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40. 사랑 혹은 재탕

세점사이의 마흔 번째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4.11.18 | 조회 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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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마흔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어느새 올 가을 보내드릴 열 편의 글도 마지막이 되었네요. 꼭 여름의 연장선 같은 가을이었는데 갑작스레 일요일의 출퇴근길은 퀼팅자켓 하나만 입은 걸 후회할 만큼 추웠습니다. 꼭 연재가 끝나는 걸 기념이라도 하듯! 오늘도 바로 글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글 뒤에 마무리 인사까지 함께할게요. 권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랑 혹은 재탕

좋아했던 동네들도 권태에는 별 수 없는 듯했다. 몇 년을 다니고 나니 동대문 성곽길이나 도봉산 산 아래 풍경 사이를 지나면서 카메라를 꺼내지 않은 지도 꽤 되었다. 내가 어쨌든 예쁜 동네라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이 길들의 풍경이 너무 좋아 사람들을 불러다가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었고, 그 사진들은 제법 마음에 들었었다. 하기사 뭔가를 꼭꼭 씹어 먹듯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사진을 찍어 댔으니, 그런 식으로 몇 년을 질리지 않았다면 내 마음이 꽤 오래 갔다고 말해도 좋을 거야. 사람들은 멋진 풍광의 여행지들도 하루짜리 동네 사흘짜리 동네, 여러 번 올 동네로 나눈다. 아마 도봉산이나 동대문이 세계 어디의 여러 번 갈 절경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곳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올해 청계천 계단 아래로 내려가 걸은 일이 없네. 며칠 전에 출근을 하다가 청계천변 나무들에 햇빛이 드는 걸 보고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나뭇잎에는 예쁘게 가을물이 들어 있었다. 아마 여름에도 여름대로 아름다웠겠지. 한 해에 한 번도 채 내려가지 않고서 권태를 논한다는 건 좀 어이없는 짓 같았다. 처음 이 동네에서 일할 때 말했던 좋음에는 확실히 청계천이 포함되어 있었다. 첫 해에 나는 틈만 나면 청계천을 한참 걸었고 종로나 을지로라고 불러야 할 즈음이 되어서야 뒤돌아왔다.

사무실 앞 청계천
사무실 앞 청계천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동네들에 아직 질리거나 한 것은 아니다. 도시 한 켠에 배산임수를 갖춘 곳에서 살고 또 일하는 것은 질린다는 이야기를 하기에는 너무 사치스러운 것이라. 산과 성곽을 보는 일을 지겨워할 만큼 주제를 모르지는 않는다. 다만 카메라를 드는 손이 조금 무거워졌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 동네들에서 이미 수천 수만 장의 사진을 찍었다. 매번 한 발짝마다.

비슷한 이야기를 다룰 때마다 어느 외국 영화의 이야기가 불려나온다. 매일 똑같은 골목을 사진으로 담는 어느 노인에게 다른 사람이 왜 매일 같은 걸 찍느냐고 핀잔을 주고, 그 노인은 사실 매일이 다르다고 응수한다지. 실제로 그의 사진에는 매번 다른 디테일들이 실려 있다는 이야기. 매일의 다른 빛, 다른 사람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이야기이지만 사실 나에게 얼마나 힘이 될 수 있는 이야기인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매일 같은 거리의 조금씩 다른 디테일하고는 조금 다른 걸 담고 싶어하는 사람이어서 그럴 것이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을 따라가고 싶어하지만 그가 남긴 여러분의 동네부터 찍으십시오 하는 말에는 나도 당신처럼 뉴욕 살았으면 이런 고민 안 했어 하고 시비를 걸고 싶어지기도 하고. 그러나 그가 어디에 살았든 그는 유일한 존재로 남았고, 더 나이가 들어서는 뉴욕의 거리 이후의 것들을 담았다.

그러나 내가 이 곳에서 공들여서 무언가를 찍는 행위가 결과적으로는 이미 존재하던 무언가의 답습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싶어지는 우울은 쉽게 피해가기 어렵다. 첫 순간 이후 나는 반복할 뿐이다.

종종 사진 수업을 할 때마다 결국 가장 중요하게 다루게 되는 질문은 그래서 대체 무엇을 찍을 것인가였다. 연속적인 시공간 안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하필 그 순간의 그 공간을 골라 사진을 담는다. 하필에 대해서. 매일 같은 장면을 담는 데에 하필의 순간을 부여하는 것은 왠지 과분한 데가 있어서, 나는 사진을 찍고 머쓱하게 변명을 덧붙인다. 이걸 왜 찍었지 하고. 엄밀히 말하자면 비단 사진만의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그런데 사실 엄격한 잣대를 대고 보자면 합당한 ?’라는 것이 어디에 있겠어요. 어쨌든 시덥잖은 일들 주위에서 살고 이유는 붙이기 나름이다. 내가 붙인 이유를 사진 안에 멀끔히 가져갈 수만 있다면.

