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쌉싸름한 나의 도시

안녕하세요, 구독자

상은입니다. 

'난 낯선 곳에 있고 아직 적응 중이구나' 하고 느끼는 뜻밖의 작은 순간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기 전 선물로 디저트를 어디서 무엇을 사가야할지 모를 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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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광고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먼저 익혀야 했던 것은 눈치껏 간식을 사는 요령이었어요.

중요한 광고주 미팅 전에 명동 신세계백화점 지하 SSG마켓에서 부담없이 고급스러운 디저트를 신속하게 준비하기, 밤 열두시 회사 뒷문 편의점에서 철야식대에 딱 맞춰서 과자젤리초콜릿 한가득 털어오기, 외근 끝나고 바로 사무실 복귀 안 하는 분위기일 때 빠르게 주변 카페 생각해 놓기 같은 거요.

그 외에도 자잘한 생일-기념일-어쩌구저쩌구 챙기기, 내부 아이디어 미팅을 앞둔 배달 주문 등등 크고 작은 간식 사기 퀘스트들이 있었어요.

그게 누군가의 구체적인 지시나 사수들의 고마운 힌트가 있을 때도 있지만, '트렌디하고 있어보이는데 뻔하지 않은 거' 같은 막연한 주문일 때도 있고... 대체로 그런 업무는 그 속성상 매뉴얼이 없고 눈치와 경험치, 그리고 스토리텔링이 필요하죠.

이런 일의 좋은 점은 제 돈 주고는 안 샀을 예쁘고 비싼 것들을 마음껏 고르고 법인카드로 긁는 쾌감이 있었다는 거고, 나쁜 점은 선물은 센스있게 잘 해야한다는 혼자만의 강박이 생겼다는 거에요. 

그 모든 게 지긋지긋해서 에이전시를 나가겠다 마음 먹었는데, (사실 에이전시 아니라고 다를 것도 크게 없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 그게 막내가 거쳐가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업무 트레이닝이었나 싶어요.  

대입성적은 국영수 점수가 중요하지만, 일상은 기술가정에서 배운 것으로 굴러가듯이... 정작 회사 안팎에서 결정적으로 도움이 된 것은 파워포인트 스킬도 아니고, 브랜드 아이덴티티 시스템도 아니고, 그 간식 고르기 경험치였어요. 

친구 집에 놀러가고, 어른들을 뵙고, 즐거운 자리에 가는 길에 좋은 선물과 간식을 고르는 것은 사실 재밌어요. 그 기회에 요새 맛있다는 디저트도 사보고, 새로운 곳도 가보고, 잘 아는 곳은 또 갈 수 있으니까요. '이런 걸 위해서 이 정도는 벌고 있고 쓸 수 있다'는 직장인의 보상심리도 있었을거에요.

근데 구독자, 그게 여기서는 아직 어려웠어요. 

어디에 뭐가 있는지, 어떤 게 좋은 건지 아닌지, 적당한지 아닌지, 모르겠더라고요.

우버이츠랑 구글맵을 들여다보면서 뭘 해야할지 모를 때, 다시 그 인턴 때로 돌아간 것 같았어요. 아니, 그것보다 더 막막하고 답답했어요. 여긴 왜 신세계백화점이 없는 거야...

서글펐어요. 

그 감정이, 이제 돌아가지 못할 일상을 떠올리면서 쌓아뒀던 그리움인지, 그동안 낯선 곳에서 때때로 느끼고도 모른 척 넘겼던 아쉬움인지, 직장생활 동안 키운 내 웃기고 슬픈 스킬이 여기서는 아무 의미가 없어서 느낀 속상함인지, 아니면 전부 다 인지 모르겠지만요.

구독자, 제가 평소에 작은 것에도 의미부여를 많이 하는 편이긴 하지만, 이렇게 사소한 일로 많은 감정이 올라올 줄은 몰랐어요. 그게 뭐라고, 그깟 케익 한 상자가 뭔데...

🍮

구독자, 그 순간에 대해서 다시 편지로 쓰면서 생각해봤어요.

그동안 에이전시나 엔터 업계처럼 유난히 포모(FOMO, fear of missing out)가 심한 집단에 있었기 때문에 더 디저트나 선물 잘 고르기에 요상한 집착을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게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고, 잘해야만 하는 일 중에 하나라는 생각 때문에요. 

그리고, 자주 해본 경험이 있다면 더 익숙할 수 밖에 없고, 잘 알던 지역도 안 가본 사이에 바뀐다면 모르는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근데 '이 동네는 (어디서 뭘 사야할지) 모르겠어'라는 단순한 생각을 삶의 거대한 변화랑 엮으면서 더 크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저는 출퇴근하던 용산 지역 카페는 조금 알았어도, 최근 대구 맛집이나 카페는 잘 모르거든요.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대구에서 오래 지낸 적이 없으니 지도보면서 더듬더듬 찾아가는 수준이란 말이에요? 그렇다고 제가 지금 대구를 잘 모른다고 해서 속상하진 않거든요. (음.. 그래도 대구에 신세계백화점은 있네..) 

아마 그때 디저트 한 조각에 주렁주렁 따라오는 기억들이 많아서 잠깐 센치 했나봐요.

지금은 괜찮아요. 그때 유난히 많이 당황했을 뿐. 저 위에는 저렇게 써놨지만, 여기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치고 저 꽤 많이 돌아다녔어요...ㅋㅋ 최근에는 로컬 친구들이랑 어떤 카페에 갔는데, 정작 그 친구들은 한번도 안 와봤대서 제가 뭐 먹을지 추천도 해줬어요ㅎ 

나중에 저 만나러 여기 오면, 그때는 맛있는 거 미리 많이 알아 둘게요, 구독자. 

☕️

아 그리고, 구독자, 오늘 편지를 쓰는 동안 좋은 소식이 있어서 함께 남겨요. 

Open Work Permit이 승인되었어요. 여기서 취직을 하고 일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당당한 백수로 놀 수 있는 시간이 끝난 것은 아쉽지만ㅎㅎ 튜토리얼 모드가 끝나고 새로운 게임 레벨이 시작되는 것처럼 설레고 흥미진진하기도 해요!

이제 취준생 실전 모드 시작해봅니다.

앞으로 이어질 편지도 즐겁게 읽어주세요.

오늘도 고마워요, 구독자.

2023년 10월 17일,

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