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서른다섯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벌써 이번 시즌도 절반이 가 버렸네요! 가을도 절반쯤 지났을까요? 사실 저는 아직도 땀을 뻘뻘 흘리며 다닙니다. 가을보다는 덜 여름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달까요? 나름대로 연재 동안 개근을 했는데 이번 회차는 하루를 늦게 보내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기록이 너무 아까워요. 어쨌든, 일정을 정리하고 열심히 글을 써서 이번 주도 글을 보내 드립니다. 유머에 관한 글입니다.
지금부터 웃겨보겠습니다.
세상에 재미있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데, 어째서 나는 그 중에 하나가 될 수 없단 말인가? 인터넷을 떠돌며 웃긴 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아무데도 쓸모없는 패배감이 은은하게 내 정신머리에 내려앉는다. 쓸데없는 패배감이 심해지면 아, 저 개그를 내가 먼저 말했다면 진짜 좋았을 텐데 같은 진짜 쓸데없는 생각까지 하게 되고 만다. 특히나 아주 미묘한 어감의 차이 같은 데서 너무 웃긴 이야기가 나와 버리면 나는 왜 내 문장에 저런 리듬을 짜넣지 못했을까 종일 한탄을 하다가, 어쩌다 한 번 웃겼던 장면을 떠올리며 그 때의 미묘함에 대해서 복기를 한다. 우와, 글자로 적어놓고 보니까 진짜 별로다.
하나도 쓸모없는 고민들만 양손 가득 들고 삶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지만 웃김에 대한 열망이 특히나 무의미한 건 애초에 내가 그다지 재밌는 사람으로 나고자라지는 않았다는 데에 있다. 인생은 길고 글자는 많아서 내 말들이 가끔 적절하게 웃길 때는 있겠지만 벚꽃철 품 안에 날아든 꽃잎을 어쩌다 잡았다고 포수가 되라는 말을 하지는 않듯이, 아마 그건 다른 거겠지.
그러나 미련을 완전히 버렸다면 이런 이야기를 애초에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볍고 산뜻하고 웃긴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은 여전히 내 안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다. 재미있는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내가 재미있어 하는 것들에 대해서 다루면 좋을까?
내가 특히 좋아하고 시샘하는 웃김들은 대체로 한 카테고리 안에 모여 있다. 맥락의 허점을 재미있게 비트는 말장난이나 무맥락 연결, 상황을 그려내는 멋지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비유적 콩트, 아니면 서늘하게 내려앉는 자기비하. 말하자면 냅다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외치는 배우 김기천 씨의 트위터 글이나 뭐 그런 것들. 재능이 없는 것과는 별개로 어쨌든 좋아하기는 좋아해서, 나는 웃긴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의 책을 사서 며칠을 히죽이며 보고 조그만 위트가 보이는 SNS 페이지를 오래도록 구독한다. 그런 게 있어서 또 살지 뭐. 샘은 좀 나지만.
이런 것들은 전적으로 세계를 보는 감각이나 언어의 센스 같은 것과 연결되어 있기에 연마한다고 능숙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비극적 사실과는 별개로, 쉬이 시도할 수 없는 무언가이기도 하다. 너무 쉽게 불쾌와 연결될 수 있으니까. 농담-이라는 말이 언제나 모욕과 당황 뒤에 따라붙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어쨌든 그냥 안 웃기고 말지라는 선택지를 자주 고르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인터넷 세상에는 모욕이 참 많다. 인스타그램이든 트위터든 페이스북이든 네이버 뉴스의 댓글창이든 디씨인사이드든 아무튼 뭐 이렇고 저런 데든간에. 온 힘과 정성을 다해 누군가를 모욕하고자 글을 쓰는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적지는 않지만, 주요한 모욕을 가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실제로 주체적인 악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지는 않는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 그냥 웃기려고 그런다. 정말 웃긴 말장난을 하려다가 남의 삶을 끌어다 놓고 기깔난 비유를 하려다가 남의 아픔을 끌어다 놓게 되고 뭐 그런 거지. 개그가 지나가던 자리에 그냥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거다. 사람들은 그걸 보고 웃거나 웃지 못하거나 한다. 그런 때 웃음은 참 멋지고 참 무서워진다. 웃음은 탐날 만큼 긍정적인 가치라서, 웃음을 배반하는 사람은 참 별로인 사람이 된다. 분위기는 깨면 좀 그렇긴 하니까 웃지 못하면 탈락.
