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버리 로그: 별이 빛나는 밤에

드디어 출항 소식

2024.02.04 | 조회 1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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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퍼 매뉴얼

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에 대한 이야기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이 글을 쓰는 지금 저는 북위 29도 26분, 서경 115도 35분에서 사방을 밝게 비추는 달과, 그 달빛이 떨어뜨린 빛가루가 반짝이는 까만 바다와, 종종 그 빛가루를 쓸어가며 육지 쪽으로 달리는, 못해도 주기 100미터는 돼 보이는 긴 태평양 스웰, 그리고 핸드폰의 플레이리스트가 들려주는 음악과 함께 항해하고 있습니다. 이게 웬 오밤중 감성 멘트인가 싶으시겠지만, 실제로 지금 자정이 좀 넘은 시간이긴 합니다. 

주의: 사진은 전날 밤
주의: 사진은 전날 밤

아마 이번 항해 통틀어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아닌가 하는데요, 너댓시 방향에서 불어오는 뒷바람에 제노아 하나만 펴고 항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 방향 바람에 메인세일의 기여도가 크지 않기에 내리기도 했지만, '미처 내리지 못한 메인세일'(과 그로 인한 강풍 속 자이빙)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우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군요. 여기까지 내려오는 내내 대부분 뒷바람을 받으며 왔음에도 불구하고, 뒷바람 항해가 얼마나 편한 것인지 이제서야 체감합니다.

밴쿠버에서 멕시코까지 내려오는 동안 이렇게 달빛과 함께 항해한 것도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동안은 달이 없을 때 항해하거나, 그보다 자주, 짙은 안개나 구름에 하늘이 덮인 암흑 속에서 항해하곤 했습니다. 유일하게 보이는 빛이라고는 바닷물에 반사되는 빨간색 초록색 항해등 정도였으니, 정말 깜깜했었네요. 아직은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 않고 있지만, 아무래도 멕시코쯤 내려오니 바다가 더 온화한 것 같기도 합니다. 

 

엔세나다

LA에서 출항할 때, 바다에 나가는 것 자체가 싫은 상태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음 기항지 엔세나다Ensenada에서 이렇게까지 오래 머물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호라이즌스 호는 어디에 있을까요
호라이즌스 호는 어디에 있을까요

태평양 연안으로 항해하는 배가 미국 국경을 지나 처음 만나는 항구이자, 부자나라에서 쉴 새 없이 내려오는 크루즈선 때문에 영혼 없는 관광도시 느낌을 주는 엔세나다. 그중에서도 번화가 바로 앞 노천(?)에 자리 잡은 마리나에 7주나 머물다 보니, 꿈속에서도 시끄러운 멕시코 팝송의 환청이 울리는듯했습니다. 

처음엔 배 수리하느라, 그 뒤엔 악천후를 피하다가, 다이애나&존의 유타 집에 놀러가 겨울을 즐기기도 하느라, 이렇게 오래 머물게 되었네요. 엔세나다에 머무는 동안 우리 호라이즌스호는 거의 리피팅에 가까운 보수와 개선 작업을 거쳤습니다. 완료된 작업 리스트엔 엔진수리, 부란자 교체, 항해등과 전선 교체, 스프레이후드 제작 등 그 숫자를 이루 셀 수가 없습니다.

호라이즌스호 뿐 아니라 그 위에서 먹고 자고 사는 어리버리 세일러 둘도 광대한 보수와 개선 작업을 거쳤습니다. 마리나에서 만난 여러 친구들 덕에요. 그 중, 막심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람이 없을땐

우리가 머문 마리나는 하루 요금이 엔세나다에서 가장 저렴하기 때문에 멕시코에 막 입국한 배들이 입국 수속을 위해 많이 머뭅니다. 그래서 마리나엔 항상 뉴페이스가 있었죠. 하루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금발머리가 배로 다가와 친근하게 말을 걸었습니다. 우리 배의 캐나다 국기를 보고 온 캐나다 사람 막심. 

터그보트 선장이었던 막심은 경매에서 싸게 득템한 철제 세일링 요트를 가지고 내려가는 중이었습니다. 배를 보니 그야말로 집시 스타일의 요트. 여기저기 녹슬다 못해 삭은 듯한 40피트 요트는 100년 전 배에서나 볼 가프gaff 메인세일을 달고 있을 뿐 아니라, 오랜 시간 항해도 하지 않아 그 상태도 물음표. 터그보트 선장의 씨맨쉽이 아니었음 쉽게 도전하기 힘들었을 배입니다. 

