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즌드 어리버리

씨즌드 어리버리 10

포트 브랙 주민들

2023.12.17 | 조회 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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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퍼 매뉴얼

일요일 오전 9시에 읽는 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 이야기(격주 발행)

어제, 극도로 피곤했지만, 배에서 얌전히 쉬다 잘 수는 없었습니다. 중심가에서 맥주나 한잔하며 문명사회 복귀를 자축하려는데, 대중교통은 없고, 4차선 도로 옆의 인도를 한 시간이 넘게 걸어야 중심가에 도착하더군요. 마리나에 돌아와서는 저녁 8시에 기절하듯 침대에 쓰러졌는데 아침 8시 반까지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잤습니다.

아침, 배 현창으로 들어오는 화창한 빛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번집니다. 우리는 이제 안전하고 좋은 곳에 있구나- 흔들리지 않는 잠자리와 햇살 한 가닥에 이렇게 마음이 풍족해질 수도 있다니 신기합니다.

문을 열고 콕핏으로 내민 머리에 화사하게 부서지는 아침 햇살 역시 자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운동복을 입고, 이번엔 4차선 대로 대신 해안 절벽을 따라 난 오솔길을 따라 포트 브랙 중심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왼쪽의 절벽 밑으로는 태평양이 펼쳐져 있고, 그 끝에 아득한 수평선이 보였습니다. 초원은 노랗게 마른 풀로 가득 차 있었는데, 오솔길은 그 중간을 좁게 지나며 지평선을 향해 이어져 있었습니다. 내가 마치, 이 웅장한 대자연 한구석에서 꼬물꼬물 기어가는 개미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그마한 인간이 활동하기에 이곳의 자연은 스케일이 너무 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구글 맵에서 미리 찾아 점찍어 둔 커뮤니티 센터Community Center에 도착했습니다. 포트브랙에서 아이스크림 가게를 하다 세계적인 보험회사를 세웠다는 기업가가 설립한, 지역 문화센터 격의 시설입니다. 제대로 된 헬스장과 수영장을 하루 종일 이용하는 데에 주민은 8달러, 방문객도 10달러밖에 하지 않습니다.

"주민인가요 방문객인가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주민이요."

우리 집(배)이 여기 있으니까요.

편안한 티셔츠, 반바지 차림의 배 나온 동네 아저씨들과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수영장에서 수영하고, 샤워하고 나와 젖은 머리로 로비에 앉아 선주를 기다리고 있자니 마치 여기가 우리 동네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오디세우스 커플

이른 저녁을 먹고 노요 강 상류 쪽으로 산책하러 나갔습니다. 아담한 사이즈의 노요 강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울창한 숲속입니다. 마리나에서 바로 연결되는 조용하고 쾌적한 산책로에 만족해하며 배로 돌아가는 길에 다이애나, 존과 마주칩니다. 우리와 같은 선착장에 머무는 사람들입니다.

노요 강 산책로 뷰
노요 강 산책로 뷰

포트 브랙 마리나에 입항했던 어제는 하필, 마리나 오피스가 문 닫는 토요일이었습니다. 배를 묶은 뒤, 마리나 밖으로 나가려고 보니 비밀번호 잠금장치가 있었습니다. 이거 섣불리 나갔다가는 월요일 오전까지 철문 밖에서 노숙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포트 브랙 탐험을 뒤로 미루고 얌전히 마리나 안에 머무는 안전한 선택을 하기엔, 내일도 휴일. 이틀 내내 갇혀 있기는 억울하니 마리나 안에서 사람이 있는 배를 찾아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바로 앞에 세일링 요트 하나가 보이기에 이 배부터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여기 누구 계신가요?"

사방이 투명 커버cockpit enclosure로 싸인 콕핏에 노인 커플이 앉아 있었습니다.

"비밀번호는 4141이야." 부인이 말하자, 남편은

"아니지. 비밀번호는 네 개가 다 1이었잖아."

할아버지는 친절하게도 배에서 나와 우리와 함께 마리나 출입구까지 걸어간 뒤, 비밀번호를 함께 확인해 주었습니다. 비밀번호는 1111이 아니라 4141이었습니다.

아.. 마리나 출입구 비밀번호조차 기억 못하는 노인들이 세일링 요트에..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이 "이 사람들도 혹시 배에 사는...?" 이었습니다. 부인은 다이애나, 할아버지는 존이라고 했습니다. 

