 생각은 잠시 들지만 딱히 팔굽혀펴기도 하지 못할 그 방으로 되돌아갈 생각은 별로 안 든다. 아무튼 과거는 지나간 시간일 뿐 그 순간들을 그리워한 적은 없다. 그런대로 열심히 살았던 것 같은데, 정도의 감상.
물론 인문대를 나왔으므로 그런 농담은 종종 한다. 고등학교 다닐 때 수학에 좀 더 진심을 담아 공부했더라면! 아니면 좀 더 밥이 나오는 학문을 했더라면! 하지만 동시에 안다. 나는 과거로 돌아가도 대충 비슷한 것들에 마음을 쏟을 것임을. 교과서를 받으면 국어 교과서에 실린 소설들부터 쭉 읽어볼 것임을, 전공을 고를 때 결국 이전과 비슷한 방향의 선택을 할 것임을. (차라리 아예 예체능을 택하려고 들 수는 있을 것 같다.) 아무튼 그런 만약에 놀이는 딱히 과거가 그리워서 하는 종류의 것은 아닐 테다. 그냥 별 생각이 없지 뭐. 이제 두 달 있으면 서른이 되고 만 나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는 하겠지만.
사실 나는 서른을 얼른 넘기고 싶었다. 예전에 군대에 있을 때 (이것도 벌써 7년 전 이야기야!) 함께 일하던 군무원 분이 하신 말씀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서. 자신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준다고 해도 20대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그 때는 너무 혼란하고 아무것도 붙잡을 것이 없어서 너무 힘들었다고. 서른을 넘으니까 삶을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어디로 흘러가면 좋을지 비로소 알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때부터 사는 게 재미있었다고. 돌아간다면 서른 초반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 사람은 말했다. 20대라는 숫자에 별 생각이 없어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없는 나조차 지나간 스물의 서광을 생각하면 가끔 섬찟한데, 그것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즐거운 삼십대라는 건 얼마나 좋은 시기일까?
그래서 나는 동시에 서른이 두려웠다. 나의 젊음이 사라지고, 뭐 그런 이야기보다도 (온 몸의 관절 건강은 이미 이십 대 중반쯤에 망가지기 시작했기에!) 그 좋은 서른이 오기까지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다는 생각 때문에. 갑자기 2025년 1월 1일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 전까지 내가 가져다 둔 것들이 찬찬히 가라앉는 것이 그 안정의 시작점일 테니까. 내가 그 때를 제대로 만들어 두지 못했다면 어쩌지? 서른이라는 게 그다지 좋은 게 아니라면.
지금은 그 두려움이 조금 무색해졌다. 미래에 대해 어떤 확신이 생긴 건 아니고,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더 든 뒤에 그리울 시기를 생각한다면 아마 지금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는. 웃긴 일이다. 요즘의 삶이 그렇게 청춘같이 찬란하지도 팔자가 좋지도 않기 때문에. 요며칠 라면만 먹다가 속이 울렁거렸는걸. 더 어릴 때도 있었고 더 많은 가능성이 있을 때도 그냥 더 많이 잠을 잤던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들은 딱히 그립지 않고 하필 지금. 이유는 딱 하나다. 내가 하는 일들이 누적되고 있다는 감각을 느껴서.
엄마는 내 20대를 이렇게 요약했다. 참 실속없이 바빴어. 실로 그러했다. 글을 오래 썼지만 그게 실질적으로 수익화가 되지는 않았고, 학교는 열심히 다니긴 했지만 전공을 살려서 뭘 할 수 있지도 않았다. 가장 생업과 연결이 많이 되었던 건 역시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입시 국어나 논술을 가르치는 일이었는데 20대 중반 전체를 강사의 삶이라고 정체화를 할 만큼 오래, 열심히 했지만 언제나 마음속에는 불안이 있었다. 이게 나의 평생 직업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오래도록 버틸 수 있는 일이 아니겠다는 직감이 있었달까. 교환학생을 갈 준비를 하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었고, 코로나 사태 발발로 교환학생을 갈 수 없게 되면서 어영부영하다 눌러앉아버린 일이었다. 더 어릴 땐 어땠지?
지금은 그런 무력감과 아득함이 없다. 전능감을 느끼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 정도로 행복하진 않다. 그냥, 어쨌든, 시간을 보낼 때마다 실력이 늘고 발전을 한다. 사업은 확장되고 모험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평생의 일이 아니면 어떤가 싶다. 어쨌든 내가 걸어가는 모든 행보가 내 삶에 기록처럼 남을 텐데. 그러니까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누적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내가 모험을 하고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삶에서 그런 시간들은 흔치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언젠가 돌아오고 싶을 것이다. 모험을 꿈꿀 수 있는 시간으로. 그러므로 나는 지금 떠나야 한다.
며칠 전에 들은 팟캐스트가 갑자기 생각난다. ‘무소속 생활자’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소속 없는 사람들로 일하면서 즐길 수 있는 좋은 점이나 어려운 점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실제로 회사 소속이 아닌 상태로 일하는 건 어떤 느낌이냐고 종종 질문을 받는다. 매번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아침에 좀 더 늦게 일어나고, 아침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 수 있다는 것, 그로 인해 만원 지하철을 피할 수 있다는 것, 원한다면 두문불출할 수 있다는 것, 머리 모양이나 옷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 정도. 그리고 이건 그 팟캐스트에서도 프리랜서 생활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던 건데, 성장을 온전히 나의 몫으로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종종 당신의 노력이 보답받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건 축복받은 삶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나는 축복받은 셈이다. 마지막으로, 마음껏 예민하게 굴 수 있다는 것. 사실 당연히 단점도 많지만 굳이 지금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말하고자 하면 필리버스터를 할 수 있지만.)
어쨌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스물 아홉 가을을 보내고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참 웃기지. 항상 나이를 생각하면 못 한 숙제를 하는 느낌이었다. 규정 속도에 발맞춰 사는 삶은 아무래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다가 가장 두려워했던 순간 코앞에서 별안간 그리워할 시기를 발명해버린 거야. 어떤 삼십대라도 어떻게든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만 같다. 왜냐면, 내가 쌓아놓은 것들로 놓은 다리를 밟고 도달하는 곳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방향키를 잡고 있다는 감각. 물론 아마 착각일 거다. 생각도 못한 재난이 닥칠 것이고 원하는 만큼 잘 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맘대로 되었던 적도 없으니 괜찮다. 그 때는 그 때의 방법이 있겠지. 나는 최선을 다할 뿐이고 또 뭔가를 쌓아나갈 것이다. 그러다 잠깐씩 지금의 이 낙관을 그리워하면 된다. 스물아홉 가을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때는 낙관이 있었거든요. 사는 게 즐거웠거든요. 힘들기는 해도.
요즘은 원래 머물던 공유오피스에서 나와 완전히 독립해서 작업실을 만들 준비를 한다. 너무 설레발을 떠는 것일까 싶긴 하지만 어쨌든 낙장불입의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작업실을 만들든 그냥 집에서 늦잠 자는 사람이 되든 원래 있던 곳의 바깥에 있게 되기는 할 거다. 나는 맘껏 예민하게 굴면서 내가 뭘 해보고 싶은지 땅을 더듬거려 본다. 회사 바깥에서 잔뜩 망나니같이 굴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해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놀란다. 좋은 시절이다. 운전면허를 따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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