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점사이 39. 옷장 안팎의 말들

세점사이의 서른아홉 번째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2024.11.11 | 조회 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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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점사이

말줄임표 사이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습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세점사이의 서른아홉 번째 레터를 보내드리며 인사드립니다. 오늘 레터를 보내드리고 나면 어느새 올해 가을편도 딱 한 편만 남게 되네요. 정신없이 보내서였을까요?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갑니다. 살면서 가장 바빴던 계절이 흘러가니 다행스러운 동시에 살짝 아쉽기도 합니다. 오늘은 옷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봤어요. 옷 좋아하시나요? 저는 좋아합니다. 글 바로 보내드릴게요.


옷장 안팎의 말들

스무살 때 어쩌다 보니 쇼핑 사이트 포인트가 덜컥 십만 원 정도 생겼다. 월에 아르바이트로 35만원 정도를 벌던 때라서, 거리낌 없이 쓸 수 있는 꽁돈 십만 원이란 건 정말 눈앞이 아득해지는 무언가였다. (물론 지금도 갑자기 말끔한 십만 원이 생긴다면 뛸 듯이 기쁠 것이다.)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서 이걸로 뭘 하면 좋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그 때 살던 대학교 기숙사에는 음식물 반입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식료품 같은 걸 사기도 좀 그랬고, 소셜 커머스로 책을 살 수 있는 시절도 아니었다. 31실 기숙사에는 전공책 두기도 버거웠기도 하고. 그렇다고 큰맘 먹고 음향 기기를 사기에는 좀 모자랐다. 저 돈에 보태서 가지고 싶었던 걸 샀다면 좋았겠지만 그건 나에게도 부담이 컸다.

고민 끝에 옷과 신발을 사기로 했다. 사실 당시 나는 옷에 대해서 완전히 문외한이었다. 다들 중고등학생 때의 추억으로 친구들과 옷 쇼핑을 하거나 하는 걸 자주 꼽지만, 나는 정직하게 말해서 엄마가 사오는 옷을 입는 파였다. 이렇게 말하긴 죄송스럽지만 엄마도 패션 감각이 좋은 편은 아니었고. 그러니까, 옷에 대한 관념이랄 게 전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멋진 걸 입고 싶다거나 뭐가 싫다거나 하는 건 있지만, 그건 유치원에 티니핑 옷을 꼭 입고 가야만 하는 어린이에게도 있다. 그래서 그런 짓을 해 버렸던 거지. 요즘이라면 무신사 1페이지라도 따라 샀겠지만 그 때는 그런 것도 없었다. 인터넷에서 옷 검색을 하면 키작남 닷컴이나 아보키가 나오던 아아 그것은 야생의 시대.

우선 예전에 어디서 본 적 있었던 컨버스 하이를 샀다. 내가 컨버스 하이가 끔찍하도록 안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20대 중반쯤의 일이다. 어쨌든 그 때는 그게 가지고 싶었던 거야. 나는 예전에 봤는데 예뻤던 그게 컨버스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포인트가 있는 사이트에 검색을 했더니 삼만 오천 원이라길래 265 발 사이즈에 꼭 맞춰서 구매를 했다. 지금은 내 발볼이 넓은 편이란 걸 알아서 270에서 280 정도를 구매하지만 그 때는 그런 걸 몰랐다. 컨버스 짝퉁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인데 잘도.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제일 용감하다. 아마 병행수입 상품이 왔던 것 같다. 진품이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구멍이 날 때까지 신었으니 된 걸로 하자.

가지고 싶었던 신발을 샀으니 다른 것들을 찾아볼 차례였다. 그 때의 나는 패션에 문외한인 사람 치고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왜냐면 하필 좋아하던 게 셔츠와 청바지, 자켓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검정, 회색, 흰색, 남색을 벗어나지 않았고. 어지간해서는 끔찍하기 어려운 품목들이다. 하지만 그건 엄마가 사온 옷을 조합할 때 이야기고.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은 다른 방식으로도 끔찍할 수 있었다. 하필 65000원 남은 포인트로 그것들을 사려고 했던 스무 살의 내가 그걸 처절하게 증명했다. 나는 니트를 사고 싶었고, 셔츠를 사고 싶었고, 코트를 사고 싶었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65000원으로 무슨 수로 그걸 다 살 수 있겠냐고 묻겠으나 아무 것도 모르는 스무 살은 살 수 있다. 교수가 소논문을 쓰는 데에는 오랜 세월이 걸리지만 B+ 정도면 만족하는 학부생이 레포트를 쓰는 데에는 반나절이면 충분하듯. 정체모를 3900원짜리 꽈배기 니트를 두 장 샀고 (당시 싸이버거 단품이 3200원이었다.) 구천 구백원짜리 셔츠를 한 벌 샀으며 남은 돈은 통 크게 코트에 투자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이 멋진 보카시 패턴. 사람들이 왜 비싼 돈을 주고 옷을 사는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어차피 실로 만드는 거 아냐?