어제 출입문 비밀번호 때문에 잠깐 얘기를 나누었을 뿐이지만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이렇게 아는 얼굴을 마주치니 반가운 것은 우리 뿐이 아니었나 봅니다. 다이애나는 맥주 한 잔 하자며 우리를 배 위로 초대합니다. 투명 커버 안 콕핏은 쾌적하고 아늑합니다. 선주는, 자리에 앉는 순간까지도 홈리스 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가, 아이스박스에서 꺼내 주는 좋은 맥주를 보고야 마음을 놓았다고 합니다. 홈리스였다면 가장 싼 맥주를 마셨을 테니까요. 우리처럼요. 

이들은 험한 바다에 여기저기 파손된 배를 수리하고 준비하며 출항할 수 있을 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하와이를 향해 항해하던 중 오토파일럿이 고장나, 별 수 없이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배를 돌려 포트 브랙에 왔다는군요. 우리는 태업과 파업이 잦은 오토파일럿에 대한 불신 때문에 심심찮게 수동조타를 하고 있지만, 보통의 경우, 수동조타는 체력에 무리가 가기에 피하는 일입니다. 이 70대의 커플은 오토파일럿 고장 이후, 단 둘이서 500마일이 넘는 거리를 교대로 수동 조타하거나, 배를 안정적이고 천천히 떠내려가는 상태에 놓은 뒤 쪽잠을 자기도 하며 육지를 향해 항해를 했습니다. 포트 브랙은 바다 한 가운데에서 위성 메세지 기기로 자리 있는 것을 확인하고 예약까지 한 뒤 입항했다는군요. 출입문 비밀번호 헷갈리는 걸 보고 안쓰러웠던 마음이 숨을 구멍을 찾습니다.

배 이름은 오디세이Odyssey. 어리버리 항해기 1편의 부제 'An Odyssey Of Sailing Toward Mexico(멕시코를 향한 항해 고생담)'에도 쓰인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표류에서 유래된 말로, 고생스럽고 긴 모험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고생스런 경험이 배 이름 때문은 아니었길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이 고된 항해가 멕시코에서 마무리되길 바라는 입장에서, 우리 배 호라이즌스(복수형으로 수평선)도 그리 좋은 이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들은 유타 주 솔트레이크에서 왕성한 레가타 활동을 하고 매년 좋은 성적을 얻는 세일링 실력파일 뿐 아니라, 배의 운용에 대해서도 박식했습니다. 특히 은퇴 전 엔지니어였다는 존은, 오디세이 호의 시스템과 항해 장비를 꿰고 있는듯했습니다. 

오프쇼어로 나가는 요트들이 중요한 장비 백업을 준비해 놓는 것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이 배에는 모든 중요 장비가 세 개씩 있습니다. 특히 VHF는 서로 다른 위치에 안테나를 두 개 설치하여 각각 독립적인 설치형 VHF 두 개가 작동하되, 그 중 하나는 실내로 내려갈 필요 없이 콕핏에서 바로 쓸 수 있게 연결해 놓은 것이 인상깊었습니다. 성능 좋은 휴대용 VHF까지 총 세 개. 불의의 사고로 안테나가 하나 손상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는 구조입니다. 통신 거리가 짧은 휴대용 VHF만 가지고 출항했던 어리버리들이 누굴 걱정하나요. 노인 둘이서 먼바다에 나가 다양한 위험 상황에 노출되는 것이 무모하지 않은가 생각했던 마음 역시 숨을 구멍을 찾습니다. 

"우리 둘 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위험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어. 하지만 안전한 집에서 소일하느니, 바다에 나가야 비로소 내가 살아있는 느낌이 들어. 그리고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더라도, 이미 난 내 삶을 충분히 잘 살았고, 만족스러워. 설마 바다에서 죽는다고 해도 아쉬울 게 없을 거야."

다이애나의 말에 잠시 말을 잃었습니다.

