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크리스마스
2023년이 끝나간다. 새해가 오기 전 날씨가 좋은 스페인 남부로, 또 다시 여행을 떠났다. 이번에는 혼자 말고 남자친구랑! 한줄평을 하자면, 혼자하는 여행보다 조금 더 피곤했고 풍경은 조금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여행이랑 설렘이 만나면
두 번째 연애는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무렵 추석을 맞아 모처럼 집에 중국인 손님들이 방문했다. 산처럼 쌓여 있는 음식들을 3시간 동안 먹고 오랜만에 행복한 포만감을 느끼며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뮌헨으로 떠나는 기차를 탔다. 유럽 여행을 마친지 한 달밖에 안 됐지만 또 이렇게 여행길에 올랐다. 충동적으로 떠난 이유는 바로 옥토버페스토(세계 맥주축제)가 열리고 있기 때문! 고래가 보내준 독일 맥주 사진을 보는 순간, 이거 안 가면 크게 후회하겠다 싶었다. ‘고래’는 남자친구의 별명이다. 이름이 웨일이라서 일기를 쓸 때 고래라고 쓴다.
호러 영화를 좋아하세요…
고래는 동네 이웃으로 만났다. 첫 날 어쩌다 맥주 한 잔 하면서 친해졌고, 이튿 날 어쩌다 친구의 재즈공연을 같이 보러 가서 조금 더 친해졌고, 이틀 뒤 또 만나서 영화를 봤다. 평소와 같았다면 고래도 나도 절대 보지 않았을 공포영화 ‘더넌2’를…
왜 고래는 하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장르를 딱 골라서 “Do you like horror movie?”라고 물었을까. 오리지널도 아니고 ‘더넌2‘라니, 그래서 더 재미없던 걸지도 모르겠다. 자꾸 깜짝 놀래키는 장면들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내가 놀라서 움찔거리자 고래는 귓속말로 무섭냐고 물어왔다. 순간 살짝 고민했다. ‘무서운 척 연기를 해야 하나…이걸 바라고 호러를 택했나…’ 하여튼 이렇게 세 번을 만나고 우리는 가볍게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남자친구라고 소개할 순 없지만 ‘I’m seeing someone.‘이라고 답할 수 있는 정도의 사이.
뮌헨 여행은 우리가 만난 지 2주가 지났을 때였다. 새벽에 도착해 숙소인가 텐트인가에서 한숨 자고, 다음 날 국립 독일 박물관에서 고래를 만났다. 그는 일주일 전부터 뮌헨에 머물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어색하게 비주를 주고 받았다. 아직까지는 수줍, 수줍.
고래가 물가 높다고 소문난 뮌헨을 자주, 편하게 방문하는 이유는 친형이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정보에 따르면 뮌헨은 GDP가 다른 지역보다 높다. 한국의 울산같은 도시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울산에 현대차가 있듯 뮌헨엔 BMW와 아우디 벤츠가 거리에 깔렸다.
우리는 어색함을 덜어내려고자 박물관 내용에 집중했다. 뮌헨 도시답게 과학과 기술을 쉽게 안내하고 있어서 흥미롭긴 했다. 분야별로 다른 컨셉을 갖고 있었고, 규모도 큰 편이라 2시간 정도 둘러봤지만 다 보지 못 했다. 나는 평소와 같이 쉬운 정보들을 유심히 관찰했는데, 그 옆에서 고래는 내가 과학에 관심이 되게 많은 줄 알고 이것 저것 설명해주려 애썼다. 과학기술이 어떤 역사 속에서 발달하였는지, 그 원리는 무엇인지 등… 영어로 이걸 다 이해하고, 감상평까지 주고 받기엔 좀 무리였다.
맥주는 사랑을 싣고
저녁이 되어, 옥토버페스트가 열리는 광장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내가 예상했던 모습과 전혀 달랐다. 술 축제임에 불구하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가족들이 많았고, 범퍼카와 디스코팡팡, 바이킹, 자이로드롭과 같은 놀이기구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하루종일 걸은 터라 나는 시작부터 맥주가 간절했다. 그래서 고래에게 내가 바라던 맥주는 어디에도 없다고 의아하다는 듯 (평소라면 투덜댔겠지만) 물었다. 그러자 그는 곧 볼 수 있다며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바로 맥주 마시는 대형 창고로! 으갸갸갸. 들어 서는 순간 입이 딱 벌어졌다.
