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31. 사과 옆에는 귤

세점사이의 31번째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4.09.16 | 조회 3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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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서른한 번째 레터를 보내며 인사드립니다. 마지막 레터를 보낸 지 거의 일 년이 되었네요. 원래 봄과 가을을 번갈아가며 편지를 보낼 예정이었지만 어쩐지 지난 봄에는 너무 넋이 빠져 있었습니다. 뒤늦게 가을을 맞아 글을 씁니다. 사실 아직 조금 덥지만, 제가 오늘 가을 옷 쇼핑을 했으니까 가을인 걸로 해둘게요. 아무튼, 네 번째 계절입니다. 반갑습니다.

뉴스레터를 쓰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았는데요, 이전과는 조금 다른 방식의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그 고민이 글에 묻어났으면 좋겠네요. 사담은 여기까지 하구요, 오늘 글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사과 옆에는 귤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작은 이야깃거리 삼아 대학교 신입생 때 현대시론 수업을 들었던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수업을 진행하셨던 선생님께서는 유명한 시인이셨고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 선생님을 존경하거나, 최소한 좋아하는 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분이 학부 선배이자 선생님으로서 직접 고른 작품들을 한 학기동안 함께 강독하는 시간을 가지다니. 비슷한 것들을 좋아해서인지 사람들은 대체로 비슷한 방식으로 감탄했고 그걸 들은 나는 살면서 몇 번 없을 기회를 누린 기분이 되었다. 하기사 실제로 그런 멋진 경험을 누린 사람은 세상에 몇 없을 것 같긴 하네. 내가 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 하나만 빼면 정말로 그랬다. 얼마나 멋진 경험일지 상상하며 부러워 마지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반쯤 거짓말로 맞장구를 쳤다. 진심은 아니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선생님께서는 본인이 꼽으신 몇몇 작가의 몇몇 시집들을 보면서 그 사람들의 작품세계에 대해서 설명하셨다. 당신께서는 카리스마가 대단하시고 말씀에도 거침이 없으셔서 동기들을 따라 앞자리에 앉은 나는 수업을 들으며 왠지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니와 장정일과 심보선과 이성복과 서대경과 최승자와...그런 굉장한 사람들. 과제는 늘 시를 읽어오는 것이었다. 학생 각자가 수업의 주제가 되는 시집을 읽고 몇 작품을 자유로이 꼽아 그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을 발표하는 방식. 선생님께서는 발표를 듣고 해석에 맞으니 틀리니 굳이 첨언을 하지는 않으셨다. 다만 내가 혼자서 한 해석들이 대체로 선생님의 것과 달랐으므로 나는 대충 내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나는 빨래라는 단어에서 빨래 외의 것을 생각하는 것을 좀 힘들어했지만 선생님은 다층적인 비유의 깊은 곳들을 능숙하게 긁어내셨다. 어쨌든 한 학기가 지나 나는 내가 시를 읽는 데에 재능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선생님도 대충 나와 생각이 비슷하셨는지 별로 재능없어 보이는 점수를 주셨다. 내가 알레고리를 잘 빚은 소설들을 좋아하는 20대 후반으로 자랐다는 사실은 비웃기 좋은 일이다.

 

어찌되었든간에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현대시론 이야기를 한 다음에는 대체로 사진 이야기를 했다. 현대시를 누구에게 배웠는가와는 관계없이 어쨌든 나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시론은 이제 십 년 전의 이야기고, 사진이 막 내가 먹고사는 일과 연결되기 시작했을 때에도 이미 사오 년은 된 이야기였다. 당장 우리에게는 사진 쪽이 여러 모로 좀 더 중요한 의제였다. 

