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05

또 떨어져서 알게 된 것

2023.12.05 | 조회 2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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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우쟁

파리로 떠난 우정의 일기를 메일로 보내드립니다.

아무래도 우리랑 같이 일하기에는 지금은 조금 어려울 것 같아요

마지막 날 먹었던 점심, 치킨마요덮밥
마지막 날 먹었던 점심, 치킨마요덮밥

치킨집에서 3일을 인턴으로 근무하고 또 다시 또르륵 떨어졌다. '주도적으로 일을 어느정도 잡고 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다보니 어렵겠어요.' 문자 내용은 친절했다. 그럼에도 그 순간, '아 내가 뭘 그렇게 못 했을까'하는 자괴감을 느꼈다. 

아침에는 학원수업을 듣고, 저녁에는 클로에를 돌봐야 한다. 그러므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적이다. 무리하게 수업 중간에 일찍 나오는 방법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그러다 정작 중요한 불어를 놓칠까 두려웠다. 일하다 기진맥진해서 공부에 소홀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12월에 스페인으로, 2월에 이집트로 여행을 간다. 비행기 티켓이 워낙 싸서 다 사 놨다. 스페인은 편도 28유로(4만 원), 이집트는 편도 110유로(15만 원). 그러니 일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든 건 '나'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빡치는 건 빡친다고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한국이었다면 누군가에게 벙개를 쳐서 마시고 죽자며 스트레스를 풀텐데 여기는 프랑스. 쎄 빠 파시블르. 인스타그램에서 하트라도 받아보자는 심정으로 불합격 문자를 캡쳐해 올렸다.

스토리를 올림과 동시에, 어학원에서 만난 친구 비디가 “아니 왜! 네가 왜 떨어져!”라고 호들갑을 떨며 연락을 해왔다. 상황을 공유하자 비디는 나를 대신해 실컷 화를 내 주었다. 그게 그렇게 속이 시원했다. 

WTF
WTF

한결 기분을 풀고 저녁 6시가 되어, 클로에를 픽업했다. 클로에는 저녁을 먹는 동안 내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눈치를 챈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놨다. “일자리 잃었어. 프랑스어를 못 해서 말이지…” 그러자 클로에는 프랑스어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멀뚱멀뚱 듣다가 구글 번역기를 켰다.  

똑똑한 클로에. 그래 네가 맞아.
똑똑한 클로에. 그래 네가 맞아.

다른 직업을 구하면 된다는,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 크게 위로가 됐다. 이어서 늦은 밤, 기분도 풀겸 남자친구와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횡단보도 앞에서 나는 그를 보고 'A gauche 왼쪽이야'라고 문자를 보냈다. 사실은 오른쪽이지만 내가 'A droite 오른쪽'이란 단어랑 헷갈렸다. 두리번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웃음이 났다. 별것도 아닌데 울적한 마음이 그거 하나로 좀 풀렸다.

우리는 마을에 있는 바에 들어가 제일 비싼, 제일 도수가 높은 맥주를 시켰다. 맛좋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니 살 것 같았다. 이 친구는 나보다 7살이 어린데 꽤나 묵직하다. 우왕좌왕하지 않고 한결같아서 대화를 하고나면 왠지 모르게 안정을 되찾게 된다. 

맥주 사주는 친구가 최고.
맥주 사주는 친구가 최고.

그는 내 상황을 다 들어준 후, 자기가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 이야기를 들려줬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가난하고 힘든 학생시절이었으나 자기 선택에 대한 확신이 있었으므로 그냥 버텼다고… 아무튼 다 들은 뒤 나는 말 없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생 많았네...' (밤톨이 머리라 쓰다듬기 좋다)

그는 계속해서 나를 응원했다. “다음주에 있을 또 다른 면접을 열심히 준비하면 돼! 그게 더 너랑 맞는 직업일 것 같아.“ 그렇다. 나는 다음주 주말에 자전거 투어 가이드 면접이 잡혀있다. 페이도 괜찮고 팁도 받을 수 있다. 그는 내 성격과도 잘 맞는 일일 것 같다고 오히려 잘 된 걸 수도 있다고 위로했다.

사진만 봐도 또 침이... 꼴깍꼴깍
사진만 봐도 또 침이... 꼴깍꼴깍

먹는 걸로 팍팍 힘을 준 친구도 있었다. 파리에서 유학중인 여진이. 내가 걱정되었는지 스토리를 보고 폭풍 메시지를 보냈다. ’먹고 싶은 게 뭐야?‘ ’집에 와인이랑 준비해둘테니 가볍게 몸만 와.‘ ’언제 시간 돼?…‘ 연락을 받자마자 또 눈물이 핑 돌았다. 무슨 복을 타고 난 것인가.

사실 알바 떨어진 게 그렇게 큰일은 아니다. 큰 지출 없이 6개월 동안 여행 실컷 하고, 불어 실컷 공부하고, 연애도 실컷 하면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끔 일이 잘 안 풀릴 때가 있는 법. 내가 힘들다면 힘든 거다. 주저 않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이토록 힘든 순간에 대접해주는 한 끼의 식사가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 이래서 한국인은 밥심이라 하나보다. 너무 고마운 마음에 어찌 표현할 길이 없어 고맙다는 말만 계속했다. 그때마다 여진이는 자기도 누군가에게 밥을 얻어 먹었다며 맛있게 먹어주어 오히려 기쁘다고 했다. 언젠가 나도 여유가 생긴다면 누군가에게 한식 한 끼를 해줄 수 있을까. 그 전에 요리를 좀 배워놔야겠다. 아니 그 전에 일단 내게 응원을 보내준 친구들에게 근사한 밥 한 끼 살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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