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장]
이탈리아는 예전에 결혼하고 아이들 출산 전에 여행한 적이 있었다. 피렌체, 피사, 로마, 밀란 등 도시 관광을 하면서 살이 따가울 정도로 더운 날씨와 항상 땀으로 눅눅해진 티셔츠. 젤라또는 먹기도 전에 다 녹았고, 더위를 먹어서 물만 마시고, 밥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많아도 너무 많은 사람들과 호텔이 맞는지 의문이 드는 숙소까지. 개인적으로 이탈리아는 최악의 여행지였고, 다시는 이탈리아에 오지 않겠노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웬걸?!
지난 2주동안 이탈리아 작은 도시에 위치한 리조트에서 휴가를 보내고 왔다.
뜨거운 햇살과 살랑살랑 부는 바람.
적절한 파도소리와 진짜 오랜만에 듣는 갈매기 우는 소리.
파라솔 그늘 밑에서 마시는 시원한 레몬맥주.
방학숙제 마냥 예쁜 조개 한가득 줍고, 경쟁하듯 만든 모래성.
파도에 두둥실, 수영장에서 즐긴 줌바.
정말 또 가고 싶다. 이제 휴가는 무조건 휴가로만 즐기기로 했다.
내년에 또 오고 싶어 졌다. 무엇이 최악의 여행지라 여겼던 이탈리아를 인생 최고의 휴가지로 만들었을까?
모든 휴가때마다 노트북과 키보드, 마우스는 항상 챙겼었다. 읽고 싶은 책이 아닌 읽어야 하는 책도 챙기고, 컨설팅이고 미팅이고 회의일정도 그대로 유지했었다. 독서모임도 무조건 그대로 진행했었다. 휴가라도 할껀 해야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해야 성공한다고 믿었다.
그러니 빡빡하게 계획한 휴가 일정을 마치고 난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업무가 시작되었다. 이러니 평소와 장소만 바뀐셈이고, 회사일만 안한다 뿐이지 잠도 평소와 같이 네다섯시간만 잤었다. 그러니 휴가 후유증 따위는 없었다. 물론 휴가의 순기능도 없었다.
24시간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를 했더니 2주동안 매일매일 2만보 이상 걸었다고 나왔다. 하루에 1000칼로리 이상 썼다고 스마트워치는 알려주었다. 오죽하면 그렇게 먹었음에도 1.5kg가 빠져서 왔다.
이번에는 여사장의 간절한 호소(?!) 덕분에 과감하게 노트북을 비롯하여 일에 관련된 모든 것을 집에 두고 갔다. 컨설팅도 미팅도 전부 쉬는 것으로 했고, 여사장에게 위임을 했다. 정말 어색했지만 그렇게 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내가 간 리조트는 워낙 시골이라 그 넓은 리조트 단지 모든 곳에 와이파이가 있는 것이 아니였다. 와이파이를 위해서는 일정 구역으로 가야했고, 데이터를 사용해도 유튜브 영상은 고사하고 카톡정도 겨우겨우 할 수 있는 정도였다.
상황이 이러하니 자의반 타의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하루종일 물놀이하고 놀았다. 어찌나 놀았는지 따로 누워서 태닝 한적도 없었음에도 노릇노릇 잘익은 삼겹살마냥 정말 맛깔스럽게 몸이 탔다. 이렇게 태우려고 매번 노력 했었는데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기에 더욱 신기하면서도 만족스럽다.
바다에 가서 정말 바다에 온전히 집중한 적이 있었나?
물속이 투명한 바다가 아니라 약간 우리나라 서해와 유사한 바다 같아서 아이들과 놀기 좋았다. 파도를 친구삼아 놀기도 하고, 근처 아이들과 공놀이도 하고,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아이가 된 것 처럼 놀았다.
이번 여행은 그동안 단 한번도 느낀 적이 없었던, 휴가 마지막날 휴가가 끝나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휴가가 모든 나의 휴식을 통틀어서 진짜 휴가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실 휴가 때 감정을 생각하면서 글을 쓰려고 하니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뭔가 멋스럽게 설명하고 싶은데 처음 겪는 느낌이라 설명이 어렵다.