포트 브랙 중심가에서 돌아다니다 맥주집 재즈 공연 벽보를 발견하고는 다이애나와 존을 초대했습니다. 음식도 별로였고, 음악은 재난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함께 라이브 공연을 즐긴다는 자체가 참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이후 우리는 매일 같이 서로의 배에 방문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수많은 수다의 주제 중 하나가 얼마 전 출간했지만, 실물을 본 적이 없는 내 책이었습니다. 비행기 타고 미국에 도착한 직후 출간 사실을 확인했지만, 아직 내 책을 직접 만져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쉼 없이 남쪽으로 항해하는 바람에, 책이 배송되기 전에 이미 그 마리나를 떠나게 되는 탓이었죠. 이 얘기를 들은 다이애나가 책 이름을 메모하더니, 정말로 주문했습니다. 언제 떠날지 알 수 없는 우리 배와 달리 이들은 앞으로 한동안 포트 브랙 마리나에 머물 예정이었습니다. 

배송된 종이책을 만져보며 신기해하는 나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던 다이애나,

"일단 책을 다 읽고 나서 저자 사인과 코멘트를 부탁할게." 

그리고 그날밤부터 존과 함께 침대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외나무다리의 장피에

마리나와 포트 브랙 중심가 사이에는 4차선 도로 다리가 있는데, 인도가 좁고 차들이 빠른 속도로 달리는 데에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그대로 노출되어 걷기에 유쾌하지는 않은 구간입니다.

외나무 다리에서 뷰
외나무 다리에서 뷰

이날도 커뮤니티 센터에서 운동하고 마리나로 걸어 돌아오는데, 다리 한가운데에서 누군가 우리를 불러세웠습니다.

"너희들, 세일링 요트 타고 온 사람들 맞지?"

꺽다리처럼 마르고 키가 큰 남자의 한 손엔 수퍼마켓에서 파는 스시 플라스틱 통이 들려 있었고, 마지막 스시 한 점의 잔해를 마저 씹느라 입은 아직도 우물거리고 있었습니다. 이 차 많고 시끄러운 다리 위를 걸으며 스시를 먹었나 봅니다. 그러나 미국인이라고 치부하기엔 발음이 뭔가 이국적입니다.

"사실 너희 배를 뉴포트에서도 봤었어."

아.. 뉴포트에서 인사를 못하고 떠났다며 아쉬워 했던 그 세일링 요트 스키퍼를 여기서 만나는군요! 이 요트는 우리와 비슷한 루트로 내려왔는데, 쿠스 베이에서도 우리 배를 봤다고 합니다. 두 번 다 인사할 기회가 없었다가 세 번째로 우리를, 이번엔 외나무 다리(만큼 좁은 인도)에서 마주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필 이 시끄럽고 바람 부는 다리 위에서 수다 보따리가 풀렸습니다.

알고 보니 요트를 배달 중인 전문 스키퍼. 여기까지의 고생담에 멘도시노가 빠질 수 없었는데요, 경험 많은 스키퍼라면 같은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일기예보 앱에서 보는 계산 모델들은 그게 GFS가 됐든 ECMWF가 됐든(각기 다른 방식의 계산으로 일기를 예측하는 모델) 이런 연안 항해에서는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대양항해처럼 넓은 지역에 걸친 전반적인 예보를 알려줄 뿐이라, 이렇게 국지적 예보가 필요한 지역에서는 참고할 자료가 따로 있다고 말하며 엉거주춤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서 꺼냅니다.

NOAA(미국 해양대기청)의 그래픽 예보에는 케이프 멘도시노 아래쪽으로 무서운 색깔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역시, 이것은 내가 보는 일기예보 앱에서는 본 적이 없는 모양입니다. 이 색깔을 피해 가기 위해 케이프 멘도시노에서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오프쇼어로 지나왔다고 합니다. 그 무서운 색깔 한 가운데를 우리는 멋도 모르고 신나게 지나갔다고 생각하니 항해 정보, 특히 일기예보가 세일러들의 안녕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다시한번 절감하게 됩니다. 

이 루트로 세 번째 요트 배달인데, 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오프쇼어로 나가 한 번에 장거리를 쏘는 방식으로 항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피항이 필요할 경우 육지에 돌아오는 데에만 24시간 이상 걸리는 데에 불안함을 느껴, 이번엔 항구마다 들르는 방식을 시도해 보는 중이라고 합니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도 물어봅니다.

"근데 너 미국사람 아니지?"

"어.. 미국에 오래 살긴 했지만.. 난 벨기에 사람이야."

