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장's 에세이]
한국전쟁 중 1.4후퇴 때 남한으로 홀로 이주하신 할아버지. 자신의 모든 가족을 북에 두고 왔다는 죄책감과, 어떻게든 다시 그들을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낯선 땅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다. 남한으로 피난 하던 중 할머니를 만나서 서로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이슬을 피해가면서 그렇게 살아 남으셨다. 갈대 밖에 없어서 노변 이라고 이름지어진 동네에 갈대를 뽑고, 땅을 고르고, 여러 시도를 하던 중 포도 농사를 지으셨다. 당시의 기후 환경에 가장 잘 맞는 작물이었고, 특유의 성실함과 사업수완으로 제일 품질 좋은 포도를 내놓는 농가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외지 사람들이 골짜기 외딴집까지 포도 농사 비법을 알기위해 찾아 왔다. 그렇게 낯선 사람들에게 밭 이곳 저곳을 다 보여주면서 전지를 어떻게 하는지, 언제 수확 하는지, 포도알을 크고 굵게 열리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지, 분가루라고 하는 포도알 위에 뽀얀 가루는 어떻게 관리하는지 등등 모든 것을 다 공개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리고 비법을 알려고 찾아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반응이었다.
"이게 다예요?"
그저 기본에 충실 하는 것. 남들보다 한 번 더 밭에 가서 잡초를 제거하고 순 이라고 하는 불 필요한 싹을 제때 제때 제거 해서 포도알에 영양분이 잘 가도록 돕는 것. 좋은 비료를 쓰는 것. 욕심을 내서 너무 일찍 수확하지 않는 것. 잘 익은 맛있는 포도를 제공하는 것. 최상품 등급을 유지하기 위해 낮은 등급의 수확물은 손님 상품으로는 내지 않는 것.
그리고 어린 시절 나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아니 이렇게 별 비법도 없는데 이렇게 좋은 포도가 열릴리가 없지. 비법이 있는데 안 가르쳐 주는거야. 라면서 의심의 눈빛을 보내던 사람들에게 아빠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사실 저희도 처음부터 열매가 이렇게 실하게 열리지는 않았어요. 이게 포도 나무도 어린 나무에서 청년, 장년으로 성장하는데 지금이 저희 나무가 제일 좋은 수확물을 내는 청 장년기 나무 시기인거 같아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열매가 맺히지 않던 어린 시절부터 꾸준하게 관리하고 좋은 비료를 주었던 것. 그게 이제 와서 보니 다 좋은 밑거름 이었던거 같습니다. 결국 저희 포도 나무들이 그저 가장 좋은 전성기를 만난것 뿐. 저희가 별 다르게 하는 비법같은건 없습니다.
말은 겸손하게 했지만, 사실 아빠도 포도 나무를 죄다 뽑아서 갈아 엎어 버리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개같이 일해도 열매 하나가 제대로 안 열리면 얼마나 답답하고 실망스러웠을까?
그렇게 열매가 열리지 않는 나무들을 두고서도 포기하지 않고, 비료도 주고 밭도 갈아보고, 전지를 다르게 했다가, 약을 더 많이 쳐 보기도 하고.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나무도 농부도 함께 성장했던 것이다. 외부 사람들에게는 그저 최상품 포도를 납부하고 제일 좋은 가격을 받아가는, 어떤 비책을 쓰는 여우같은 농가로 낙인이 찍혀 일종의 시셈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렇게 좋은 포도알을 만들어 내기까지 원칙을 지키며 포기하지 않았던 시간들. 그리고 때로는 실망하고 화를 내던 시간들이 모두 최상품 포도알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가 정말 고집스럽게 지켰던 원칙과 소신.
절대로 킬로수를 늘리기 위해 제대로 영글지도 않는 설 익은 포도를 섞어 넣지 않는 것. 최상품 포도를 수확하기 위해 과감하게 잔 열매알들 이나 잔 가지를 처 내는 것. 최상품 포도 박스에 한 두개 정도는 하급 포도를 섞어 넣어서 무게를 채우자고 하던 동네 사람들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무조건 제일 좋은 상품으로만 납품하던 소신.
이런것들이 결국에는 사람들이 찾게 되는 상품. 바로 옆 농가보다 좋은 가격을 받는 이유가 되었다.
처음에 할아버지가 끝까지 다른 급 낮은 상품을 섞지 않고 제일 좋은 포도들로만 상자를 채우니, 동네 사람들은 바보라고 수근댔다. 물론 동네 인부들을 쓰던 시절에는 돈과 새참을 챙겨 주면서도 그렇게 멍청하다고, 호구라며 사람들의 수근거림까지 인내해야 했다. 당시 젊었던 아빠는 그렇게 뒤에서 수근대는 사람들은 그냥 바로 자르라고 할아버지와 많이 다투기도 했었다. 그런 사람들한테 왜 돈이랑 먹을 간식까지 챙겨주냐고. 그냥 우리 힘으로 해도 할 수 있는거고, 안되면 밭은 하나 정도 포기하더라도 싫은 소리 좀 안 들으면 안 되겠냐며...
할아버지는 밖에서는 동네 사람들에게 호구 취급을 받고, 집 안에서는 아빠의 반대 의견과 맞서 싸우며 그저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 하셨다. 그러다 때가 되자 동네에서 제일 가격을 높게 받는 부자 농부가 되었다. 그때부터 동네 사람들은 우리 할아버지를 부자라고 불렀다.
똑같은 농작물을 똑같은 동네에서 똑같은 자연 환경으로 재배해도 이렇듯 돈은 다르게 번다.
소신과 원칙을 지키는 것이 이제는 어디 유행지난 촌스러운 것 정도로 치부되는 자본주의 시대에, 그래도 그런것들이 성공의 열쇠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오늘 문득 들어 이번 메일리 뉴스레터는 나의 어린시절 할아버지 이야기로 채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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