한 가지 스스로 찔리는 것이 있다면 내가 사진을 찍거나 감상하는 과정을 자주 시 쓰는 것과 연결지어 설명했다는 거다. 사진 안에 사과와 귤이 있다. 사과는 사과, 귤은 귤. 이후에도 비슷하거나 다른 것들이 띄엄띄엄 놓이거나 안 놓이거나 한다. 하지만 사과는 왜 귤 다음에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여전히 비밀찾기에는 재능이 없다. 그러나 어쨌든 사진사는 사과 다음에 하필 귤이 놓인 사진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로 결정했다. 마치 김춘수의 ‘강우’가 냄새와 침묵과 빗소리를 하필 이어 썼듯이. 그 시에서는 냄새가 냄새고 침묵이 침묵이고 빗소리가 빗소리인 가운데 그 사이사이의 역학을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게 좋았다. 여백을 곰곰 생각하다 보면 나는 장대비처럼 슬퍼졌다. 그렇게 빽빽한 슬픔이 몰려오는 것처럼, 사진 역시 그렇게 이루어진다고 말하기를 좋아했다. 나는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고, 그게 내가 사진에 대해서 좋아하는 점이었다. 작품 해설에서 대체로 다들 작품과 완전히 딴소리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이어지는 이야기를 한다는 점도. 사진과 해설이 함께 놓인 자리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로 그곳을 보면 한 세트의 그림이 완성된다는 것도. 그래서 나는 빈 공간 많은 거칠음이 좋았다.

어쨌든 그건 수업을 듣고 몇 년이나 지난 뒤의 이야기이다. 사진이든 시든 그렇지. 사실 지금의 시론을 가지고 스무 살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다지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암호 찾기에는 재능이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시중의 수많은 시들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그건 사진에서도 그렇다. 나는 사진에서도 철학적 메시지보다는 구조와 질감과 우연에 매료되는 편이다. 그러나 내가 여백을 둔 말하기 자체를 좋아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어서 나는 일상을 이야기할 때마저도 비슷한 방식으로 말한다. 사실 그건 내가 다른 말하기 방법을 잘 몰라서 벌어지는 일 같기도 하지만. 며칠의 종일에 걸친 메모들을 이어서 일상에 대해서 쓴다. 메모와 메모 사이를 잇는 데 필요한 자연스러운 중간 단계나 대화문 같은 걸 쓰는 데에는 재능이 없기에 그냥 엔터로 한 문단을 떼어 버리고 만다. 이어지지는 않지만 그것들끼리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니다. 나는 그들을 감히 묶어 쓰기를 택했으니까. 그 사이사이에 주석이 있을 때는 훨씬 힘이 약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건 내가 하나의 사물에 대해서 얼마나 상세히 이야기하는지와는 별개의 차원이다.

모호한 정물
모호한 정물
빨간 꽃과
빨간 꽃과

어릴 때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각별한 신앙심이 있어서 열심히 다닌 쪽은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신앙심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 그걸 취득하기 위해 노력을 한 쪽이었다. 정신머리가 있을 때부터 스무 살때까지 꾸준히 다녔으니 천국문 앞에서 하이패스는 못 되어도 잠깐 저쪽 가 계세요 출입국 조건좀 보고오자 정도의 대우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노력의 태도 역시 제법 나쁘지 않았다. 어느 정도로 제법이었냐면 모범적인 하나님 어린이로 표창을 받고 전도사님의 원픽 청년이 될 정도. 교회에서 드럼도 배우고 성가대도 했고 친구도 사귀었으며 거기서 살기까지 했다. 신앙심은 털끝만큼도 없었지만.

그냥 뭐랄까,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비슷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다 보니 충만한 신앙심을 가지는 것이 좋은 성적을 받는 것으로 내적으로 동치되어 버렸던 것 같다. 수학에 애정이 없어도 수학 공부를 하기는 하는 학생처럼. 그러나 수학 일등급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 신앙이라는 것을 도저히 가질 수가 없었고, 그래서 모범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따라하는 쪽으로 노력을 했다. 그런데 이제 포즈만 너무 잘 잡아버린 거지.