진짜 휴가를 통해 얻은 긍정 에너지를 일에 쏟고 싶다.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여사장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고 싶다.
[여사장]
까맣게 잘 태운 남사장의 구리빛 피부를 보니, 건강하고 즐거운 인생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그냥 저런 색 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헬무트 전 서독 총리가 동독과의 통일을 준비하던 그 긴박하고 복잡한 과정 속에서도 몇 주간의 휴가를 떠났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독일통일 한국통일" 이라는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역시나 독일인 답다. 한국인 이었으면 안 쉬고 더 빨리 더 많은 일을 했을텐데. 그리고 통일이 애들 장난이야. 어떻게 통일을 준비하는 협상 과정에 휴가를 갈 수가 있지? 국가를 대표하는 총리라는 사람이! 라는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실소가 터졌다.
'독일은 바로 이게 문제야. 지나친 개인주의. 복지라는 이름의 사치스러움. 시간을 낭비하는 나태한 습관들. 독일이니까 이렇게 휴가니 병가니 다 챙기는 거야. 저게 복지 선진국의 폐해인게야. 역시 뭔가 업무적인 효율성에서는 우리 대한민국이 최고지. '
30대 초반까지도 나는 그렇게 믿었었다.
에잇, 이 느려터진 독일 행정. 업무보다 휴가에 더 몰두하는 듯한 나태한 독일인들. 일은 뒷전이고 늘 놀 생각만 하는 이런 인간들이 만연한 나라가 어째서 잘 사는 걸까?
피겨 스케이트 김연아. 바둑의 이세돌. E 스포츠 페이커. 개인이 플레이 하는 규모의 승부를 내는 종목에서는 한국인들이 엄청난 성적을 낸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들이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근거 없는 성실함이 실제 지속가능이라는 키워드를 두고 평가해 보니, 그닥 좋은 성적을 자랑하지 않는다.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조율하고 협의하여 지속가능한 기초를 다지는, 예를 들자면, 정치와 같은 분야에 있어서 대한민국은 어떤가? 또 투자자와 경영인, 팀원들의 단결이 요구되는 스타트업과 같은 신사업 분야는 어떤가. 한번 반짝하는 대세는 있지만 지속가능한 꾸준한 후속 투자를 통한 지원과 비전 및 소신을 지켜나가는 개성있는 경영인을 대한민국에서 찾아보기는 사실 굉장히 어렵다는 느낌이 있다.
절대로 쉬지 않고 늘 무언가를 하는 성실한 우리 한국인이 세계 최고라며. 그렇게 뭐가 뭔지도 모르고 세계 자살률 1위 국가의 패러다임을 그대로 답습한 채, 스스로에게 학대에 가까운 노동을 강요하고 있는 내 모습을 돌아보기 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돌아보고 나니 그제서야 무너지지 않는 강대국 독일의 진정한 국가의 기초가 보인다. 바로 휴식이다.
천천히, 느려도, 휴식하면서, 다만, 오랫동안 꾸준함으로 지속하는 것.
그 지속가능성의 바탕이 바로 휴식 이었다.
그렇다면, 휴식하는 동안 진행되지 못한 업무는 전체 사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까?
아니다. 충분한 휴식과 즐거운 휴가로 기분이 좋고 즐거운 기운을 내뿜는 사람에게 당연히 기분 좋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게 되어있다. 휴식과 휴가는 더 좋은 사업 성과를 이끌어낸다. 나는 이것을 의식적인 배움을 통해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남사장이 휴가 뒤에 가져올 엄청난 성과들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휴가를 통해 즐거운 기운을 끌고 온 남사장 덕분일까?
투자 유치 실패로 막막하던 우리의 키즈까페 사업에 미친 천운天運이 끌려 들어왔다.
이 행운에 대한 에피소드는 다음 시간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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