질리고 별 것 없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1킬로그램 넘는 카메라는 거의 매일 들고 다닌다. 꺼내지 않을 뿐이다. 사실 얼마 전에 조금 무리해서 핸드폰을 최신형으로 바꾸고 나서는(이제 핸드폰이 웬만한 카메라보다 비싸다는 충격적인 현실!) 카메라가 없더라도 찍는 일 자체를 못하지는 않게 됐지만, 정말로 어쩌다 가끔씩은 카메라가 있었어야 했는데 하는 뼈아픈 후회를 하게 된다. 그렇다. 매일 보는 집 앞이나 매일 나서는 출근길의 어느 구석에는 한참이나 반복해서 다니면서도 꼭 카메라로 찍어야만 성이 차는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면 해 좋은 날 멀리서 보이는 동대문 성곽공원의 실루엣 같은 것. 해가 저무는 종로의 전경같은 것. 혹은 눈이 쌓인 도봉산의 봉우리, 아니면 한여름 해 지는 색 역광을 품고 멀리 보이는 울창한 북한산 풍경. 안개비가 내리는 밤 커다란 광고판의 불빛이 빗방울을 타고 구름처럼 빛나거나, 동대문 처마 위에 소복한 눈이 내려앉는 풍경. 그런 순간들은 똑같은 이야기를 할까봐 무서워하며 지나치기에는 너무 아름답다. 유치한 표현이지만 내가 그 장면들을 사랑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기꺼이 중복과 초라함을 감수한다. 바로 앞선 자리에서 매일 같은 길거리를 찍는다던 영화의 이야기에 딴지를 걸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하지만 나는 위로받지 않아도 좋을 만큼 그 장면들 앞에서 매번 후회한다. 어쨌든 나에게는 가방 안에 1킬로그램 정도를 더할 만큼의 마음은 있는 모양이다.

해 지는 종로
해 지는 종로
눈 속의 동대문
눈 속의 동대문
안개비
안개비
눈 오는 도봉산
눈 오는 도봉산
야생의 여름
야생의 여름
성곽공원
성곽공원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면서 자가복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는 어렵다. 예를 들면 나는 글을쓰면서 도봉산에 대한 이야기를 꽤 자주 했고, 사진에 대한 이야기도 제법 자주 했다. 사진을 찍으면서 텍스쳐의 대비는 너무 많이 사용한 문법이며 고요한 일상에 대한 묘사는 이제 반복적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하다. 단순히 소재에 대한 것을 떠나서라도 저들을 조합해서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서나 메시지는 끊임없이 반복되어왔을 것이다. 어쩌면 소재보다도 더 노골적으로.

그런가 하면 한 번 다루고 다시 다루지 않는 소재들도 있다. 그건 그 소재 자체가 얼마나 매력적인가와는 크게 관계가 없다. 나는 어떤 장면들을 프레임 안에 담고서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고, 그것들을 나중에 다시 한 번 재현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사람들이 얼마나 좋은 반응을 줬냐 역시 큰 관계는 없었다. (물론 돈이 걸린다면야 열심히 재현을 하겠지만, 어쨌든 그게 자의는 아니니까.) 그냥 어떤 이야기, 혹은 어떤 이미지는 몇 번이고 반복하게 된다. 첫 눈에 반하지 않더라도 그렇다. 편식이나 답습이라고 해도 별 수 없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냥 손이 그 위에 가 있었다. 그런 반복의 특징이 있다면 역설적이게도, 결코 똑같지 않다는 거다. 남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보기에는 다르다. 그러니까, 출근길의 풍경 같은 거다. 구름의 모양이 어떤지, 비를 맞는 사람들의 우산이 어떤 색조합을 가지고 있는지, 눈발이 얼마나 거센지,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어떤 마음으로 찍었는지.

열심히 합리화를 했지만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사실 매일 똑같더라도 상관없다. 나는 몇 년째 커피가 놓인 아침의 책상을 찍는다. 그 매일의 사진들이 언제나 최종 보정을 거쳐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에 업로드되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똑같은 잔 안의 똑같은 내용물을 담고 있는 사진들이라 온통 도배하기는 좀 머쓱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권태롭느냐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고 답하겠다. 나는 새 잔이 가지고 싶고 커피를 찍을 새로운 공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쨌든 여전히 그 장면을 보면 예쁨을 느끼고 카메라를 든다. 새삼스럽게.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밤을 새워 이야기해도 상관없듯이.어쨌든, 나는 매일 같은 모습 안에서 매일 다른 장면을 느낄 수 있다. 나에게는 디테일이 보여. 하나의 장면은 내 안에서 다시 정의된다.

