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일 만에 새 직장 관둔 썰

안녕하세요 구독자, 

상은입니다. 

지난 메일을 보니 3월 말에 새 직장 입사 한 달 차, 이민 일 년 차 근황이 마지막이었네요.

이번 편지는 6월 첫 주 월요일 오전에 어울리는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회사를 그만뒀어요. 계산해보니 딱 입사 후 99일 만이었어요.

이유가 궁금하겠지요, 구독자.

번아웃이 왔어요. 아이고. 

구구절절 쓰는 게 맞나 고민했는데, 그래도 우리 사이에 못쓸 건 뭐 있나 싶어서 써봅니다.

퇴사 3주 전으로 돌아가 볼게요.

본래 업무만으로도 하루가 꽉 차는데, 새로운 업무가 더 해지고, 업무 프로세스 개선 업무가 생기고, 그 사이에 갑작스러운 업무가 치고 들어오는 상황이었어요.

공 네 개가 동시에 돌아가는 저글링을 합니다.

모든 일이 다 우선순위라고 저에게 소리를 지르는 기분이었어요.

퇴사 2주 전, 수습 마무리 면담 날.

매니저가 지난 3개월 동안 제 퍼포먼스에 대한 한줄평을 줍니다. "현 포지션에 비해 뛰어나나, 기존 경력에 비해 아쉽다"

당연하죠. 제 포지션은 원래 제 경력에 비하면 주니어였고요. 제 전문성을 살려서 일을 하기에는 조직 내 역할 분담이나 프로세스가 잡혀있지 않았으니까요. 

그때 저는 아래와 같이 제 뜻을 밝혔습니다.  

- 팀 비전과 잠재력에 공감하고 더 많은 것을 해보고 싶고 잘 해낼 자신이 있다.

- 그러나, 지금처럼 시간과 체력을 갈아넣는 방식은 지속 불가능하다 

- 앞으로 3개월 동안 본 업무 프로세스를 효율적으로 개선하는데 집중하겠다 

- 그 후 6개월 동안 현재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다양한 업무를 시도해보고 싶다

매니저와 한 시간 논의 끝에 새로운 업무 프로세스를 도입해봅니다. 

퇴사 1주 전.

주간 리뷰에서 비즈니스 성과 수치가 떨어졌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시장이 변하고 예산이 변동하는 가운데, 제가 담당한 영역에서 딜레이가 발견됩니다.

평소에 의견 달라고 할 때는 한 마디도 얹은 적 없더니 이제 제가 일하는 방식과 내용을 하나하나 묻기 시작합니다.

불렛포인트로 보고해온 내용은 이제 시트에 표로 정리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매일 수치를 업데이트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참고로, 아직 프로세스 개선 중이어서 그 수치를 자동으로 끌어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퇴사 3일 전. 

매니저와 1 대 1 면담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할거냐는 질문에 저는 아래와 같이 대답합니다.

- 딜레이의 원인은 2주 전 면담에서 언급한 업무 과부하 영향이 있었다 

- 이걸 해결하려면 인력 - 시간 - 보상 셋 중 하나는 더 주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매니저가 화났습니다. 나와 팀이 당신을 도와주고 있는데 지금 보상을 얘기한다고?

아 잠시만요. 전 지금 돈 더 달라는 얘기를 하는게 아니에요. 저는 이 상황을 잘 정리하고 업무를 더 잘 하고 싶어요. (솔직히 내가 일에 집중할 시간을 주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 포인트를 이어나갑니다.

- 어쨌거나 딜레이에 내 책임도 있다, 이제는 내 본업과 지금 상황 수습에 집중하겠다

- 앞으로 2주 동안 필요한 결과물은 4주 커버할 수 있는 분량으로 땡겨서 맞춰놨다

- 동시에, 나는 이번 딜레이에 대한 원인과 해결방안을 정리해서 3주 뒤에 보고하겠다

극적 합의 후에 동료들과 점심을 먹었습니다. 얼마든 하소연해도 좋으니 제발 관두지만 말라는 동료의 말에, 관두는 건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걱정 말라고 했고 정말 그렇게 믿었어요. 

퇴사 24시간 전. 저는 이 상황을 잘 정리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었어요. 

쌓인 메일에 답변을 하고, 수치를 볼 수 있게 시트도 다시 정리하고, 대시보드도 업데이트하고,  결과물도 목표보다 4배 넘게 맞춰놓고, 퀄리티가 아쉽다길래 다른 결과물도 준비해봅니다. 

퇴사 12시간 전. 매니저 주도로 두 시간짜리 워크샵 미팅을 합니다.

새로운 프로세스에 대한 논의, 더 나은 결과물 퀄리티를 위한 아이디어, 용어와 개념에 대한 재정리... 지난 세 달 동안 계속 해 온 얘기를 또 하고 와중에 새로운 프로세스가 도입됩니다.

업데이트한 대시보드와 시트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매일 쓰는 이메일 숫자까지 일일이 세는 한이 있더라도 다 업데이트 하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건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퇴사 3시간 전. 퇴근길 유튜브 피드와 검색 기록에 '번아웃'이 가득했어요.

언제까지 어디까지 마무리하고 나간다고 말을 해야할까 생각을 해봤어요.

남편은 조심스럽지만 단호합니다. 남 좋은 일 더 해주지 말자고, 더 남아서 일할 만큼 좋은 직장이나 매니저들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합니다.

문득, 사흘 전 매니저가 왜 2-3주 전에 미리 업무 딜레이에 대해 알아차리고 논의하지 않았는지, 제 연차면 그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지 않냐고 물어본 것이 기억났어요.

이 조직은 나의 번아웃보다 퍼포먼스 수치가 더 중요하구나.

그렇다면 나는 빨리 나를 구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퇴사 1시간 전.  사무실에 가서 개인 물건을 챙기고 장비를 두고 퇴직 메일을 썼습니다. 

곧 예약 걸어둔 퇴직 메일이 발송되었고,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한 시간쯤 지났을까요, 제 계정이 비활성화되었다는 동료의 메시지가 왔습니다.

그렇게 네 번째 회사에서 99일 간 근무가 끝났습니다. 

다시 백수가 되었고 피로는 남고 번아웃은 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어요.

오랜만이에요. 인사가 늦었어요. 

2024년 6월 2일

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