오랜 시간 서서 목청껏 수다를 떨었더니 목이 칼칼하고 좀 춥습니다. 무려 세 곳의 마리나에서 동선이 겹쳤으면서도 하필 차들이 쌩쌩 달리는 다리 한 가운데에서 만나게 된 이 친구 이름은 장피에라고 합니다.

 

레이더에 탐지된 또 다른 어리버리 요트

포트브랙은 안개 없는 날이 많고, 날씨도 확실히 북쪽보다 덜 춥습니다. 아침마다 화창한 햇살에 나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원하면 얼마든 늦잠도 맘껏 잘 수 있는 평화로운 날들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강풍은 언제쯤 얌전해질지 기약이 없고, 포트 브랙 마리나에 저렴한 2주 계류 요금이 있다는 사실은 참 다행입니다. 출항 때부터 이렇게 날씨에 발이 묶여 장기 계류할 일을 막연히 상상했었는데 그게 미뤄지고 미뤄지다가 결국 포트 브랙이 당첨되었군요.

해안 절벽 벤치에서 품속에 숨겨 간 샴페인을 종이컵에 몰래 따라 마시며 도둑 음주를 하기도 하고(공공장소 음주 금지), 반은 졸면서 외국어로 보기에 난해한 영화 오펜하이머(왜 하필..)도 봤습니다. 이틀에 한 번씩은 커뮤니티 센터에서 운동하고, 배낭 가득 밀폐용기를 메고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야생 블랙베리를 따, 다이애나&존의 배에서 아이스크림과 함께 먹으며 수다를 떠는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언제 출항할 수 있을까 조바심이 일기는 하지만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포트 브랙 마리나에 오래 지내다 보니 지역 축제에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노는 이벤트 정보가 빠른 우리는 다이애나와 존에게 가서 함께 가자는 약속을 받아 놓았고, 쓰레기 봉지를 들고 화장실 앞을 지나다 우리에게 딱 걸린 장피에에게는 열심히 축제 홍보를 하며 참여를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포트 브랙 마리나가 아기자기하거나 사람이 북적북적 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긴 합니다. 하지만 공터에 부스들이 하나둘 자리잡고 라이브 가수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나름 뭔가 축제 분위기가 나는 것도 같습니다. 건너편에서 마주 걸어오던 다이애나와 존이 반갑게 인사합니다. 우리를 발견하는 순간 반가움에 빛나는 다이애나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연고도 없고 먼 이곳에서 반가운 얼굴을 마주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자 행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 고장으로 포트브랙에 비상 입항을 하게 된 유타 주의 70대 미국인과, 한 달을 예상했던 항해에 발 묶여 계속하지 않았다면 여기 올 일이 전혀 없었을, 아들 딸 뻘의 한국인. 사람의 인연이란 얼마나 기막힌 것인지, 국적과 나이를 떠나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울리는 마음의 공명은 참 큰 것 같습니다. 

축제의 가장 큰 볼거리는 계류한 어선마다 파는 각종 해산물. 우리는 보름달빵만한 초대형 성게 몇 마리와 생선을 좀 사서 다이애나와 존을 배에 초대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장피에는 딱히 축제 스타일이 아니었는지 눈에 띄지 않았지만, 또 다른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 조용한 마리나에서 이목을 끈 배가 한 대 있었습니다. 선착장에 배를 대려다 몇 차례 다시 대는듯 하더니 다음날 보니 다른 자리에 계류하고 있었습니다. 마리나 세탁실엔 건조기가 항상 있게 마련인데 배에 가득 널어놓은 빨래도 뭔가 어설프고, 배에서 내리는 여자의 밀짚모자와 청반바지도 뭔가 초보 관광객 같은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그래서

“왠지 저 쪽도 우리랑 비슷한 과인것 같다” 라며 친근함을 느꼈었죠.

축제용 벤치 중 하나에서 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너희들을 이미 본 것 같은데” 라고 말하며 합석을 했습니다.

알고보니 남자는 캐나다에 사는 이탈리아인, 여자는 한국인, 그것도 무려 남해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처럼 멕시코를 향해 남하하고 있는 조반니&희진. 북 캘리포니아의 작은 어촌 마을 포트 브랙이 이렇게 핫한 메트로폴리탄이었을 줄은 예상 못했습니다.

