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에 론칭을 앞둔 여성형 OTT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칼럼 연재가 들어왔다. 결국 사업 자체가 무효가 되면서 엎어졌지만(원고료는 받음), 저장해놓은 원고들은 고스란히 잠들어 있다. 나중에 어디 쓸 데가 있겠거니 했는데, 아까워서 생각난 김에 그냥 메일링으로 공유한다.
몇 년 전부터 취미 겸 부업으로 웹 소설을 쓰고 있다. 처음에는 고품격 19금 로맨스를 쓰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는데, 구독자 수와 수익에 일희일비를 하는 소시민이다 보니 실상은 공들여 쓴 야설이 되어버렸다. 아무튼 감사하게도, 많지는 않아도 작품 나올 때마다 열렬하게 읽어주는 고정 독자는 그럭저럭 생겼다. 그리고 독자의 99%는 여성이다.
독자들에게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받다가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여러 번 있다. 어느 구석이 마음에 들어서 읽어주냐고. 묻는 사람마다 돌아오는 대답의 결은 거의 비슷했다. 여성들이 어떤 지점에서 스위치가 눌리는지를 섬세하게 짚어내서 좋단다. “그동안 남자들이 쓴 더러운 야설만 보고 불쾌감만 쌓였는데, 작가님 소설을 보고 푹 젖을 정도로 흥분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애초에 철저하게 여성향을 타깃으로 잡았기에, 이런 반응들은 반갑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굳이 개인적인 음지의 역사를 먼저 밝히는 이유가 있다. 여성과 섹슈얼 콘텐츠의 관계에 대한 자료를 찾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남자들과 포르노 시청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흔하지만, 여성과 포르노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나 참고할 만한 통계 자료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정말이지 비참할 정도로 없다. 어딘가 대학 도서관 논문 서가에 꽂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구글을 탈탈 터는 정도로는 찾아내기 힘들었다.
전 세계 시장은 남성 아닌 여성이 좌우한다. 이건 이제 뭐라 해도 명백한 팩트가 되어가고 있다. 세계적인 전략 컨설팅 업체 보스턴 컨설팅 그룹(Boston Consulting Group, BCG)은 “2028년에는 전 세계 소비의 72% 이상을 여성이 통제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전 세계 22개국에서 12,000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다. 마이크로소프트, 뱅앤올룹슨 등의 파트너인 덴마크 디자인 업체 디자인 피플(Desigh-People)에는 아예 ‘성별 전문가(Gender Expert)’라는 직책이 있다. 이들은 덴마크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개설된 교육 과정을 통해 여성 고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을 심도 있게 주입 받는다. 디자인 피플의 디렉터와 이메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그는 이 부분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콘텐츠 소비에서 여성의 위력은 특히 압도적이다. 섹슈얼 콘텐츠라고 다르지 않다. 여성이 주 소비층인 19금 콘텐츠가 웹툰, 웹소설 플랫폼을 먹여 살리다시피 한 건 이미 오래됐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남성의 시선으로 보고, 남성이 만들고, 남성이 소비하는 포르노의 지뢰밭이다. 유명 포르노 제작자 에리카 러스트는 여성을 위한 대안적인 포르노를 만들게 된 계기에 대해, “어린 시절 기대감에 차서 포르노를 봤다가 혐오감만 느꼈다”고 한 강연에서 밝혔다. 에리카 러스트는 세계에서 성 평등 지수가 가장 높고, 성교육 체제가 가장 발달했다는 스웨덴 출신이다.
여성의 취향은 남성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합적인 다면체와 같다. 전자제품으로 예를 든다면, 일반적으로 남성들은 제품의 기술적인 측면에 집중하는 반면, 여성들은 그 물건이 자신의 전반적인 라이프스타일에 어떻게 섞이고, 어떤 이점이 있는가를 입체적이고 꼼꼼하게 따져보는 식이다. 섹슈얼 콘텐츠가 얼마나 야한가는 물론 여성들에게도 중요한 관심사다. 다만 여기서 소비자를 더 몰입하게 하기 위한 밑작업—납득할 수 있는 서사, 대화의 뉘앙스, 인물 간의 관계성, 아슬아슬한 긴장감 같은 게 필요하다. 즉, 맥락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
에리카 러스트는 작품을 제작할 때 반드시 몇 가지 원칙을 지킨다고 한다. 다양한 외모와 체형의 여성을 캐스팅하고, 배우들의 안전과 합리적인 노동환경을 우선순위로 두고, 실제 여성들의 섹스 판타지와 성적 지향, 경험 등을 면밀하게 연구해서 시나리오를 쓰며, 서사와 감정선을 중시한다는 것 등. 앞서 말한 ‘여성향 포르노’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니, 적어도 내가 소설을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쓴 건 아니었군, 하는 확신이 더해진다.
유구한 남성 중심의 역사가 지배해온 인간계에서, 여성을 위한 포르노는 일종의 산업적 미개척지인지도 모른다. 다른 거창한 의미부여 없이 상업적인 논리로만 머리를 굴려도, 이쪽만 파고들어도 최소한 망하지는 않을 거라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 산업 내에 여성 혹은 여성의 맥락을 섬세하게 이해할 있는 사람이 더 많이 필요한 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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