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에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을 기억하시나요? VR 기기를 쓰고 가상현실 '오아시스'에 접속해 전 세계 사람들과 경주를 하고 전투를 벌이는 모습은, 당시 이스포츠와 게임 산업에 몸담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습니다. 사실 VR이나 AR 기기를 활용해 게임 안으로 직접 뛰어드는 형태의 이스포츠 개념은 산업 내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지속해서 제시되어 온, 일종의 '오래된 미래'와도 같았습니다.

오늘은 과거 메타버스의 거품을 걷어내고, 현실적인 이스포츠의 미래이자 최근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한 IOC와 EWC의 타협점이 될 수 있는 '기술 매개형 스포츠'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화려했던 메타버스, 그리고 남겨진 현실의 한계
물론 영화 개봉 전후로 VR/AR 기기를 통한 스포츠 기술의 발전은 꾸준히 이어져 왔습니다. AR 기술을 접목해 에네르기파를 쏘듯 피구 경기를 펼치는 ‘하도(HADO)’, 실내 자전거와 가상 세계를 연결해 IOC의 사랑을 듬뿍 받은 ‘즈위프트(ZWIFT)’, 그리고 여러 VR 기반의 슈팅 게임(PUBG VR 등)들이 시장에 등장하며 가능성을 보여주었죠.
하지만 2021년 무렵 전 세계를 강타한 ‘메타버스(Metaverse)’ 광풍은 오히려 이 흐름에 독이 되기도 했습니다. 너도나도 메타버스 이스포츠를 표방하고 나섰지만, 냉정하게 돌아보면 너무 현실성 없고 효용성 없는 미래를 그리는 경우가 다수였습니다. 무거운 헤드셋, 어지럼증(멀미) 문제, 직관성이 떨어지는 관전 시스템 등 물리적인 한계는 명확한데, 당장 내일이라도 오아시스가 열릴 것처럼 부풀려진 투자용 청사진들이 난무했습니다. 거품이 꺼진 지금, 대중은 피로감을 느꼈고 완전한 가상현실 이스포츠의 대중화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대안으로 떠오르는 '기술 매개형 스포츠'
그렇다면 완전한 가상현실로 넘어가기 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간 기착지는 어디일까요? 저는 현실의 물리적 제약과 디지털의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결합된 ‘기술 매개형 스포츠’의 발달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드론 레이싱(Drone Racing)과 로봇 복싱입니다. FPV(1인칭 시점) 고글을 쓰고 시속 100km가 넘는 드론을 조종해 장애물을 통과하는 드론 레이싱은 이미 ESPN 등에서 중계될 만큼 스포츠로서의 기틀을 갖췄습니다. 로봇 복싱 역시 영화 <리얼 스틸>의 미니어처 버전처럼, 조종자의 움직임이나 컨트롤러 조작을 매개로 현실의 로봇이 타격을 주고받는 형태입니다. 최근에는 중국에서 이러한 대회를 진행한 바가 있죠.

이러한 기술 매개형 스포츠는 메타버스처럼 아예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을 억지로 믿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실 세계의 물리 법칙(중력, 속도, 파손 등)이 그대로 적용되면서도, 선수의 조작 능력과 엔지니어링 기술, 그리고 디지털 인터페이스가 승패를 가르는 핵심 매개체가 됩니다.
IOC와 EWC의 평행선, 그 접점을 찾아서
이러한 기술 매개형 스포츠의 부상은 최근 글로벌 이스포츠 생태계의 가장 큰 화두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될지도 모릅니다.
예전 뉴스레터에서 한 번 다루었듯, IOC(국제올림픽위원회)와 사우디의 EWC가 결국 전략적 결별을 택한 근본적인 이유는 ‘이스포츠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였습니다. 사우디는 대중이 열광하는 디지털 문화 자체(<LoL>, <CS2> 등)에 집중한 반면, IOC는 땀을 흘리고 신체를 움직이는 '신체적 탁월성'이 결여된 것을 끝내 온전한 스포츠로 인정하기 어려워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술 매개형 스포츠가 양측의 훌륭한 타협점이 될 수 있다고 추측해 봅니다. 드론 레이싱이나 HADO 같은 종목은 조종을 위한 극도의 반사신경, 땀을 흘리는 신체 활동, 공간 지각 능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IOC가 요구하는 '신체적 활동'과 '비폭력성(디지털 살상이 아닌 기체 경주 등)'의 명분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동시에 기기를 다루고 디지털 인터페이스에 열광하는 EWC와 MZ세대 게이머들의 '디지털 친화적'인 취향과 상업성도 관통합니다.
결국 이스포츠는 완전한 현실과 완전한 가상 사이에서 진자 운동을 하며 자신만의 영역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모니터 앞의 마우스 컨트롤에서 시작된 이스포츠가, 기술을 매개로 현실의 공간으로 다시 튀어나오고 있습니다.
스포츠적인 관점에서도 나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과거 축구 경기에서 '오심도 경기의 일부' 라며 이야기 했던 부분들은 Video Assistant Referees, 일명 VAR이 도입이 되면서 많은 부분 개선되었습니다. 해당 기술은 처음 도입이 되었을 당시, 많은 반발 또한 있었지만 이제는 그 가치를 인정 받아 당당히 축구 경기의 일부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스포츠들이 IOC의 잣대와 자본이 이끄는 대중성 사이에서 어떤 교량 역할을 해낼지, 앞으로의 행보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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