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0

그저 잘 노려서 잘 내리꽂아

2023.07.22 | 조회 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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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우쟁

파리로 떠난 우정의 일기를 메일로 보내드립니다.

소선이가 준 책 한 권을 챙겨왔다. <브로콜리 펀치>라는 단편소설집이다. 여행지에서 피곤할 때 마다 한 편씩 읽기에 제격이었다. 그 중 네번 째 이야기, 왜가리클럽의 글귀 하나가, 파리생활을 실패할까봐 걱정하는 내 마음에 와 꽂혔다. 

왜가리를 보고 생각했던 것이. 왜가리는 그 생김새도 미끈하니 좋고 물고기를 잡는 모습도 노련하여 멋있었으나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사냥에 실패했을 때였다. 오랫동안 도사리고 집중해 부리를 내리꽂았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물방울만 사방에 튀기며 고개를 드는 왜가리가. 분명 나였다면, 아니 사람이었다면 민망하여 헛기침이라도 한 번 하며 혹시 누가 이 창피한 꼴을 보지는 않았나 슬쩍 주변을 두리번거렸을 법한 보기 좋은 실패였다. 하지만 왜가리는 그러지 않았다.정확히 말하자면 실패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같은 무게로 여기는 것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그도 그럴 것이고기를 잡았다고 해서 왜가리가 특별히 기뻐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왜가리에게는 그저 매번 잘 노려서 잘 내리꽂는 것만이 중요했고 그 뒤의 일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모두 같았다. 그것이 멋있었다고, 부러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인간에게 가능한 일인지 조차 알 수 없으나 그저 사는 동안 조금이라도 닮아보고 싶다고,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브로콜리 펀치 - 이유리

삶은 성공하기 위해 사는 것이고, 그 성공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고민하며 살아왔다. 그러다 만약 실패라도 하게 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자 노력하며, 자기를 위로했다. 서른 넷, 이제 '성공'을 중심으로 사는 건 생각만해도 피곤하다. 왜가리는 성공과 실패 사이의 줄다리기를 싹뚝 잘라버린다. 이들을 같은 무게로 받아들인다니, 왜가리는 순례길을 얼마나 걸은 것일까.


26일차 뒷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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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는 억세게 쏟아졌다. 얼마나 더 걸어야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판초를 입은 한 사람이 다가왔다. 실루엣을 보니 다행히 여자 분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생쥐꼴로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올라!" "앗 한국인이세요?" 신이 보내주신 게 분명하다. 어떻게 이 순간에 혼자 걷고 있는 여자분을, 그것도 한국인을 만날 수 있는지 반가움을 감출 수 없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어서 같이 걸어 가요. 5분만 더 가면 제가 예약한 알베르게가 있어요.” 그분의 이름은 소연이었다. “이까짓 비 1일차부터 맞아와서 이제 아무렇지도 않네요.“ ”맞아요. 젖으면 빨면 되고, 또 햇볕에 말리면 되죠.” "맞아요 하루면 바짝 말라요." 소연 님은 폰페라다에서 박물관을 돌다가 늦게 출발했다고 했다. 우리는 긍정으로 꽉 찬 대화를 주고 받으며 걸었다. 덕분에 금세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하지만 알베르게는 만실이었다. 미리 예약한 소연 님은 체크인을 하셨고, 나는 우산을 펼쳐들고 다른 알베르게를 찾아 나섰다. 멀지 않은 곳에 침대 딱 하나가 남아있었다. 워낙 늦은 시간이라서 직원은 저녁 준비가 한창이었다. 머리부터 신발까지 다 젖어서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지만 30분을 기다렸다. 기약이 없었다. 이러다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할 것 같아 직원에게 다가가 말했다. "나 너무 추워요 ㄷㄷㄷ" 계산은 추후에 하기로 하고 일단 침대 배정부터 받았다. 하얗고 뽀송한 이불로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마지막 1층 침대였다. 방에는 1층짜리 싱글 침대만 12개가 늘어서 있었다. 이렇게 좋은 알베르게가 13유로라니 설마 더 받는 거 아닐지 의심될 정도로 깔끔하고 아늑했다. 샤워실 시설도 좋았다. 수압 센 샤워기로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빨래를 하고 쌓였던 피로를 흘려 보냈다. 


27일차 13.66km

Villafranca del Bierzo Pereje Trabadelo La Portela de Valcarce Ambasmestas Vega de Valcarce 

아침 - 커피, 생과일 주스, 크로와상, 식빵 (5유로)
아침 - 커피, 생과일 주스, 크로와상, 식빵 (5유로)

이른 아침, 리옹이 숙소로 찾아와 같이 조식을 먹었다. 화장실에 가는 길에 방을 슬쩍 보여주니 놀란 표정으로 “이렇게 좋은데 13유로라고?”라고 말했다. 내심 뿌듯했다. 오랜만에 리옹과 다시 같이 걸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 했다. 리옹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비염이 심했다. 계속 코를 풀면서 걸어서 두통을 호소했다. 컨디션이 급격히 안 좋아져서 목적지 중간에 있는 숙소에서 체크인을 했다. 이 숙소가 예뻤다면 나도 같이 머물러도 됐을텐데, 한국의 시골 길에 있을 법한 모텔이었다. 인근에 볼 만한 것도 없어서 같이 점심만 먹고, 나는 조금 더 걸어서 vega de valcarce에 있는 경치 좋은 알베르게에서 가방을 풀었다.