교회 장로인 형들을 두고 본인은 신학대학에 다니다가 학업을 관둔 아빠와 장래희망이 전도사 겸 시인이었던 엄마 사이에서 나고 자라 평생 교회를 열심히 다닌 애는, 자라서 아는 건 많고 믿음은 없는 사람이 됐다. 결론적으로는 나를 너무 좋아했던 전도사에게 사실 저는 신앙이 없습니다 하는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던지고 교회와 결별하는 결말을 맞이했다. 나중에 자라서 보니 애초에 내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갈망이나 의문은 보수적인 기독교계에서 해소해주거나 품어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말하고 보니 너무 사이비 레파토리 같은데 그렇다고 다른 걸 믿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것 역시 십 년 지난 일이고 나에게 시와 마찬가지로 재능이 없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사실 둘을 같이 놓기는 좀 웃긴 일이다. 시는 잘 몰랐던 것이지 싫기까지 했던 적은 없지만 교회는 대체로 싫었어서. 공통점이라면 나에게 재능이 없었다는 것과 내 주변 모두가 그것을 사랑했다는 것과 남들이 내가 당연히 유창할 거라 생각했다는 것과 내가 배우는 과정에서부터 자주 오답을 골랐다는 것 정도.

사실 마냥 싫어한다고 말하기에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교회 사이의 공통분모가 종종 있었다. 처음에는 나도 내 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좋고 싫음은 벤 다이어그램으로 해석할 수 없는 거였나? 좀 더 자라고 보니 교회 안에서 자신의 믿음을 통해 내가 의문을 가졌던 종류의 것들에 답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을 내가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나는 직접 믿는 일보다는 그런 사람들을 응원하는 데에 더 잘 어울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을까? 포함 관계만으로 좋고 싫음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대하는 건 어려웠다. 어쨌든 나는 그들을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동시에 쉽게 좋아하게 됐다.

시를 읽는 일과 교회를 다니는 일을 동치해서는 안 되겠지만. 누군가는 감히 비슷한 구도로 둘을 놓았다는 사실에 불쾌를 느낄 것이고 누군가는 감히 비슷한 구도로 둘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에 불쾌를 느낄 것이다. 시에 대해서, 혹은 시가 아닌 것에 대해서. 혹은 사진에 대해서. 그러니까 이것은 높은 확률로 실패한 구도 만들기일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이 둘을 굳이 연달아 놓고, 또 게시를 할 것이다. 며칠 전의 메모에 그렇게 써 두었기 때문이다. 메모 안에는 둘을 이을 아무런 아교도 없다. 어쩌면 없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선명한 사진을 찍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물론 전문적인 제품사진 같은 것의 영역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종류의 탁월한 선명함에는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다만 이 시대에, 쨍한 빛 아래에서 날카로운 선을 가진 이미지를 만드는 일 자체가 너무 간단한 일이라는 데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을 것이다. 고화질에는 더이상 감탄할 수 없게 된 시대이므로. 말끔한 이미지들을 보면서는 이상하게 미끌거림 같은 걸 느끼곤 했다. 그 분명한 사각 안에는 내가 더 가까이 갈 수 없는 미끌거리는 장벽이 있는 것만 같았다. 내 것조차 내 것같지 않은. 사진 안에 사과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에는 선명보다 더 좋은 발화의 방식이 없을 텐데도 그랬다. 사실 나는 사과가 그냥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는 것 자체를 원했던 건 아닌 것 같다. 구태여 내가 만든 모양새 속에 사과를 두고, 사과가 담긴 색깔을 살짝이나마 바꾼 뒤에야 나는 만족할 수 있었다. 다른 사과와 구분할 수 있도록. 인쇄물 속에 그걸 담으면 더없이 좋았다. 내가 그 장면을 가진 기분이 되어서. 그 사진 안에는 사과가 있어. 그 사과는 내가 아는 사과야. 종이 안에 그 사과가 있어. 그 사과 옆에는 귤이 있었고. 존재된 세계에 대한 소유를 주장한다. 선명은 은폐 몽매는 해방. 

