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도착까지 1시간, 배터리는 1퍼센트

지하철에서 핸드폰이 꺼졌다

2023.10.09 | 조회 1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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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는 영국 런던에서 시작되어

런던에서 시작된 편지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꽤나 오랜만입니다.

한달만인가요? 네. 뭐.. 이제는 그냥 제멋대로 하게 되네요. 어디까지 막나갈 수 있을지 이쯤되니 저도 궁금합니다.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도 이제는 겸연쩍어 수업 중 교실에 들어가는 지각생처럼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리고 조금 뻔뻔하게) 스윽 편지 띄웁니다.

 

어제 흥미로운 경험을 하나 했어요.

친구 결혼식이 있어서 오전부터 바쁜 하루였는데요, 결혼식장이 집과는 거리가 꽤 있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한다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며 핸드폰을 확인했더니 아뿔싸 배터리 충전을 깜빡했더군요. 출발부터 이미 저전력 모드로 돌입한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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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최대한 배터리를 아껴두면 집에 돌아올 때 까지는 버틸 수 있겠다 싶었어요. 지하철역까지 음악도, 영상도 없이 걸어가며 귀와 손의 허전함을 느꼈지만 나름대로 그런 낯선 느낌이 싫지 않았습니다. 바깥 소리와 풍경을 보면서 걸으니 오히려 좋기도 했어요.

하지만 결혼식장의 정확한 위치와, 지하철이 오는 시간 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핸드폰을 사용해야했고, 빠르게 필요한 정보만 얻은 뒤 도로 가방에 핸드폰을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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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지하철을 기다리는 시간부터 찾아왔어요.

밖에서는 걷기라도 하지, 가만히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니까 미치겠더라고요. 평소에는 태블릿과 책 등등을 가방에 잔뜩 넣어 다니지만 어제는 가방도 작아 수중에는 핸드폰과 지갑, 핸드크림과 립밤이 전부였습니다. 스크린 도어에 있는 시도 읽고, 기다리는 사람들 구경도 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그와중에도 어찌나 핸드폰이 들여다보고 싶던지.

지하철을 탄 뒤 상황은 더 안좋아졌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전부 핸드폰을 보고있고, 눈 앞의 풍경은 바뀌지 않았어요. 결국 딱히 볼 이유도 없는 핸드폰을 습관적으로 꺼내 습관적으로 쇼츠 몇 개와 사진 몇 장을 봤습니다.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건 처음이라 축의금 봉투에 이름 적는 법, 한자로 ‘축 결혼’ 쓰는 법 등등도 찾아보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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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장에 도착했을 때 배터리 잔량은 이미 10%남짓이었어요. 사진도 몇 장 찍고, 단체 사진을 찍을 땐 휴대폰 플래시도 켜야해서 배터리가 훅훅 닳았어요. 이때부터 이미 집에 돌아갈 때 까지 버틸 수 없음을 직감했습니다. 돌아가는 길이 어찌나 까마득하게 느껴지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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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

지도앱에 찍어보니, 도착역까지 남은 시간은 52분, 남은 배터리는 1퍼센트였습니다. 일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듯 에라모르겠다하고 유튜브 영상을 틀었습니다. 죽기 직전 고급 레스토랑에서 코스요리로 최후의 만찬을 즐기듯이요..

심사숙고할 여유도 없어 손가락 가장 가까운 곳에서 흥미로워보이는 영상을 틀었습니다. 그리고 핸드폰은 채 3분짜리 영상을 끝내지 못하고 꺼졌습니다. (무슨 영상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걸 보면 무엇을 보는지보다 본다는 행위가 중요했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안전 방송, 광고, 지하철 이용 안내 등등 주변에 있는 읽을 거리, 볼거리를 닥치는대로 찾아보았어요. 심지어 가방에 있는 핸드크림 성분표도 꺼내서 읽었고요. 지하철 역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걸음이 빨라지기도 했습니다.

 

문득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어요. 단순히 무료함을 느끼는 것을 넘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지하철에서 멍하니 무료함과 고요한 전투를 벌이면서 머릿속엔 흰 종이랑 펜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어이없게도(?) 글이 쓰고싶어졌습니다. 어떻게보면 타이밍 좋게 핸드폰꺼져준 것 같아요. 덕분에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까요.

아무튼 이 기회에 스크린 타임과 글쓰기의 관계에 대한 엉터리 공식을 한번 실험해볼까 합니다. 게으른 내 탓만 하기는 질렸거든요.

 

구독자님도 핸드폰이 꺼지면 무료하고, 불안함을 느끼시는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핸드폰이 꺼졌을 때 뭔가를 새롭게 보게되거나 알게된 경험이 있으신지도요.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감기걸린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데 구독자님은 건강 잘 챙기고 계시길 바라요. 그럼 오늘도 행운을 빌며.

 

수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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