 

산티아고 로맨스

점심 순례자 메뉴 - 전식, 본식, 디저트, 음료 (13유로)
점심 순례자 메뉴 - 전식, 본식, 디저트, 음료 (13유로)

순례길에서 만난 천사를 ‘산티아고 엔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순례길에서 하게 되는 연애를 ‘산티아고 로맨스’라고 부른다. 이건 벌써 순례만 4번 째라는 노르웨이인 크리스티안이 알려줬다. 그는 첫 순례길에서 겪었던 산티아고 로맨스 이야기도 전해주었는데, 한동안 사귀다가 결국 헤어졌다고 했다. “꺄-”소리를 낼 정도로 설레는 이야기였다. 한편으로 과연 나도 산티아고 로맨스를 경험할 수 있을지 살짝 상상하게 되었다.

마침 이 마을에서 산티아고 로맨스를 실제로 목격했다. 내 침대 1층에 두 사람이 끌어 안고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누군가 하고 보니 남자애는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상장피에드포트(순례 첫 시작점)에서 인사를 나눴던 뉴질랜드인이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길에서 마주치면 인사하는 사이로, 분명 시작할 때는 혼자였으니 산티아고에서 만난 여자친구인 것 같았다. 내가 2층으로 올라가는 바람에 잠에서 깬 이들은 내게 짧은 인사를 하고는 수시로 스킨십을 해댔다.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는 이들이 불편할 법도 한데 이상하게 그 모습이 예뻐 보였다. 다만 밤에 침대가 흔들릴 정도로 격렬해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용히 잠만 잘 잤다. 

문제는 산티아고 로맨스를 목격하고 나니까 리옹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껌딱지처럼 붙어 있다보니 정이 들은 건지 좋아하는 건지 확실치 않았다. 책을 읽어도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할 일도 딱히 없어서 심심했다. 나를 매번 기다려주던 친구인데, 정작 나는 한 번도 기다려준 적이 없다는 사실에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문자를 보냈다. “내일은 여기서 기다릴게. 같이 걷자.” 소심한 용기였다. 

 


28일차 11.33km

Vega de Valcarce Ruitelán Las Herrerías La Faba La Laguna de Castilla O Cebreiro

숙소 뷰
숙소 뷰

아침 8시에 출발한다고 했던 리옹에게 느즈막히 문자가 왔다.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많이 늦어질 것 같으니 먼저 출발하라는 내용이었다. 다시 혼자 가파른 오르막을 올랐다. 나의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성큼성큼 빠르게 산을 올랐다. 그런데 아뿔싸, 알베르게 사물함 위에 놓고 온 선글라스가 번쩍 떠올랐다. 곧바로 알베르게에 연락을 시도했다. 한참동안 통화한 끝에 배낭 옮겨주는 ‘덩키’ 서비스를 이용해 오늘 저녁에 묵을 알베르게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내게 어느 마을로 가는지 목적지를 물었지만 답할 수 없었다. 나도 아직 모르니까. 정해서 다시 연락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언덕 뷰
언덕 뷰

그때 또 번쩍, 뒤따라 오는 리옹이 가지고 올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 다음 일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나는 마음 편히 O Cebreiro까지 전력질주하여 성당에서 미사도 드리고, 한국인 친구들을 만나 맥주도 얻어 마셨다. 얼마 후 맥주를 마시던 곳으로 리옹이 선글라스를 가지고 왔다. 덩키 비용 6유로를 아꼈다. 


29일차 45.07km

O Cebreiro Liñares Hospital da Condesa Padornelo Alto do Poio Fonfría O Biduedo Fillobal Pasantes Triacastela San Cristovo do Real Renche San Martiño do Real Samos Teiguín Pascais Gorolfe Veiga de Reiriz Perros Aguiada San Mamede do Camiño Sarria

언제나 보다 긴 길을 선택하는 게 좋다.<div> 절벽과 숲이 있는 South 남부 길 추천</div>
언제나 보다 긴 길을 선택하는 게 좋다.
 절벽과 숲이 있는 South 남부 길 추천

지난 이틀 간, 하루 10km밖에 걷지 않았다. 조급해지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마음 한 켠이 불편해져서 아침 일찍 혼자 길을 나섰다. 하루에 얼마나 많이 걸을 수 있는지 나를 시험해보는 날로 삼아서 목표 거리를 45km로 잡았다. 45km는 꽤 긴 거리다. 예쁜 마을들이 보일 때마다 지나치기 힘들었다. 하지만 컨디션은 오늘도 최상. 12시간이 넘도록 힘차게 걸었다. 저녁 8시가 되자 온몸에서 더이상 걷다간 쓰러질 거라는, 경고 신호를 보내 왔다. 어차피 목적지 Sarria사리아에 다 왔을 무렵이었다. 도시 초입에서 알베르게가 보이자마자 들어가 체크인을 했다. 