오랜 배송기간이 지나고 당연히 넝마같은 게 왔다. 특히 가장 큰 투자를 한 코트가 대단했다. 딱 나만큼 뜨개질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싸구려 실로 가디건을 짠다면 그런 게 나올 것 같았다. 방에 온 룸메이트가 혹시 저 옷을 볼까봐 덜컥 무서웠다. 나는 천더미를 품에 안고 기숙사를 뛰쳐나와서,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건물 바깥 쓰레기통에 그걸 집어넣어 버렸다. 다시 인터넷으로 옷을 사기 시작한 건 한참 후 군생활을 마친 뒤였다. 그 때는 무신사가 있었다.

편하게 쌓인 옷들
편하게 쌓인 옷들
햇빛과 셔츠
햇빛과 셔츠

십 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에도 패셔니스타는 아니다. 그럴 만한 자질을 가지고 태어나지도 못했을 뿐더러, 대단하게 옷 잘 입는 사람으로 튀고 싶지도 않다. 대신 나는 고집스럽고 보수적인 사람이 됐다. 내가 입는 옷은 내 몸에 아주 잘 어울려야 한다. 내 몸 위에서 아주 완벽한 실루엣을 그려야 하고, 밸런스가 무너져서도 안 된다. 체형은 보완되어야 한다. 위 아래 컬러톤은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흘러가야 한다. 약간의 어긋남이라도 있으면 그 날은 종일 불편해진다. 옷의 소재는 싸구려 티가 나면 안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꾸민 것 같아서는 안 된다. 멋을 부린 티가 나면 안 된다. 당연히, 추레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매일 같은 걸 입는 것 같아서도 안 된다. 이상한 완벽주의. 그래서 옷을 고르는 시간이 길다.

옷을 좋아하니까 할 수 있는 짓이다. 좋아하니까 잘 하고 싶고,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티를 내기 부끄러운 거야. 내가 좋아하는 다른 모든 물건들이 그렇듯이, 나는 질감에 매료된다. 어차피 실인데 뭐가 다른 거냐고 스무 살의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 질감에.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짧지만은 않은 시간이 지나, 나는 측면으로 빛을 받는 직물이 자신의 질감을 드러내는 모습을 사랑하게 됐다. 마찰에 살짝 닳아 색이 변하고 거친 보풀이 일어나는 모습도 좋고, 그 평면의 직물들이 견고하게 짜여 입체적인 형태를 가지게 되는 것도 좋다. 단추가 좋다. 실이 좋다. 지난 일 년간은 옷을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일했다. 옷을 찍고 찍고 또 찍으면서 내가 그것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새겼다. 이 예쁜 옷이 어느 공간에 어떻게 놓여 어떤 빛을 받았을 때, 본연의 아름다움을 가장 진솔하게 드러낼지를 고민하는 시간들. 그 아름다운 물건을 가질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아서, 나는 종종 입지도 못할 옷들을 산다.

예를 들면 블레이저 같은 것들. 나는 블레이저가 어렵다. 일단 나는 멋을 낸 티를 내고 싶지 않은데, 블레이저는 본질적으로 정장, 혹은 행사용 정복에서 유래했으므로 멋내기와 따로 떨어질 수가 없다. 남들이 블레이저를 입은 게 싫지는 않다. 오히려 블레이저 자켓 패션을 좋아한다. 내가 부끄러울 뿐이다. , 그리고 대체로 주머니가 많지 않고 행동이 아주 편하지도 않기 때문에, 사진을 찍는 일을 하는 나로서는 걸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사무실에 틀어박혀 보정이나 문서 작업만 할 때 입을 만한 옷도 아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입을 일이 없다. 하지만 잘 만들어진 블레이저 자켓은 너무 아름다운 물건이다. 빈티지한 터치가 들어간 코튼 블레이저나, 몸을 부드럽게 휘감으며 흐르는 울 블레이저 모두 아름답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몇 벌을 샀고, 한 해에 열 번도 입지 못한다.