책상 위의 커피
책상 위의 커피

어차피 사람의 생활 반경이란 열의 아홉은 거기서 거기겠지. 여행을 유달리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권태는 숙명과도 같을 것이다. 여행을 많이 안 다녀봐서 모르겠네. 자주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여행도 권태의 하나가 될까? 어쨌든 결국 삶이란 비슷하게 생긴 매일 보는 장면들로 이루어진 모자이크겠지. 그러나 각자가 가진 서로 다른 결의 애정들이 각자가 감각하는 세상을 또 다르게 만든다. 그 안에서 생활은 참 지겨우면서 마음 가는 세계의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것을 의미없는 자기복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래 머물렀던 동대문을 곧 떠난다. 같이 공간을 쓰던 사람들에게는 이미 떠나겠다는 이야기를 전했고 지금은 새 작업실을 만들기 위해 부동산을 알아보고 있다. 지금보다 좀 더 북쪽의 동네고, 살아보지 않은 동네다. 어쨌든 다음 주말에는 짐을 뺄 것이다. 사실 아주 떠난다고 말하기에는 민망한 데가 있다. 어쨌든 필름 현상소 같은 것들이 여전히 동대문 근처에 있을 것이고, 내가 종로를 끔찍이도 좋아하는 만큼 몇 번은 스쳐가겠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주 거래처일 테니 또 가서 미팅을 할 것이다.

그렇게 들르는 동대문은 더 이상 권태로운 공간이 아니게 될까? 어릴 때 살던 곳에 오랜만에 갔을 때 느끼는 감정이 아, 질린다 같은 게 아니듯이. 권태 없이 좋아하는 마음만 남게 될까? 모를 일이다. 내가 아직 어디가 될지 모르는 새로운 동네의 어떤 점을 좋아하게 되고 어떤 점에 질리게 될지 알지 못하듯. 어찌 되었든 내게는 새로이 커피를 찍을 책상도 생길 테다. 또 마음이 가고 또 관찰하고 또 이상한 디테일을 찾고 또 질리고 또 그럼에도 반복하겠지. 나는 또 그 별 것도 없는 산동네에서 새로운 세계를 쌓고. 사울 레이터의 이야기를 슬쩍 생각하며 카메라를 챙길 것이다.

종종 삶이 너무 지겹고 너무 길다고 느낄 때가 있다. 별 일이 없다면 앞으로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몇십 년 정도 더 살아야 할 거라는 게 두렵기까지 할 때. 하지만 문득 오늘 같은 날이 있다. 새로 생긴 장면 안에서 사진을 찍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미래에 대해 상상하는 날. 그렇게 감각하는 하루하루 사이에는 또 무엇이 지루해지고 당연해질까, 그리고 내가 거기에 또 어떤 가당찮은 이유를 붙여 사진을 찍고 이야깃거리를 만들까. 세상에 내가 아직 사랑하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 그런 궁금증들이 꼬리를 무는 날. 그런 때면 남은 수십 년의 생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 아, 벌써 겨울이다.


가을 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준히 읽어 주셨다면 눈치...를 아마 채셨겠지만 이번 시즌에는 기존과 다르게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해서 계속 변주를 주는 방식으로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니까, 세점사이 31 번째는 이번 시즌의 말 그대로 서문이었던 셈입니다. 사실 아쉬운 것들이 많은 시즌입니다. 주제의 변주를 이어가려다 보니 동어반복적인 부분도 많았고, 무엇보다 야심차게 준비했던 것과 다르게 퀄리티 컨트롤에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살면서 가장 바빴던 가을을 보냈기 때문일 겁니다. 봄과 가을마다 쓰는 세점사이는 원래부터가 바쁜 시기의 주간 스불재입니다만 이번에는 정말 그 어느 때보다 바빴어서요.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는 나날을 보냈습니다만 그 사이사이에도 어쨌든 글을 쓴 제가 징하기도 하구요. 아무튼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아쉬움도 많이 남고~그렇습니다. 주제가 주제이다 보니 지난 시즌들에 있었던 좀 산뜻한 체감의 글들도 없는 것 같고 다 끝내고 나니까 말이 주저리주저리 많아지네요. 아무튼간에. 그럼에도 이번 시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어쨌든 나름대로 도전적인 걸 해봤는데 어찌어찌 끝냈으니 그건 그것대로 기쁩니다.

 

사실 세점사이는 네 번째 시즌을 마지막으로 할 예정이었습니다. 네 개의 계절, 40개의 글 정도면 딱 좋지 않나 싶었거든요. 세점사이를 처음 시작한 게 제가 동대문에서 일을 시작할 때였고, 지금 딱 동대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니 시기적으로도 적절합니다. 그런데 또 짠 이제 끝! 하려고 하니까 괜히! 또 막 미련이 남고 그렇네요. 더 할지 어떨지는 우선 겨울을 잘 보내고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제 더 많은 글과 사진은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저는 언제나 텍스트 공장 사진 공장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https://blog.naver.com/mnx2575

https://www.instagram.com/chat.baker/

https://www.instagram.com/lazy_wave.film/

 

를 찾아주시면 아주많은것들...(진짜엄청많음)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암튼간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한 겨울 되시구요. 좋은 소식으로 또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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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정

    0
    6 months 전

    조 현식 작가님! 그동안 다정한 문장들로 일상에 따뜻함을 선물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번 가을은 유난히 바쁘고 정신없는 나날들이 많았는데, 지겹게도 싫은 월요일마다 글을 읽으며 잠시라도 쉬어갈 수 있었어요. 그 소중한 시간이 저에게는 위로이자 쉼표와도 같았습니다. 앞으로도 작가님의 행보를 응원합니다 ! :)) 항상 행복 가득하시길요 !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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