이들은 캐나다에서 만나 약혼한 커플로, 멕시코에서 가장 멋진 바닷가를 골라 결혼식을 올릴 거라고 합니다. 배에서 살며 하는 장거리 항해는 은퇴 후 시작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때는 이미 늙어 시간이 촉박할 것 같다며 젊은 나이에 바다로 나왔다고 하는군요. 이미 1년간 밴쿠버 근처를 세일링하며 준비를 한 뒤, 배에서 원격근무를 하며 항해 중이라고 합니다.

뭔가 어리버리한 분위기가 우리와 비슷하다며 느꼈던 친근감은 근거가 없었음이 곧 밝혀집니다. 이들은 대부분의 구간을 오프쇼어로 나가 입항을 거의 하지 않는 스타일의 항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멕시코까지 가며 실력을 쌓은 뒤에는, 대서양을 횡단해 유럽으로 갈 계획이라고 합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밤을 만나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멀미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포트 브랙 역시 멀리서 지나치려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용감하게 먼바다로 나가 며칠간 이어지는 항해를 아직 세일링 경력이 많지 않은 단 둘이 하는 걸 보면, 이런 용기는 그냥 타고나야 하는 건가 생각이 듭니다. 

 

반갑지 않은 마리나 친구들

마리나에서는 반갑지 않은 친구들과도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어느날 밤 새벽, 어딘가에서 돼지 멱 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최소 세 군데 이상의 로케이션에서 꾸웨엑꾸웨에에엑 소리가 스테레오로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배 바로 옆에서도 꽤애액- 하는 소리가 나 화들짝 놀라 콕핏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어둠 속 거대한 갈색 모피 덩어리가 바로 옆 선석에 드러누워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바다사자들이 선착장에 올라왔나 봅니다!

바다 사자는 가까이 다가가기에 좀 무서울 정도로 덩치가 큽니다. 북미 서부의 마리나 안에서 흰 색에 점박이 물범을 보는 일은 꽤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물범은 상대적으로 사이즈도 작고 귀여운 이미지가 있죠. 게다가 이렇게 괴상한 소리를 지르지도 않습니다. 

고요한 밤, 마리나에는 바다사자들의 못난 소리 합창이 울려 퍼졌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지, 싸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단체로 교미를 하나 싶기도 한 흥분한 괴성은 몇 시간 동안 울려퍼졌습니다. 잠을 설친 것은 물론이고, 나중에는 그 목청 좋은 못난 소리를 듣는 것이 너무 힘들어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까지 동원이 되었죠. 생긴 것도 못생겼지만 그 소리는 정말 참을 수가 없더군요.

그날 밤 이후, 이 바다사자 무리는 마리나를 떠나지 않고 머물렀습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원래 마리나에 들어와 사는 바다사자들이 꽤 있다더군요. 오밤중에 소리를 지르는 일은 그 이후로는 거의 없었지만, 그 큰 덩치로 선착장에 올라와 길을 막는 일은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우리 선착장에도 종종 올라오는 한 마리가 있긴 했지만, 건너편 선착장은 이들이 특히나 좋아하는 핫 플레이스였습니다. 그 끝에는 안타깝게도 장피에의 배가 홀로 계류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구부정하게 양 손에 쓰레기 봉지를 들고 선착장으로 나오다 흠칫- 하는 장피에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앞에는 마치 삥뜯는 불량 청소년 무리처럼 바다사자 몇 마리가 드러누워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어쩔줄 몰라하던 장피에는 결국 배로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 날, 마리나가 울리게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는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마리나 오피스의 안나가 장피에를 위해 길을 뚫어주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바다사자 때문에 그때까지 배 안에서 감금 생활을 했다고 하는군요.

“안나처럼 너도 쫒아내면 되는 거 아니었어?”

“아냐, 누가 그러는데 바다사자는 개랑 비슷해서 자기한테 못되게 군 사람 얼굴을 기억하고 해꼬지 할 수도 있대. 안나는 여기 바다사자들이 무서워하는 존재라고 하더라구.”

옆 선착장 뷰
옆 선착장 뷰

날씨 때문에 장기간 발이 묶인다면 최소한 그 안에서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곳이었음 좋겠다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우린 포트 브랙 마리나 안의 주민들과 더할 나위 없이 즐겁고도 안정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출항을 할수 있을 만한 날씨가 드디어 일기예보에 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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