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
남사장은 어느 날, 제 3의 지인으로 부터 철학에 관심을 가져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누군가가 남사장의 철학적 사고의 잠재성을 알아 봐 준 뒤로 남사장 스스로도 철학이란게 무엇인지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남사장이 업무 미팅 때 잠깐 철학을 언급하였을 때, 여사장의 눈은 남사장이 프로젝트를 수주해 왔을 때 만큼이나 반짝였다.
[남사장]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눈으로 쉽게 보여지는 요소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찾을 수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는 던지, 매일매일 명상이나 운동을 한다 던지, 독서시간을 꼭 만든다 던지, 무엇을 먹는다 던지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하루 종일 무엇을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알기 힘들다.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고민할까?
비즈니스 왕초보자인 나는 하루종일 어떤 아이템으로 불편한 것을 해결할지, 그 가운데 어떻게 돈을 벌 수 있게 할지, 시스템화 할 수 있을지, 누구와 일을 할지 등에 대해 고민했다. 정답을 쉽게 찾을 수 없었지만 모든 과정이 답을 찾는 과정이라 믿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부터 이런 고민보다 '먼저 기준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의문이 들기 시작한 것은 고객은 무조건 100% 합리적인 선택을 할까? 에서 출발했다.
합리적이라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합리적이라는 것이 이성적일까? 이성은 감성과 무 자르듯이 구분할 수 있을까? 이성적인 사람은 감성에 영향을 받지 않을까? 이성적인 사람들끼리도 그 정도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 고객의 경험은 또는 많은 고객 후기들은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데 절대적으로 도움이 될까? 그럼 우리가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의 본질은 합리적일까? 대다수의 고객이 인정할만한 합리적인 기준을 넘었을까? 대다수의 기준이 무엇일까? ….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내 방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그냥 행동경제학, 심리학을 막연히 공부해서 고객의 마음을 얻겠다고 했던 내 선택은 맞는 말일까? 내가 뭔가를 이해하고 인사이트를 얻었다고 하는 것들이 정말 어떤 임계점을 넘은 온저히 나의 것일까? 아마도 이런 것의 답이 되는 것은 가설 검증 단계이고, 이런 단계를 거치면서 서비스의 퀄리티 기준, 타겟 고객의 기준 등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철학하면 제일 유명한 사람 중 한명인 소크라테스. 그가 하늘나라로 간지 한참 되었음에도 아직도 우리들이 그를 알고 있고, 그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앞으로도 계속 언급이 될 것이다. 왜 그럴까? 이야기가 길지만 그는 진실을 말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지금도 회자되는 것이라고 했다. 진실. 진실은 무엇일까? 비즈니스에서 진실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 원가를 공개하는 것? 실제 판매량을 기반으로 홍보하는 것? 연봉이 10억이라고 했으면 소득을 입증하는 것? 고객에게 진짜 도움이 되었다는 후기가 1000개를 넘기는 것?
내가 너무 부족하여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이정도에 불과해서 답답하지만 한편으로는 해결하고 싶어서 긍정적인 부분에서 근질근질하기도 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비즈니스를 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위치, 역할에서 한 단계 나아가기 위한 기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어떨까?
[여사장]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에게 철학이란 뭘까?
최근에 남사장이 철학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기뻤다.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나누고, 사업 행정 처리를 함께 하고, 주변에서 잘 안 될거라고 하는 피드백을 들은 슬픔을 함께 나누고, 서로 서로 만큼은 잘하고 있다고 응원하며 부족한것 없이 함께 사업을 이끌어 가고 있다. 하지만 철학에 대해 나의 비즈니스 파트너와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건 일단 너무 낭만적이지 않은가? 나는 사실 비즈니스의 세계 그 자체의 매력도 낭만이라고 여기는 사람인데, 여기에 낭만이 두 스푼 정도 더 추가된 느낌이랄까?
내가 나름 어렸을 적, 처음 독일이라는 나라에 오페어라는 제도를 통해 나오고, 유학을 결심하고, 더 오랫동안 이곳에 머무르기로 결정한 것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듯 하다.
1. 도전
2. 도망
새로운 언어, 새로운 문화, 새로운 생활방식에의 도전.
그리고 익숙한 언어, 익숙한 문화, 익숙한 생활방식에서의 도망
나는 간절하게 도망치고 싶었다.
