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에 관한 짧은 낙서

좋은 사람

새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

2022.11.03 | 조회 2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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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에 관한 짧은 이야기

아주 사적이고 디테일한 에세이

사진은 그냥 토니 모리슨.
사진은 그냥 토니 모리슨.


“생존하라. 탐구하라. 그 생명에 최대의 성과를 기대하겠다.”

“인간의 전제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첫 번째는 애니메이션 <취성의 가르간티아>, 그리고 두 번째는 히로키 엔도의 만화 <에덴>의 대사다. 인간에 대한 좋은 정의라고 생각해 메모까지 해놨다. 그런데 십 년쯤 지난 지금은 이 말들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기 힘들어졌다. 의심이 꼬리를 물게 된 것이다. 좀 더 본질적이면서도 까다로운 의문이다.

최대의 성과라는 게 뭘까.
더 나은 존재라는 건 대체 뭘까. 

인간의 삶에서 최대의 성과이자 더 나은 존재라면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걸 텐데, 글쎄, 이런 막연한 관념은 이제 공허하다. 다들 그만 속을 때도 됐지. 어렸을 때는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누구나 생각한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나쁘고 한심한 사람이 되어 있으니까.

진화의 막다른 길에 몰려서 천천히 멸망을 향하고 있는 종으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진 게 더 남아 있을까.

 

***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질색을 하고 쓰지 않는 표현이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좋은 사람’이다. 같은 이유로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당장 도망가고 싶어진다. 그런 말을 들을 일이 몇 번이나 있겠냐만.

물론 은연중에 누군가를 좋은 사람으로 느끼는 적은 당연하게도 있다. 다만 그걸 입밖으로 내려면 꺼림칙한 뭔가가 끊임없이 방해를 한다는 거다. 차라리 나쁜 사람이라면 좀 더 명확할 수도 있겠다. 

좋은 사람, 있겠지. 상식적이고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에서, 혹은 각자의 기준에서. 그런데 그 사람이 나한테만 좋은 사람일 수도 있고, 남한테만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밤 12시까지만 좋은 사람일 수도 있으며, 서울에서만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선량한 개인이자 사악한 조직인일 수도 있고, 반대로 비열한 조직인이자 정의로운 개인일 수도 있다. 대외적으로 좋은 사람이 집 문만 열고 들어가면 백상아리 같은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세상 천지에 좋은 사람인 대신에 자신의 내면은 온통 피폐해졌을지도 모른다. 

추상적인 비유가 아니다. 의외로 드물지 않은 군상들이라고 생각한다. 살아보니 세상에는 좋은 놈이자 나쁜 놈인 동시에 이상한 놈도 있더라.

 

***

 

누가 봐도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 나올 만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거꾸로 뒤집어봐도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 

예의 바르고, 배려심 있고, 인연을 소중히 여길 줄 알고, 일에서는 책임을 기꺼이 떠안고, 타인에게 관대하지만 자신에게 엄격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세상이 좋아지는 방법에 늘 관심이 많은 사람. 그 사람을 나에게 소개시켜준 친구는 호인(好人)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런데 어느 술자리에서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자, 그는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겸연쩍음에 그런 것도 아니고, 자신에게 달라붙는 그 말을 몸에 붙은 돈벌레처럼 털어내려는 듯, 정말로 온몸으로 거부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은 스스로가 얼마나 한심하고 부족한 인간인지 잘 알고 있다고. 그래서 언제나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채찍질하고, 갈고 닦아야 한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사람과 좀처럼 좁혀지기 힘든 심리적 거리가 생겨버렸다. 그 사람을 좋아하지만, 나와는 다른 의미로 좋은 사람이라는 시선을 거부하는 구도자 같은 굳건한 신념에 그만 질려버렸다. 그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의 단순한 믿음에도. 그런 것들을 도저히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그런 삶의 방식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돌았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있기 위해 무엇을 희생했을까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오랜 시간 세간에 좋은 사람으로 알려졌던 다른 누군가의 추악한 모습을, 바로 얼마 전에 접했다.

내가 아는 한, 최선은 그저 다면체 같은 인간이 보여주는 해프닝에 충실하는 것이다. 인간은 온갖 요소가 뒤섞인 만화경 같다. 그걸 흔들어서 무작위로 나온 파편들이 일부일 수도, 전부일 수도 있다. 그걸 늘 염두에 두는 것뿐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와 상대를 유추하고 발견할 수밖에 없다. 죽을 때까지.

 

***

 

물릴 정도로 자주 쓰는 토니 모리슨의 소설 대목을 또 인용하자면, 세계의 해결책은 곧 문제이기도 하다. 

세계는 누군가가 만든 거대하고 복잡하며 괴상한 기계처럼 기능하고 있다. 여러 주체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그 톱니바퀴는 점점 촘촘해지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아웃풋으로 관성이 생기고 그걸 누군가 깰 수가 없는 거다. 깨려고 들어가면 그 관성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녹아들 뿐이다. 그게 대부분의 평범한 인간이 처해 있는 현실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게 할리우드적이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고 살려 해도 말이지. 

어쩌면 할 수 있는 건, 물이 흘러나온 것까지 가지는 못하지만, 역류해서 필사적으로 제자리에 머무르는 것 정도인지도 모른다. 세계를 선택할 수 없지만 세계에 빚지고 살지 않을 수도 없는 한 명의 평범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세금 정도는 지불하면서 사는 것. 그러다 보면 생명은 끝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세금이 계속 무거워지는 기분이 든다. 무슨 탐관오리에게 고혈을 빨리는 민초가 된 것 같다고 할까.

같은 존재가 됐으면, 하고 가끔 생각한다. 새에게는 인간의 선악 같은 없겠지. 무해한 뱁새든 악독한 뻐꾸기든, 좋은 새도 나쁜 새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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