들어서는 순간 가득찬 인파로 놀라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에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이곳을 어떻게 혼자 놀러올 생각을 했을까. 우리는 사람들을 뚫고 두 바퀴를 돌았지만, 결국 빈자리를 찾지 못 해 정작 맥주 축제에서 맥주를 마시진 못 했다.
대신 수많은 인파들 사이를 요리 조리 걷다 롤러코스터를 홧김에 타고, 길가에서 파는 맥주와 칵테일을 섞어 마셨다. 맥주가 싱싱해서 그런가 잘 취하지도 않았다. 그러는 사이 거리에 사람들은 점점 많아졌다. 고래는 수시로 뒤를 돌아보며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다 보다못한 내가 먼저 손을 잡았다. 날 챙기는 그가 안쓰러 보이기도 했고, 따라가기 불편하기도 했고, 손을 잡고 싶기도 했고… 아무튼 그는 기다렸다는 듯 깍지를 제대로? 끼고 걷는 데 속도를 냈다.
사실 고래는 내가 오기 전 파리로 출발하는 비행기 티켓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금 더 휴가를 냈다. 그가 남아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혼자 놀았다면 정말 노잼이었을 거다. 혼자 고깃집에서 고기는 구워봤어도 혼자 놀이공원에서 맥주를 마시는 건… 아직까진 무리다.
입털고 싶을 때 만나는 동네 친구
여행을 다녀와서도 우리는 일주일에 세 번씩 꾸준히 만났다. 데이트가 끝날 무렵 그는 먼저 나의 일정을 물어왔다. 그런 뒤 곧바로 다음 약속을 정했다. J가 분명하다.
주로 평일은 저녁 9시까지 클로에를 돌보고 동네에 있는 바에서 만나 맥주를 마셨다. 걸어서 오고갈 수 있는 이웃이라 늦은 시간에 만나도 부담이 없었다. 그는 늘 만나면 “How was your day? 오늘 하루 어땠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럼 나는 일일업무를 보고하듯 ”학원가고, 도서관가고, 클로에 돌봤지.”라고 답했다. 특별할 것 없었던 오늘 하루를 어제와 다르게 이야기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매일 하다보니 이제는 보다 자연스러워졌다. 어제와 비슷해보여도 매일 좋은 점은 하나씩 있었다. 덕분에 내 다이나믹한 일상도 안정을 찾았다. 한 번은 그게 고마워서 “언제나 나의 하루를 물어봐주어서 고마워.”라고 표현했다. 그러자 그는 ”No problem. I’m so interested in your day.“ 짧고 간결하게 답했다.
서로 안부를 주고 받은 뒤 대화는 다양한 주제로 뻗어 나갔다. 과학(ChatGPT 경험 얘기하기), 종교(무슬림이랑 기독교 비교하기), 전쟁(가자지구와 이스라엘 피해상황 알기), 정치(파리의 사건 사고 알기), 라이프(각자 나라의 문화 비교하기, 삶에 대한 가치관 얘기하기) 등. 간혹 구글번역기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치열하게 얘기했다. 뇌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 뇔뇔뇔, 상대의 말을 자를 정도로 « But..! The thing is…@^@&# See? Now you agree! ».
그와 하는 대화는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의 생각이 다를 때는 그 이유가 궁금해지고, 반대로 같을 때면 공감되어 기분이 좋아졌다. 국적이 다르다는 건 그만큼 대화를 많이 하게 만든다. 섣불리 상대방의 생각을 짐작하지 않고 상대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게 만든다. 그리고 상대의 비언어적 표현까지 살피게 한다.
D-730
하지만 언젠가 헤어질 사이임을 알고 있다. 우리는 그냥 « seeing someone » 관계에서 앞으로 더 나가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사랑을 믿느냐는 질문에 사강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농담하세요? 제가 믿는 건 열정이에요. 그 이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사랑은 이 년 이상 안 갑니다. 좋아요, 삼 년이라고 해 두죠.“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데 동의한다. 고래와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리가 존재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며 과한 집착 또한 없다. 상대에 대해 기대하지 않고, 함께 하는 미래를 계획하지 않는 거다.
그러니 훌쩍 떠나버리는 ‘여행’에서 그 순간을 최대한 만끽하려는 것처럼 ‘사랑’도 오늘이라는 시간 안에서 행복을 만끽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 오늘 나의 한 끼를 챙기기도 버거운 상황이라, 뮌헨에서 마셨던 시원한 맥주와 수다 한 뼘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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