아니, 웃긴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나는 또 이런 데에 눈이 가 버리고 만다. 그러면 확실히 안 웃긴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마는데. 시선을 조금 돌려 보기로 한다. 경험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떨까?
이왕 앞에서 안 멋진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김에 진짜 안 멋진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기로 한다. 나는 옛날에 유행하던 페이스북 대나무숲에 댓글을 많이 달았다. 짜잔. 거기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인생 상담을 해주고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무슨 텍스트가 나오면 거기서 무슨 단어를 뽑아다가 말장난을 했다. 벌써 십 년 가까이 된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사람들을 어처구니 없이 웃긴 때가 아주 적지는 않아서 (위키트리에서 퍼간 적도 있다. 왜...?) 그게 삶의 낙이었더랬지. 산타는 산림청 소속이라든가 뭐 그런 택도 없는 거. 아무튼 그러다 보니 거길 좀 자주 들여다 보면서 살았는데 그곳 댓글창은 대체로 내가 하던 것과 비슷한 되도 않는 개그의 장이었지만 애석하게도 다른 곳들이 그러하듯이 참 웃어넘기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다. (바른생활 교과서에서 봤던 인터넷 실명제의 희망찬 미래는 다 허상이야!) 참 안 멋지게도 그건 자주 싸움으로 이어졌다. 사실 유머와 시비 사이가 멀어봐야 얼마나 멀겠어?
내가 그다지 성실하지는 않은 대학생이었던 것과는 별개로 바깥에 현생이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서 웃자고 한 얘기들 보고 싸움이나 하고 있는 건 참 안 쿨한 일이었는데, 그 때의 나는 차라리 쿨하지 못하기가 더 나은 태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지금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능숙한 개그라는 렌즈의 무서운 점은 그 객체가 무엇이든 웃기게 만들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니까, 이런 거야. 최선을 다해서 승부에 임하는 스포츠맨이 힘 주는 순간의 영상을 캡쳐하면 그냥 평범한 얼굴 개그처럼 잘라낼 수 있고, 사무직 직원의 행동에서 컴퓨터를 빼면 멍하니 이상한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처럼 만들 수 있다. 충실하게 디테일에 신경쓰는 사람의 어떤 면모에 확대경을 달면 그를 이상한 데에 신경 쓰는 변태처럼 만들 수 있고,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는 사람의 어떤 면모들에 약간의 극화를 거치면 이해하기 어렵고 한심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어떤 것들에 대해 웃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개그의 소재가 되듯이. 어쨌든 그건 웃길 것이고 사람들은 화내거나 화내지 않거나 할 것이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에서 개그가 언제나 투쟁의 강력한 무기가 되어 왔던 이유였을 것이다. 웃김의 대상이 되는 순간 어쨌든 개그라는 마당 안에서는 맘껏 재단하고 비웃을 수 있는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었든간에 마음대로 비웃을 수 있게 되는 비꼬기의 즐거움이란 얼마나 짜릿한가? 마음대로 맥락과 다른 상황을 가정해 비유 안에 집어넣고, 맘에 드는 구도만 남겨두는 편안함이란. 다만 다들 웃기는 걸 너무 좋아한 나머지 평소에 하던 것들을 그대로 재생해놓고 웃어버리고 마는 일이 너무 많을 뿐이지. 선생님 그건 투쟁이 아닙니다. 기존에 있었던 차별과 폭력의 재생은 유머라는 이름으로 쉽게 합리화된다. 그 사람이 무엇을 보고 웃는가에 따라 사람을 판단할 수 있다는 해묵은 이야기가 지시하는 바도 아마 여기에 있겠지.
아니, 또 이런 얘기를 해버렸잖아. 진짜 짜증나. 내가 늘 이런 식이다. 썰이나 풀며 산뜻하게 웃긴 이야기를 하려고 들어도 세 마디 이상을 이어나가질 못한다. 그래서 개그 자체에 좀 노이로제가 생겨 버리기도 했었지. 몇 년 전쯤에는 저 폭력적인 개그라는 것에 너무 지쳐 버려서, 아예 독일로 교환학생을 가보기로 마음먹기도 했다. 독일은 정말 재미없는 걸로 유명한 나라다. 독일 유머에 대해서 이런 말이 있다지. 독일 유머를 듣고 웃지 못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독일어를 알아듣지 못해서 웃지 못하고, 그 다음에는 웃기지 않아서 웃지 못한다고. 하지만 어쨌든 안 웃기더라도 거기 사람들은 살아갈 테니까. 하나도 웃기지 않는 채로 살아가는 사회, 그래도 돌아가는 사회는 어떤 모양일까?