막심이 보내 준 영상: 윗부분에도 붐이 있는 가프 메인세일. 줄(!)로 마스트에 매달린 러프에도 주목!
막심이 보내 준 영상: 윗부분에도 붐이 있는 가프 메인세일. 줄(!)로 마스트에 매달린 러프에도 주목!

불확실한 엔진 리스크도 피하고 경비도 절감하기 위해, 막심은 마리나 들고 날 때를 제외하고는 세일만을 쓰며 LA에서 엔세나다까지 내려왔다고 합니다. 바람이 없으면 그냥 둥둥 떠내려가기도 하면서요. 

그 뒤로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LA에서부터 800마일이 넘는 거리의 카보산루카스에 도착할 때까지 단 3L의 디젤을 썼다고 하는군요! 

삭은 철제 배에는 공감할 수 없었지만 느리더라도 엔진을 쓰지 않고 세일 항해만을 한다는 얘기는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제 시간 맞추어 건너야 할 바도 없고, 필요하다면 야간항해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 우리도 한번 시도해 볼까 하는 생각과 함께 출항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우당탕탕 어리버리 출항

선착장에는 마리나 경비와 우리 친구 존, 이렇게 두 명이 계류줄 푸는 걸 도와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에 더해, 웬일인지 조선소 사장 로베르토까지 배웅하러 나왔더군요. 그래서 늘 선주와 단둘이 하던 출항을 도와줄 손이 셋이나 더 있는 상태였습니다. 

계류줄을 풀고 후진을 해 돌았는데, 이제 전진을 해야 할 타이밍에 계속 배가 멈추어 있었습니다. '느린 이안과 접안'의 열렬한 추종자 선주가 rmp을 올리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마리나 안에 바람이 있었습니다. 

콕핏에 가 보니 상황이 그게 아니더군요. 전진 후진 테스트까지 마치고 계류줄을 풀었건만 트랜스미션이 또 먹통. 선주는 급히 트랜스미션 오일을 추가하러 실내로 달려 내려가고, 조타대를 이어받아 레버를 한껏 당겨봤지만 기어가 걸리지 않고 헛도는듯 했습니다. 

그때부터 선착장에서 배웅하던 세 사람과 저는 난리가 났습니다. 주위엔 크고 작은 모터요트 세일요트들이 빼곡히 있는데 호라이즌스 호는 이제 본격적으로 바람에 밀려 가속하기 시작했거든요. 배가 밀려 내려갈 길목에 불쑥 나온 선착장 끝에는 존이 어서 계류줄을 던지라고 하고 있었습니다. 아흐.. 하필 마리나에서 한달 반 동안 계류줄 없이 지냈던 스타보드 쪽에서요. 

평소 라이프라인에 비상용 줄을 몇 개 묶어두는데, 급히 손에 잡은 첫번째 줄은 썩은 줄. 너무 오래되고 삭아 잘 풀리지도 않습니다. 번개같이 콕핏 반대편의 멀쩡해 보이는 줄을 발견하고 뛰어 들어가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야 말았습니다. 배에 걸어놓는 비상용 줄들도 좀 업데이트 해야겠네요...

 

기다려라 거북이만

출항은 소란스러웠지만 이번 목적지 거북이만Baia de Tortugas까지의 300해리 바닷길은 얌전합니다. 목요일부터 시작되는 악천후가 예보되어 있지만 시간을 여유있게 잡고 나왔기 때문에 엔진 덜 쓰는 항해를 시험해 보고 있습니다.

막상 엔진을 끄니 속도가 2노트 정도 나왔지만, 조바심을 누르고 기다리니 배를 4노트, 5노트로 밀어주는 바람도 놓치지 않을 수 있더군요. 

오늘의 아름다운 야간 세일링도 엔진 소음이 없기에 가능했습니다. 앞으로 75해리 정도가 남았습니다. 이 속도라면, 날 밝은 뒤 종일 세일링을 하고도 한 번 더 밤을 맞이해야할 듯 싶지만, 이런 이지 세일링이라면 두 밤도 거뜬할 것 같습니다.

구독자님의 편안한 일요일을 기원하며, 지금 듣고 있는 음악 하나 던지고 인사드리겠습니다. (오래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자니 멀미가 나네요 ㅎㅎ)

느린 음악...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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