블레이저를 좋아해요
블레이저를 좋아해요

요즘 같은 계절 가장 자주 입는 외투는 워크 자켓이나 바람막이류다. 오버핏 셔츠 위에 걸쳐도 모양이 어색하지 않고, 편한 바지와 입어도 실루엣이 어긋나지 않으며, 너무 진지하지 않고, 그렇다고 추레하지도 않다. 활동 역시 편하다. 일하거나 등산하라고 만든 옷이니까 아무래도. 그리고 주머니가 여럿 달려 있고. 종종 진짜 사진사처럼 입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사진사라서 그렇겠지. 사진사가 실력을 기르는 방법으로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머리를 기르는 거, 하나는 머리를 미는 거, 하나는 수염을 기르는 건데 난 첫 번째를 하고 있다, 하면서 농담을 하기도 한다. 나는 안경이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도수도 없는 안경을 끼고, 옷 입는 모양새와 맞추고 싶다는 이유로 머리를 잔뜩 기른다. 어쨌든 사진사같은 모양새다.

가끔 이거 예쁘지 않느냐고 친구에게 이미지를 보여주면 친구는 이미 내 옷장에 몇 벌은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한다. 나는 그거랑 그거는 다르다고 소심하게 항변을 한 뒤 또 장바구니를 들락거린다. 이 색깔은 네가 좋아할 것 같다며 말을 걸어 오기도 하고 종종 그 때 입은 옷 너무 예뻤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옷 이야기를 한참. 나도 친구들에게 똑같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들은 사실 옷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너를 닮은 옷, 네게 잘 맞는 옷, 네가 생각나는 옷, 네가 있었던 그 때.

그러니까, 옷 이야기를 하면 할 이야기가 이렇게 많아지는 거다.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면 수만 자도 모자랄 만큼 할 소리가 많을 거야. 내가 옷을 좋아해서일까?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옷을 좋아하는 티를 내기 부끄러워할 만큼 옷을 좋아하고 옷을 찍는 일들을 하고. 하지만 내 호불호와 관계없이 옷 이야기에는 그 사람의 취향과 삶이 묻어난다. 그래서 옷을 신중하게 고르는 사람들이 좋고 옷을 대충 골라도 비슷한 방향으로 흐르는 사람들이 좋다. 이야기를 듣고 싶고 궁금해진다. 각자의 세계는 직물 위에서 구체화된다. 옷장의 안과 밖을 오가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사람 모양으로 쌓여 간다.

살짝 오돌토돌한 셔츠의 질감
살짝 오돌토돌한 셔츠의 질감

열세 살 때는 거의 매일 같은 옷을 입었다. 지금도 정확히 기억난다. 곰돌이 푸가 그려져 있는 플리스 셋업이었다. 두 개를 돌려 가면서 입었는데, 하나는 회색, 하나는 베이지색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사춘기가 늦게 오지 않았나 싶은데, 몇몇 애들이 그 때 나를 보고 했던 이야기가 비꼬는 거였구나 하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바로 다음 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는 찢어진 청바지와 가죽 자켓을 입고 등교를 했다. 공동 구매 교복을 입어서 교복이 제작되기를 기다리는 첫 며칠간 사복으로 등교했기 때문에. 하필 그게 입고 싶었던 거야. 당연히 그 때도 주변에서 놀렸다. 후드가 달린 반팔티를 갖고 싶다고 말했을 때 아빠는 날더러 그런 게 입고 싶을 때가 됐다고 말했었지. 그 때는 그 츄리닝이, 그 찢어진 청바지가 왜 그렇게 마음에 들었을까? 그 때의 나는 알 것이다. 흑역사라면 흑역사겠지만 어쨌든 그것도 역사.

지금 입는 옷들은 엄마가 별로 좋아하지 않고, 아빠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나만큼 보수적으로 입는 사람도 드물다고 항변을 하지만 받아들여지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매일 다른 옷을, 까탈스럽게도 입는다. 내 옷장이 좋고 내 옷들이 좋다. 나를 닮은 옷들이 좋다. 옷을 재미있게 입는 사람들이 좋다. 옷을 예쁘게 입는 사람들의 인스타그램을 홀린 듯 팔로우하고 크게 관심사도 아닌 유튜브 영상도 썸네일에 옷 몇 벌이 있으면 일단 클릭하고 본다. (당연히 대체로 몇 초 지나지 않아 나오지만.) 어찌됐든 나는 그런 기록들에 여전히 매료되고, 나는 내가 멀끔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곰돌이 푸 츄리닝을 입을 때만큼 마음에 들고.

요새는 옷을 잘 버리지 않는다. 뭐 하나를 사서 오래오래 몇 년이고 입는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나중에는 지금을 쇼핑몰에서 오만 원에 코트를 샀을 때처럼 기억하게 될지. 스물아홉이면 흑역사를 만들기 좋은 시기지. 큰 옷을 입은 채 머리를 기르고 가짜 안경을 쓰던 시절이라고. 그 때도 이런 구실로 옷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어쨌든 즐거우리라고 생각한다.

그치만 그걸 떠나서 역시 옷은 너무 아름다워! 일단 그걸로 충분해. 정말, 여기에 대해서도 천 년은 이야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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