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얼빈, 그리고 '한국 영화'

안녕하세요, 구독자.

상은 입니다. 

지난 편지에서 이야기했듯이, 지난 주에는 토론토 국제 영화제(이하 tiff)에서 영화를 네 편을 봤습니다. 세 편을 볼 거라고 예고했는데, 금요일에 친구가 구해준 티켓으로 한 편을 더 보았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굉장한 영화애호가cinephile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간 쌓은 나름대로의 데이터가 있다보니 일년에 기다리는 영화 한 두편, 인상깊게 보고 재미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영화 몇 편 정도가 있으니, '꾸준한 영화 관람객' 정도는 될 것 같습니다. 

언젠가 '한국 영화'를 좋아하는 것으로 이미 굉장한 수준이라는 짤을 본 적이 있어요. 

Which level cinephile are you?

아마 프랜차이즈 블록버스터 위주 헐리우드 영화를 기준으로는 당연히 한국 영화가 낯선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 한편, 그동안 본격적으로 알려진 한국 영화들이라면 국내에서도 손꼽는 독특한 작품 - 대표적으로 '올드 보이'- 이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번 tiff에 저를 데려가 준 친구는 방송언론계에서 일하는 아시아계 캐나다인으로 사이드 프로젝트로 K-pop 뉴스레터를 꾸준히 발행합니다. 올해 tiff에서 세계 최초로 개봉하는 한국 영화인 '하얼빈'과 '대도시의 사랑법',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 영화는 아니지만 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앤더슨 팩 주연 및 감독의 영화 'K-Pop'을 보게 된 것은 친구 덕분이었어요.

그중 '하얼빈'은 제가 tiff에서 처음 본 영화이자, 보고나서 가장 생각이 많아졌던 영화입니다.

하얼빈 (2024)

감독: 우민호  |  출연: 현빈, 박정민, 조우진, 전여빈, 박훈, 유재명, 그리고 이동욱 

하얼빈 포스터

'하얼빈'은 tiff 극장 중 규모가 큰 (서울 예술의 전당쯤 되는) Roy Thomson Hall에서 Gala Presentation 으로 전세계 최초 상영했습니다.  

이번 상영에서 저는 현빈과 이동욱 배우를 무대인사로 본다는 호기심도 있었지만, 우민호 감독이 만든 영화라는데 조금 더 기대가 컸습니다. 이전 작품 '내부자들'은 (좋아한다기엔 아쉽지만) 재미있게 봤고, 특히 '남산의 부장들'은 브랜드 필름처럼 공들여서 만든 1970년대 의상이나 색감 같은 그 때깔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개인적으로 '하얼빈'은 많은 것을 담으려다가 결국 메세지만 남아버렸다는 인상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느낌은 뭘까 고민을 했는데, 중간에 '당신들은 참 거룩하다'는 대사가 나오는데서 정말 박수칠 뻔 했습니다. (아, 이토 히로부미 저격 장면에서 실제로 관객석에서 박수가 나왔습니다. 이것이 영화제의 재미일까요.) 

한국의 왓챠피디아 처럼 일반 관객들이 평점을 매기는 LetterBoxd에서 엇갈리는 '멋지다'와 '너무 애국적이다 too patriotic' 라는 후기는 아마 비슷한 감상일거라 생각합니다.

실제 인물과 사건, 그 의의를 생각하면 분명히 영화로 풀어내는데 큰 부담이 있었을 것 같아요. (무대 인사에서 현빈 배우가 처음 제안이 왔을때 고사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남산의 부장들'은 권력으로 얽힌 일종의 치정극 구도로 잘 풀어냈다는 걸 생각하면 '하얼빈'은 어떤 접근이 가능했을까 아쉬움이 남습니다. 

역사적 인물인 주인공은 다소 안전한 범위에서 그려내고, 영화 기승전결을 끌어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크고 작은 갈등과 고뇌를 새롭게 창작한 캐릭터들에게 부여한 듯 합니다. 결과적으로  주변 인물들이 '주인공은 ~한 인물이다'를 관객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느낌이었어요.

독립군을 이끄는 장군으로서 안중근 의사의 기개는 하얼빈 거사보다 그 이후 재판에서 더 잘 보여줄 수 있었을텐데, 저만 이런 생각을 한건 아니고 이미 그 시간 프레임은 뮤지컬 '영웅'이 대표적인 넘버 '누가 죄인인가'로 소화해버렸습니다. 

와중에 비슷한 시대와 주제를 다룬 '미스터 선샤인'이나 '암살'과 비교하면, 유일한 (그리고 이름은 끝내 소개되지 않는) 여성 캐릭터인 '공부인'을 비롯해, 실제와 허구 경계에 있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더 흥미롭게 활약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제목이자 공간적 배경인 '하얼빈'이 갖는 의미도 모호해보입니다. 예를 들어, 창작 시나리오이긴 하지만 '베를린'은 그 제목만으로도 더 이상 장벽이 존재하지 않는 도시에 파견된 남한과 북한 요원들이 부딪히는 설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하얼빈'은 한겨울 낯선 곳으로 쫓기듯 희망을 걸고 가는 독립투사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혹은 중국 영토이면서 러시아 관할이고 또 일본이 야욕을 뻗치는 이 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어떤 근현대사적 의미를 갖는지 이야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럼에도, '하얼빈'은 한국에서 정식 개봉하면 꽤 좋은 스코어를 낼 것 같습니다.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들, 최근 '파묘', '서울의 봄'이나 그 이전 '암살', '명량'까지 돌이켜보면 분명히 한국 관객들이 '어떻게 만들었는지 한번 볼까' 하는 궁금증을 일으킬 만한 주제를 다루고 있고,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배우들이 나오기도 하니까요. 

여기서 다시 '한국 영화'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마치 'K-pop이 그래서 뭔데?'와 같은 질문처럼, '한국 영화'는 앉은 자리에서 정교한 정의를 내리기 어려워 보여요. '한국인이 만든 한국 정서를 다룬 영화'와 '한국 감독이 만든 영화' 그리고 '한국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영화'.  그 모든 '한국'과 관련된 어떤 영화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더 좋고 나쁠 것도 없고요.

'하얼빈'은 '한국인이 만든 한국 정서를 다룬 영화'로서 '한국 영화'일 것이고, 위에서 언급한 '올드 보이'는 '한국 감독이 만든 영화', 그리고 기생충은 '한국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영화' 쯤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친구는 대학시절 자원봉사를 포함해서 13년 동안 tiff를 출석하고 있는데, 최근 몇년간 눈에 띄게 tiff에서 한국 영화와 배우, 감독 초청이 늘었다고 합니다.

한국 영화와 시리즈가 북미에서 흥행하고 주목 받는 현상이 어느덧 낯설지도 않지만, 여전히 북미  관람객 시선에서 '한국 영화'는 그 자체로 어떤 장르가 되어가는지 궁금해집니다.

'하얼빈' 하나 이야기할 뿐이었는데 편지가 길어졌습니다.

'Queer'와 '대도시의 사랑법', 그리고 'K-Pop'은 다음번 편지에서 이어서 더 이야기해볼게요. 

오늘 편지가 재밌었다면 제가 지치지 않도록 한마디 남겨주세요...

2024년 9월 15일 

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