그게 궁금해서 독일어를 배우고 교환학생을 지원했다. 독일어를 배우는 과정은 끔찍했고 교환학생을 가기 직전에 코로나 사태가 터져 독일로 향하는 재미없는 여정은 재미없고 싱겁게 끝났다. 이런 상황을 일컫는 독일어 단어도 독일어 사전 어딘가에는 있을 텐데. 아무튼 나는 웃기려고 하다가 쓸데없는 폭력을 재생산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배우고 싶었다. (그들이 역사적으로 가장 끔찍하고 광범위했던 폭력을 행했던 나라인 것과는 별개로.)
노잼의 미학은 결국 배우지 못해서, 여전히 나는 재미있는 것들에 꽂힌 채로 산다. 성인군자 비슷한 것처럼 말했지만 나는 그냥 웃기기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 남들을 웃기려다가 처참하게 실패하고 고개를 숙인 적이 정말 많다. 매일 밤마다 개그를 하려 했다가 만든 끔찍한 무례들이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한 삼십 년치 정도.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사회적인 행동은 아무말도 안 하기 혹은 사회에 끼지 않기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럼에도 나는 왜 유머를 놓지 못할까? 왜 일주일에 한 번씩 글을 쓰면서도 어떻게든 웃긴 걸 끼워 넣으려고 용을 쓸까?
나아가, 유머는 왜 재미있을까? 알고 있는 대상을 변형해 새로움을 줘서?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방식대로 말해 안정감을 줘서? 남과 달리 나는 괜찮다는, 혹은 나는 우월하다는 안도감을 줘서? 혹은 친밀감이나 관계를 확인시켜 줘서? 그것은 아마 학자들이 알 것이다. 나는 그저 여전히 답습할 뿐이다. 사진이나 글이 어느 지점에 이르면 그걸로 사람들을 웃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다. (지금은 웃기지 않으면 뭐 어떤가 생각한다) 개그와 글쓰기와 사진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이 유사한 양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를 포착해 맥락을 비틀고, 가공하고 디테일을 붙이거나 빼 말하려는 형상대로 조각하는 일. 나는 여전히 그 구도에 매료되어 있고, 알레고리를 잘 사용하는 소설가들을 영원히 선망한다.
그러나 웃음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건 이제 안다. 20대 중반을 넘긴 후로 가장 노력하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냉소하지 않는 것이다. 웃김에 대한 열망이 너무 강한 나머지 나는 타고나기를 모든 것을 비웃으며 살도록 태어났다. 어렸을 땐 그게 아주 쿨한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웃는 건 좋은 거니까. 사르카즘을 즐기는 이는 필연적으로 양비론에 빠진다. 앞서 말했듯, 비웃을 만한 거리로 만들고자 하면 모두가 똑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웃기지 않게 보려면 분명 보이는데. 그 결론 없는 무기력한 웃음이 분명한 것들을 가려 버린다. 웃음은 좋은 거니까. 하지만 누군가는 이 모든 따뜻한 것들을 생각하면서, 양비론으로 빠지지도 않으면서 웃긴 이야기들을 계속해 나가겠지. 따뜻하고 웃긴 사람들. 나는 그들만한 재능과 섬세함과 노력이 없음을 받아들이고 패배를 선언한다.
서른이 되었을 때부터는 구태여 웃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시작하고 싶다. 딱 두 달 반 남았네. 여전히 되도 않는 개그를 하려 들겠지만 세 번 중 한 번 참으면 그래도 삼십 퍼센트는 덜 실수하겠지. 웃기기를 포기한 만큼 대신 다 웃는 분위기를 깨고 안 웃긴 사람이 되기를 자처할 수 있음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실 안 웃기려는 노력 같은 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이 글부터가 읽는 이들을 웃기는 데에 철저하게 실패했기 때문이다. 웃기려는 노력만큼 안 웃긴 게 또 없어서, 웃기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순간 이 글의 운명은 정해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꾸 이야기를 하다가도 그런 데로 빠져 버리고 마는걸. 디테일을 적다가도 이상한 소리가 더 먼저 떠오르고 마는데. 그러므로 그냥 안 웃긴 사람이 되기로 마음을 정한다. 세 번 중 한 번 정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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