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장]
이민 생활이 10년 정도 넘어가니 독일에 대한 정보가 의외로 한국에 많이 없고, 있어도 잘못 된 정보가 많은 것을 알수 있었다. 특히 독일 유학이나 취업에 대해서는 충분한 능력과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 못된 정보와 방법으로 도전하다가 원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는 경우도 은근히 많이 보인다. 유학원만 믿고 결정한 방에는 바퀴벌레와 곰팡이가 가득해 환불을 요구했지만 독일 행정을 이유로 거절 당한 사례는 찾기 어려운 이야기가 아닐 정도다.
독일 이민 가정은 어떨까? 한국에서 또는 독일에서 공부한 유능한 사람들이 경력이 단절되거나 독일 사람들도 얻기 힘든 교육 관련 행정 정보, 함께 육아를 할 가족과 믿고 맡길 시설 부재. 거기에 독일어 스트레스까지.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배우고자 하는 외국인들이 많아 졌지만 K 팝 관련 콘텐츠이외에는 딱히 우리 전통과 문화, 예술을 경험할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한글학교는 있지만 왜 한국 문화를 다루는 단체는 없을까?
이런 부분들이 내가 해야 할 역할과 책임이라고 생각했고 여사장과 더불어 생각을 같이 하는 몇몇과 독일 정식 협회를 만들었다. 비영리 단체로 독일로 오고 싶어 하는 학생들은 물론 독일에 거주하는 이민 가정과 한국에 관심이 있는 외국인을 돕기 위함이다.
협회를 만들었으니 협회 사무실을 찾았고, 이런저런 이유에서 우리에게 꼭 맞는 부동산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다 휴가 전에 좋은 매물을 찾을 수 있었고, 현재 진행하고 있는, 진행할 예정인 모든 프로젝트를 해볼 수 있는 이 부동산은 시내 한복판에 있으면서 건물 전체를 사용할 수 있고, 공용공간도 넓고 잘 관리 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우리를 이해하고 소통이 잘되는 건물주는 큰 장점이다.
부동산과 집주인의 요청으로 7월에 계약하려고 했던 것과 달리 6월 중순에 가계약을 했고, 휴가 후인 7월에 계약을 확정하기로 했다. 협회가 등록되는데 3개월 걸렸던 것에 비해 뭔가 진행이 착착 되었다. 7월 중순, 우리가 계약을 완료하기 위해 만난 자리에서 집주인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했다.
"계약 기간을 줄이자."
[여사장]
"최소 3년에서 5년은 계약했으면 좋겠습니다."
남사장과 내가 2년 계약을 생각하던 중, 그리스 출신의 부동산 대표님이 우리에게 먼저 계약 기간을 제안했다.
상업 용도로 세를 주기에는 2년 계약이 너무 짧다는 이유였다. 다음 세입자에게 맞추어 다시 사무실을 개조하는 등 부동산 업자 입장에서 2년은 너무 짧으니 최소 3년 이상으로 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계약하려던 부동산은 정확히 우리가 찾던 바로 그 건물이었기에 계약 기간은 부동산 대표의 조건에 전적으로 따르더라도 반드시 그 건물을 계약하고자 했다.
시내에 위치할 것
학교 혹은 유치원이 근처에 있어서 아이들과 부모님들의 방문이 용이할 것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육아맘들이 방문할 수 있도록 유모차를 주차할 공간이 있으며, 지하철 및 대중교통 조건이 좋은 위치여야 할 것
건물의 외관이 집처럼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곳일 것
어린 아이들이 방문하더라도 소음 관련 문제가 없도록 단독 건물인 곳을 우선 할 것
우리 협회의 사업 방향성과 비전에 동의하는 집주인과 계약할 것
위의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매물을 찾았고, 운 좋게 가계약까지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숨겨진 보물같은 부동산을 찾았다는 것에 그저 감사하며 계약 기간은 부동산 대표가 제안하는 것을 기꺼이 수용하였다.