모두가 사용하는 한국어. 누구나 다 이해할 법한 사소한 일상의 대화에서도 단 한번도 이해받는다는 느낌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익숙한 문화라고는 하지만 20대의 나에게는 너무나도 지긋지긋했던 한국 문화. 트렌드에 민감하고, 개성은 상대적으로 불필요한 부정적인 시선을 받는 그런 폐쇄적 문화. 익숙한 생활방식이라고는 하지만 도저히 왜 살아야 하는지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무의미함. 이런 것들로 부터의 회피가 나를 독일로 나오게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내 지금 나이가 30대 후반이고, 내가 자란 환경이 워낙 보수적인 지역 사회였다 보니 안 그래도 반항적이었던 학창시절에 한국의 문화를 폐쇄적이라고 느꼈을 수도 있다.
나는 지방에서는는 넘어지면 코 베어간다 라는 이상한 속담과 무시무시한 선입견으로 가득한 서울을 만 18세가 채 안 되는 나이에 홀로 상경했었는데, 진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내 베스트 프렌드들은 전부 서울에 위치한 대학교에서 만난 이들이다. 지금이야 시대가 변했고 또 사람마다 자라온 환경이 다르겠지만 실제로 지방에 살 때는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 입지 못했던 옷, 눈치가 보여 구매하지 못했던 악세서리가 서울에서는 자유로웠다. 그리고 부모님께 반항한다고 선택하기는 하였지만 미대는 나의 정신에는 이로웠다.
서울에서의 보람찬 대학생활이 끝나자, 어느새 다시 무기력과 허무감이 몰려왔다. 환경설정이 되지 않으니 다시 길을 잃은 것이다. 나는 다시 나를 도전하는 환경에 집어 처 넣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전의 난이도가 살짝 잘못 조절이 되었을까?
소위 남들보다는 독일어를 빨리 배웠다고는 하지만, 언어의 한계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특히 학문적인 영역에서.
20대 중반에서 후반기에 가질 수 있을 법한 제법 허세 섞인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내 독일언어는 너무나 부족했다.
(그리고 지금은 상상할 수 조차 없지만, 당시에는 스마트 폰이라는게 카톡이라는게 없었다. 어디서 한국사람을 만날 수 있는지 알기 쉽지는 않은 시대에 살았었다. *한인 교회가 이런 의미로 유학생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던 시대이기도 하였는데 나는 한인 교회도 나가지 않아서 더 고립 되었던 듯 ㅎ)
나는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철학을 찾았다.
당시에 내가 무료로 철학에 관한 자료를 읽어볼 수 있었던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사이트. 아직도 자료가 무료로 공유되고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아래 사이트 참고.
http://philinst.snu.ac.kr/html/menu6/extra_number.php
세상에서 생각이란걸 제일 많이 하는 사람들이 철학가일 것이라고 가설을 세우고, 다른 사람들과는 이야기를 섞지 못하더라도 철학책을 읽으면 다양한 생각의 정점에 있는 액기스만 쪽쪽 빨아먹을 수 있을 듯 했다.
다시 한번 정의하자면, 내가 철학을 했다는 것은 아니고 나는 철학을 찾아 읽었다 라는 표현이 정확할 듯 하다.
남사장이 철학에 관심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나는 사실 엄청난 주관적 해석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는데.
드디어 나와 진정한 [고독의] 동족이 되어가는 구나 라는 느낌도 받았다.
지나친 확대해석 일 수 있으나 철학을 찾아 읽는다는 것의 기본적인 욕구는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어라는 훌륭한 도구가 있음에도 우리 인간은 서로를 너무나도 오해하고, 시기하고, 왜곡하여 바라본다. 비즈니스를 하면서 겪게 되는 인간의 모든 군상들도 마찬가지다. 나의 참뜻, 내가 돈이 아닌 더 높은 비전을 꿈 꾸는 것을 허황되고 비 현실적이라 바라보는 시선들. 그렇게 수없이 이해 받지 못함을 견디다 보면 아무리 비즈니스를 하려고 굳게 마음먹은 사람도 때로는 위로를 받고 싶어 진다.
보편적인 사고방식과 보편적인 삶을 꿈꾸는 사람들은 다수다.
특수한 사고방식과 특수한 삶을 꿈꾸는 사람들은 소수다.
소수는 사실은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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