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상영하는 모임을 열 번쯤 하고 나서 느끼는 게 있다. 단순히 내가 보고 싶은 걸 찾을 때와, 사람들에게 보여줄 때의 취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접점이 더 많지만, 온전히 일치하지 않는 것도 분명하다. 후자 쪽은 일종의 객관화가 된다는 차이라고 할까.
또 그 과정에서 내 취향을 좀 더 뚜렷하게 알게 되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나는 느린 영화를 꽤 좋아하고, 희망적이지 않은 성장담에 끌리며, 이야기보다는 분위기 같은 비언어적 요소에 더 많이 반응한다. 이런 건 장르나 소재에 대한 선호도와는 별개의 영역이다. 아마도 나 스스로도 아직 알지 못하는 내 취향이 더 있을 것이다.
이런 걸 보면 ‘좋은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취존하시죠’ 같은 태도는 동의하기 어려운 걸 넘어서서 폭력적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건 습관이자 정서적 게으름이다. 취향은 결국 분별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또 무엇을 싫어하는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는지, 그 출발점은 어디인지, 스스로의 디테일한 선택에 따라 자신의 것을 가진다는 의미다.
‘좋은 취향’이라는 건 있다. 그게 우열이라는 의미가 아닐 뿐이다. 다만 그게 저절로, 혹은 쉽게 생긴다고 생각하는 건 커다란 착각이다. 좋은 것에 스스로를 계속 노출시키고, 경험하고, 사유하고, 학습하고 존중할 만한 견해들을 접해야 갈고 닦이는 것이다. 누군가의 ‘좋은 취향’에 열폭하는 것은 열등감의 표현형일 뿐이다.
어쩌면 그런 개인적인 것이 가장 산업적인 구조에서 결정되어버리는 현실이 지금의 심각성이 아닐까 한다. 그걸 뒤집어엎지는 못해도 수몰되지는 않으면서 살고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도 여겨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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