보증금을 지불하고 계약서를 마무리 짓고, 이제 더는 미루지 않고 건물 열쇠를 받아서 인테리어 수리를 시작하려고 뮌헨에서 하노버를 다시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남사장이 가계약서를 마무리 해 두었기에 나는 그저 마지막 서명만 하면 되었다. 간만에 해가 나기도 했고, 오랜만에 다시 하노버에 오니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코감기에 걸려 코가 계속 막혀 답답했지만, 내 사업. 내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모든게 즐거웠다. 남사장은 이제 막 2주간의 이탈리아 가족 여행을 끝냈던 터라, 까맣게 탄 피부를 뽐내며 그렇게 즐겁게 계약 마무리를 위해 부동산 대표의 사무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늘 친절하고 상냥하셨던 부동산 대표님이 들어오셨는데. 이상하게 표정이 밝지 않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계약 기간을 2년으로 줄였으면 해요."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3년이나 5년 계약이 아니면 계약하기 힘들다고 하셔 놓구서는...'
부동산 업자 입장에서는 계약 기간이 길면 길 수록 유리하다. 사무실로 임대하는 곳은,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올 때마다 내부 인테리어를 손 봐야 하니 하나의 회사가 최대한 오랫동안 임대하도록 하는 것이 유리한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계약기간을 2년으로 줄이자고 했을까?
법이 바뀌었다고 했다.
행정과 절차를 중요시 하기에 모든 변화가 한국보다 최소 10배는 느린 독일에서, 법이 바뀌었다고?
상업용도의 건물을 주거용도로 변경하는 것이 훨씬 쉬워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계약서를 마무리 지으러 간 이 달 1일 부터 말이다!
구 시가지 관광 지구에서 도보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위치한 2층짜리 건물이 용도가 변경된다니, 부동산 업자 입장에서는 이곳을 당연히 주거 용도로 임대하는 것이 이득이다.
내가 보아도 그랬다.
부동산 대표는 어쩔 수 없이 우리와의 계약은 도의상 최소 2년은 진행하지만, 그 뒤에는 이곳을 주거용도로 임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구두로만 약속을 받기는 했지만, 혹여나 2년 뒤 주거용으로 변경을 하더라도 월세 가격을 올리지 않고 우리에게 우선 계약 연장을 할 수 있도록 합의를 했다.
계약을 마무리 하는 동안 남사장과 나는 서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어떤 의중도 내비치지 않았지만, 계약서에 서명을 마무리 하고 건물을 나와서는 서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그 어렵다는 독일 법이 바뀌다니!!
게다가 딱 지금, 우리가 계약하려는 이 달부터. 그것도 독일 전역이 아니라, 정확히 우리가 사업을 진행하려고 하는 하노버 니더작센 주 지역 안에서만 말이다.
부동산 대표는 우리에게 미안해 했지만, 우리 입장에서도 이것은 희소식이었다.
우리가 계약한 부동산을 주거 혹은 상업 용도로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거용으로 임대하기에 훨씬 유리한 건물 구조였기에, 나와 남사장은 믿을 수 없는 행운에 정신이 아찔했다.
남사장과 나는 서로 머릿속에 블루투스 에어 드랍 기능이 달리기라도 한 듯, 서로가 서로의 생각을 그대로 직관적으로 공유했다. 설득과 설명과 같은 절차가 필요 없었다. 우리는 하나의 생각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
용도를 바꿀 수 있다면 사업의 장르도 바꿀 수 있다.
우리에게 우호적인 그리스 부동산 대표를 만나서 시내에 있는 매물을 계약할 수 있었고, 이제는 법이 바뀌어서 우리가 계약한 매물을 어떤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남사장과 나는 언제라도 장르를 변경할 수 있도록 수많은 연습이 되어 있었으므로, 방향 전환을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매출이 없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조급해 하지 않고 꾸준하게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비즈니스를 공부하던 수십번의 회의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구하면 얻는다는 단순하지만 놀라운 진리를 깨닫는다.
이 뉴스레터를 구독하는 모든 분들도 구하고 얻으시기를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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