그래서 필름 사진이 좋았다. 정확히 말하면 남이 찍은 필름 사진이 좋았다. 우연성이 작용하는 필름 사진을 찍는 과정 자체는 즐거웠지만 그 결과물 자체에는 크게 호감이 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 내가 그 안에서 건드릴 수 있는 요소가 많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물의 필름 질감이 결국의 디지털 화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서 더더욱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남이 찍은 필름 사진에서는 거기에 얼마만큼의 의도가 들어갔는지, 그것이 디지털 안의 그레인인지 인쇄된 질감인지 알 필요가 없었다. 사과 옆에 귤이 있었고 사과는 사과고 귤은 귤이고. 나는 그것들을 띄엄띄엄 읽으면서 사진 안의 공백과 텍스쳐를 양껏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사진을 찍는 일과 사진을 읽는 일 양쪽이 내포하는 개별의 폭력성을 외면하지 못한다. 내가 그 과정을 더없이 좋아한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나는 내 멋대로 그린 지도 하나를 들고 이 건물 저 거리에 보이는 대로 이름을 붙인다. 사과가 사과처럼 보여서 사과라고 부르는 일은 진실과 얼마나 접해 있을까?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당신에게도 지도가 있나요 같은 생각을 한다. 여기에 한 가지 장점이 있다면 하나의 그림을 천천히 늦게 파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나는 이제 왜 내가 질감과 어조같은 것들에 집착했는지 알 것도 같다. 정말로 새삼스럽게도.

그러나 이 일방적인 포식이 없다면 세상에는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내 세계에서 이들을 함께 놓을 수 없다면 햇빛의 쨍함에 순순히 수긍하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무작위로 놓인 사건과 무작위로 놓인 상을 무작위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백하고 순수하며 그 누구도 돕지 않는 일일까? 다만 나는 무언가를 오답이라 선언하지는 않으려 노력하겠지만. 누군가에게 오답을 선언한 세계와는 다르게. 내가 돌고 돌아 택한 언어는 해석을 위해 내놓아진 텍스트 안에서 과감하게 다층적인 비유를 긁어내던 십년 전 선생님의 방식과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들에 대해 설명하기를 거부하는 세계 안에서 설명을 구하고자 노력한 이들에게 마음이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히 이어붙여진 두 세계는 일방적 폭력으로 화해한다.

나의 모호
나의 모호

이것들을 세상의 삼라만상에 적용할 생각은 없다. 나는 얄팍한 교훈 같은 것들을 인생의 흐름에 비추어 보고 싶어하는 안 멋진 습관이 있어서 그러지 않으려면 스스로의 몸가짐을 경계해야 한다. 그냥, 아주 최근에 와서야 시가 말하는 방식이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들과 어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사진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소심하게 나는 둘의 작법을 섞고 경계를 흐린다. 안 그런 척 모자이크를 만들어 멀찍이 떨어져 본다. 사실 나는 이것까지 그리고 싶었던 거야, 하고 속으로도 말을 흐리면서. 사람의 사진 옆에 초록의 사진이 있고, 엊그제 생각한 것들의 글 위에 삼 주 전의 사진이 있고, 혹은 미래에 대한 상상이 놓이고. 대단한 예술을 하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그런 생각을 했다는 말로 꼬리를 흐린다. 단언은 내가 잘 하는 일은 아니다.

나는 트렌드에 잘 맞는 멋진 시나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진 같은 것들을 여전히 잘 읽지 못한다. 이름이 네 글자 넘어가는 서양 평론가나 학교 바깥의 이론들을 보면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 뿐. 멋진 것들을 읽고 기뻐할 수 있다니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참 많구나 생각한다. 

그러나 거창한 것들을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어떤 것들은 별것 없는 일상에 대해서 이야기할 테고, 어떤 것들은 세상의 편견을 별 성찰도 없이 재생산해버릴 것이다. 어떤 것들은 표면적인 미에 천착하겠지. 그러나 나는 그렇게 내 방식대로 나열된 첫 세계를 가진다. 그 얄팍한 세계를 가지고 그 얄팍한 세계를 확장시키는 것이 나의 허튼 반항. 어쨌든 띄엄띄엄 말하고 읽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고, 나 역시 여백 많은 글들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흡족해할 것이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여기 안에 있고, 처음으로 세상을 가진다. 그들을 맘대로 알레고리 위에 두거나 임의의 여백 사이에 띄워놓은 채 읽고 마는 폭력에 무고할 예정은 아직 세우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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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고양이

    0
    about 1 year 전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에 드는 회차였어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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