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가요? 아니면 불행한가요?
파리로 떠나기 전, 내게는 두 가지 기도 제목이 있었다. ‘이제는 제발 연애하게 해주세요.’와 ’원 없이 여행하고 싶어요‘. 이것만 이루면 더 없이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그로부터 반년이 흘러, 기도는 세게 먹혔다. 일기가 온통 두근거리는 이야기로 가득하고, 유럽을 부산 가듯 뻔질나게 여행했다.
이쯤이면 “나 너무 행복해!”라고 외칠만도 하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불행했다. 행복이 무슨 월급 통장인 마냥 나를 아주 잠깐 스쳐갔다. 태풍이 불어닥친 지난 밤, 그 때도 여행 중임에 불구하고 우울했다. 호스텔 방에 앉아 그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부족한 게 없는데 나는 왜 만족을 못 하는 걸까. 그러다 번쩍, 불행이 ‘부족한 것’으로부터 온다는 생각부터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나이 들수록 잘 산 것 같지가 않다. 나는 오만했고 이기적이었으며 그래서 당연히 실수투성이였다. … 부끄러움을 견디며 오늘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내가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인 덕분이다. 친구들은 나를 반성주의자 또는 성장애주의자라고 부른다. 반성하고 성장하는 것이 내 특기라나 뭐라나. 잘하는 것이라곤 그 둘뿐이다. 그나마라도 그럭저럭 해내고 있으니 천만다행 아닌가. 그렇게 자위하며 살았다. 돌이켜보니 거기서부터 문제였다. … 쉰 넘어서야 깨닫고 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행복도 아름다움도 거기 있지 않다는 것을.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성장을 막았다는 것을.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깃발 놀이
서른을 넘긴 지도 벌써 3년이다. 이제 주변 사람들은 각자 어느 정도 목표한 지점에 깃발을 꽂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흔들림 없이 버텨가며, 깃발이 더 단단히 박히도록 망치질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매일 똑같은 망치질을 하면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인지, 나는 그들이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나 또한 그들처럼 굳건하게 서 있고 싶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버티고 버텨도 끝내 방법을 찾지 못 했다. 내 행복은 깃발을 꽂으러 가는 과정에만 존재했다. 저 만치에 목표지점을 세우고 그곳을 향해 돌진하는 것만 즐길 줄 알았다. 그래서 기껏 달려서 깃발을 꽂고 나면 그동안의 노력이 무색하게 다시 그걸 빼들었다. 처음부터 또 뜀박질을 해야 하는 무모한 짓인 걸 알면서도 기어코 뽑아 제꼈다. 했던 고생을 또 하면서… 수없이 후회했다. 망치질을 조금이라도 더 하고… 그러니까 월급 몇 달만 더 받고… 나올 걸...
나도 알고 있다.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 느끼는 것만이 행복은 아니라는 것을. 멈춰서서 행복할 줄도 알아야 어른이 된다는 것을. 하지만 불행한 것을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불행을 느끼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목표로 삼았던 ‘연애’와 ‘여행’에 도달해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또 다른 목표 지점을 찾는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서.
당신에게도 고도가 오기를
사람들마다 ‘행복’을 다르게 정의한다. 그래선가 더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있고, 더 불행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행복에 정답이 있을까? 우위가 있을까?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처럼 영영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건 아닐까?
이래도 저래도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공연한 거라도 찾으려 질문 해보고, 지금 이 자리에서 뭘해야 하는가를 따지고 또 시도해 보면서, 그저 뭔지도 모르면서 기다리는 게 행복인 것 같다. 올해 내가 달릴 곳은 ‘능숙한 불어’와 ‘대학원 진학’이다. 행복을 계산할 시간에,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해야겠다. 우리 다 같이 고도를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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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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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우쟁
아이 러뷰 쏘마취! 라니 댓글 다는 재미도 솔솔하구만 :) 대학원은 준비된 게 하나도 없어서 부끄럽지만 이렇게 질러놓고 나면 중간은 가겠지! 진짜 멋있어지도록 힘써야겠구만 응원 고마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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