 

뽈뽀

유명한 뽈뽀. 난 다 맛있더라.
유명한 뽈뽀. 난 다 맛있더라.

이탈리아인 조셉아저씨에게 문자가 왔다. ”뽈뽀 맛집으로 유명한 레스토랑이야. 여기로 오면 돼.“ 어제 안부를 물어봐주시면서 저녁 한 번 먹자고 연락이 왔었다. 다 씻고 나오니 너무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아저씨를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날일 것 같아, 절뚝거리며 찾아갔다. 허기진 상태라 뭐라도 먹긴 해야 했다. 아저씨는 새로 사귄 친구분과 와인을 드시고 계셨다. 나도 뽈뽀와 맥주 하나를 시켰다. 맥주는 병 째로 마시고, 맥주 따르라고 준 잔에는 물통에 있던 와인을 따랐다. 수고한 나에게 알콜을 주입하니 살 것 같았다. 싱싱하고 탱글탱글한 문어 안주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저녁이었다.

술에 조금 취했을 무렵, 우리는 왜 이 길을 걷게 되었는지 모국어로 얘기하는 영상을 찍었다. 두 이탈리아인 아저씨는 단순히 친구의 추천으로 오게 되었다고 짧게 답했다. 은퇴한 상태에서는 순례길을 걷는 데 큰 희생이 따르지 않는 것 같다. 반면 나는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술에 취하니 영어가 술술 나왔다.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무엇인지 정리되지 않는 술주정이었다. 하지만 두 분은 다 들으시더니, 30년이 넘도록 한 가지 일을 해오면서 단 한 번도 다른 삶을 생각해본 적 없었다고 하시면서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자극을 추구하는 삶이 과연 좋은 삶인지 잘 모르겠다. 왜가리처럼 그저 매번 잘 노려서 잘 내리꽂으면 되는데...  


30일차 22.04km

Sarria Barbadelo Rente Marzán Leimán Peruscallo Morgade Ferreiros A Pena Moutrás A Parrocha Vilachá Portomarín

졸업여행을 산티아고로 가는 학생들
졸업여행을 산티아고로 가는 학생들

사리아는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마을이다. 프랑스에서 시작하는 프랑스길, 포르투갈에서 시작하는 포르투갈길, 스페인 북쪽 바다를 따라 걷는 북쪽길 등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사리아에서 만나, 산티아고드콤포스텔라까지 같은 길을 걷게 된다. 그래서 이곳에서부터는 필수 질문이 하나 늘어난다. “어디부터 걸었어?”

인구가 늘어난 또 다른 이유는, 순례를 짧게 하고 싶은 사람들이 이곳을 출발지점으로 삼기 때문이다. 가이드와 함께 단체로 걷는 무리, 어린 학생들이 수학여행 가듯 줄지어 이동하는 무리 가 자주 내 길을 막았다. 패키지 여행처럼 보이는 이들은 많은 소음을 만들어 내어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그리고 가는 숙소마다 모두 예약이 꽉 차 있어서 침대 구하는 일도 더 힘들어졌다. 

 

마지막으로 체크아웃하면 좋은 점 세 가지

사리아 알베르게 뒷편에 있던 마당
사리아 알베르게 뒷편에 있던 마당

 새벽 5시부터 일어나 걷기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늦게 걷는 것도 좋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 그 이유는 첫 째, 노래를 틀어놓고 남들 눈치 보지 않으며 실컷 부스럭거리며 짐을 쌀 수 있어서다. 새벽파들은 자는 사람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전 날 미리 짐을 싸고 잔다. 그런데 그러기 귀찮으니까, 느즈막히 일어나 여유를 즐기는 것도 좋다. 둘 째, 놓고 가는 물건이 없다. 화장실부터 침대주변까지 싹 비워져 있어서 뭐라도 있으면 단 번에 티가 난다. 나처럼 덜렁거리는 사람이라면 이 방법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셋 째, 냉장고에 남은 과일, 요거트 등을 아침으로 먹을 수 있다. 두고 간 음식들이 대부분이고, 간혹 유통기한이 하루 정도 지나있기도 하다. 돈도 아끼고 음식쓰레기도 줄일 수 있다. 이날도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제일 마지막으로 체크아웃을 했다.

사리아에 있는 벽화. 할아버지 대머리 걱정은 없으시겠어요.
사리아에 있는 벽화. 할아버지 대머리 걱정은 없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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