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션”, “밀양”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것들 중 하나가 용서일 겁니다. 어쩌면 종교가 있는 이유가 우리에게 용서를 가르치려고 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종교의 힘을 빌려야만 할 정도로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용서가 어려운 이유는 용서를 하려는 대상과 마주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용서와 화해를 한 세트로 생각합니다. 나를 괴롭히던 상대를 용서해주고, 그 용서로 상대방과 원만한 관계로 발전하기를 희망합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희망일 뿐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종교의 힘을 빌려도 용서는 어렵다는 것을 영화 “밀양”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쿨하게 용서하는 방법
영화 "밀양"의 주인공은 자신의 자식을 납치하고 목숨을 앗아간 범죄자에게 면회를 갑니다. 겨우겨우 종교의 힘을 빌려서 용서를 할 준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녀 앞에 선 범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은 나를 용서했고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다.” 그 순간 주인공은 세상이 무너집니다. 피해자인 내가 용서를 안 했는데 누가 용서할 수 있는가? 내가 믿는 신이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다니!
영화 “미션 (The Mission 1986)”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이 영화를 언급하지 않고서 용서에 대한 영화를 말할 수 없겠죠. 남미 식민지 시대, 원주민들에게 나쁜 짓을 서슴지 않았던 멘도자란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 고행의 길을 선택합니다.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피해자인, 원주민 과라니족을 만나기 위해 끝이 안 보이는 절벽을 오릅니다. 자신이 휘둘렀던 무기들을 산더미처럼 쌓아 자신과 묶어버린 채 말이죠. 그 살인적인 무게는 절벽을 오르는 그에게 죽음과도 같습니다. 그때, 과라니족이 나타나 죽음과 같았던 무기 더미를 그에게서 잘라냅니다. 과라니족은 그를 용서한 것이죠.
과라니족은 왜 그를 용서했을까요? 어떻게 그런 마음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어릴 때는 그 장면에서 멘도자의 진심 어린 참회의 고행이 과라니족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서 생각해보니 용서란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용서란 참회를 해야 하는 나쁜 사람의 노력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용서를 해주는 피해자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멘도자는 죽어 마땅한 인간입니다. 참회의 고행을 한다고 해도 자신의 부모, 자식을 죽인 과라니족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을까요? 멘도자가 무슨 고행을 하던지 상관없이 과라니족은 이미 그를 용서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원주민 과라니족에게 멘도자만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었죠. 그들의 땅을 식민지화했던 서구 열강들 모두 그들에게 나쁜 짓을 했습니다. 영화에서 주인공, 가브리엘 신부가 처음으로 과라니족을 만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과라니족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괴롭힌 서구의 일원인 그를 용서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가브리엘 신부의 오보에 연주가 얼마나 뛰어났든 간에 그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겠죠. 그러나 과라니족은 그깟 오보에 연주를 듣고 원수를 용서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얼마 전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용서와 화해는 다르다. 용서를 한다고 꼭 화해를 할 필요는 없다." 용서는 내 마음대로 하는 거라고 하더군요. 용서의 대상에게 내가 용서했음을 알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화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용서의 필수조건이 아니라는 것이죠. 용서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요? 용서란 용서의 대상을 내 삶에서 그만 놓아주는 것입니다. 나의 일상에 영향을 줄 수 없게 나쁜 기억을 저~ 멀리 보내는 겁니다. 예를 들어보죠. 어떤 나쁜 놈이 나에게 사기를 칩니다. 막대한 피해를 입습니다. 1년 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죠. 그러다 용서에 대해 깨닫습니다. 그 사기꾼을 내 마음속에서 몰아냅니다. 시간이 흘러 운 좋게 그 사기꾼이 잡힙니다. 나는 증언을 하고 소송을 걸어서 사기꾼을 감옥에 보내고 돈도 돌려받습니다. 이 예에서 용서란 사기꾼의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나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방법으로서 용서입니다. 사기꾼과 화해할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나의 행복과 안녕만을 위한 용서인 것이죠.
가장 아름다운 복수는 내가 잘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용서와 화해를 분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영화 "미션"의 과라니족은 용서를 한 것이지 화해를 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원수를 갚는 행위가 개인과 부족 전체를 피폐하게 만든다는 것을 잘 아는 현명한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반면 "밀양"의 주인공은 끝까지 "화해"를 시도합니다. 화해를 하는 아름다운 상상은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용서함으로써 마음의 앙금을 멀리 보내는 것만이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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