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6
구독자에게
예은으로부터 4호
하와이의 두번째 이야기를 보냅니다.
⌜ 그러므로 그녀들에게 뒤에서부터 추월을 당해도 별로 분하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녀들에게는 그녀들에게 어울리는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나에게는 나에게 적합한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그것들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며,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한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20년이 넘게 매일 장거리 달리기를 하며 떠오르던 ‘달리기’에 대한 에세이다. 작가는 러닝에 대해 힘들다, 재밌다, 짜증난다 등 여러 코멘트를 붙인다. 한편 그는 20년동안 매일 아침마다 해온 장거리 레이스가 결코 누군가와의 경쟁이 아닌 스스로와의 대화 였음을 회고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코코헤드를 올라갈 때 스스로 느꼈던 감정 혹은 요가매트에서 아사나와 명상을 할 때, 혹은 비행기에서 동료들과 일 할 때를 떠올린다. 누군가 나보다 앞서거나 잘하고 있을 때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경쟁 의식이 들곤 했다. "요가는 경쟁이 아니에요." 혹은 "명상은 경쟁이 아니에요." 요가원 원장선생님의 말을 듣고서야 아, 맞아! 하고 반성한다. 사실 경쟁 할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이지만. 나도 모르게 경쟁의식은 발동한다.
코코헤드의 야간 하이킹 중에도 그렇다. 나보다 먼저 앞서 있던 두개의 랜턴 불빛이 점점 가까워질 수록 ‘정상이 얼마 안 남았다.’ 라는 생각보다 ‘아싸. 내가 더 빠르고 대단해’ 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유치하겠지만. 사실이다. 그러다 불빛이 또 나로부터 한참 멀어진다. 아 언제 따라잡지? 미간이 구겨진다. 산 줄기의 경사가 최고에 이르러서야 경쟁심은 사라진다. 힘들어 죽겠을 땐 잡생각이 떠오를 여유도, 겨를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묵묵히 걷는다.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무슨 생각을 해. 그냥 걷는 거지. (김연아의 올림픽 경기 전, 스트레칭 명언이다.)
나보다 앞서 간 불빛을 경쟁상대가 아닌 내가 얼마나 더 가야할 지 알려주는 이정표 같은 존재로 그저 본다. 생각 없이 본다. 본능적으로 떠오르던 경쟁 의식을 마음에서 한번 거두어 낸다. 뿌연 안개가 걷혀 상쾌한 하늘을 맞이한 것 같은 마음. 쾌청하다. 그렇게 편안함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남을 신경 쓰던 나로부터 자유를 얻은 셈이다. 종국에 내 뒤로 줄 지어 올라오는 하이커들의 불빛에게 나 또한 경쟁 상대 혹은 이정표가 되려나? 생각한다. 나를 경쟁 상대 보단 이정표로 여겨 주길. 그런 마음을 지닌 채 나는 규칙적인 발걸음으로 계단 하나하나를 밟아 오른다.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어주는 건 어느 세계에서나 나를 살아있게 만든다.
숨이 붙어있는 모든 것은 각자의 삶에 맞는 박자를 지닌 채 태어난다. 사람은 물론 쌍둥이 판다 루이바오와 후이바오, 심지어 집 정원에 뿌린 방울토마토 씨앗도 예외는 아니다. 몇년 동안 작은 텃밭을 관리하며 깨달았다. 한 날 한시에 흙을 파내어 종자를 심어도, 새싹이 움트는 날은 씨앗 마다 다르다. 설사 새싹이 같은 날 제 모습을 보였더라도 줄기가 뻗어지는 속도가 다르고 열매 맺는 날도 다르다. 마른 잎으로 제 숨을 거두는 날마저. 생애의 하이라이트가 오는 시점은 모두 다르다. 한마디로 모든 생명은 어느 것 하나 똑같이 자라 똑같이 제 숨을 거두는 법이 없다. 그 개체의 크기가 작던 크던, 더 빨리 이 세상에 뿌리 내렸던 싹이 늦게 나왔던. 상관 없다. 그저 제것의 페이스와 박자가 있다. 삶의 메트로놈 같은 것.
사람은 ‘압-빠. 엄-마!’를 옹알거리는 그 시점부터 끝없는 경쟁 사회에 진입한다. 태어난 지 열두달 채 되지 않은 어린 아기도 옹알이를 언제 시작했는지, 우리 아기가 다른 아기보다 더 빠른지 느린지를 주목한다. 그때부터 살아가는 모든 순간마다 96년생(내가 96년생이니)들과 같은 박자로 살아가는지, 느린지 빠른지를 타인과 비교할 수 밖에 없다. 수험생일 때는 내가 15학번(2015년도 수능)으로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 사실, 16학번이 되던 17학번이 되던, 기업 면접장에서 다 똑같은 지원자일텐데. 그때는 또래보다 한해 늦게 입학하는 것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원하던 15학번을 달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또다시 졸업시기, 즉 취업 시기를 신경쓴다. 직장에 들어와서는 또다시 직장 동료들과. 또다시 결혼을 언제 하는지. 아이를 언제 낳는지. 부모가 되었을 땐 또다시 우리 아이의 옹알이를…
그러다보면 나도 모르게 매순간 나의 속도를 누군가와 비교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그 과정에서 내가 더 잘나간다는 희열을 느낀다. 내가 느릴 땐 나, 나의 부모, 형제, 친구, 자녀가 더 늦다는 좌절감과 질투에 사로잡힌다.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도 그렇다.다만, 스물 아홉(아직 어린 나이지만)에 들어서야 깨달은 점은 인생은 결코 나를 무조건 1등으로 달리게 해주거나 꼴찌로 뒤쳐지게만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내 삶의 속도가 빠르거나 느리다고 평가 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 결국 어딘가를 향해 달리고, 오르고, 걷는 그 여정에서 내가 몇등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정을 나만의 속도로 끝까지 완주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할 뿐.
코코헤드 정상에 오른 새벽 6시 12분. 해가 떠 오르려면 아직 30분 정도 남았다. 분화구의 울퉁불퉁한 돌 위에 털썩 주저 앉는다. 옆자리에 나보다 먼저 산행을 시작한 사람 둘. 그리고 또다시 내 옆 빈자리로 나의 불빛을 따라 걷던 사람들이 하나 둘 앉기 시작한다. 그래. 결국, 속도는 중요하지 않아. 여정을 완주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앉아 그렇게 떠오르는 해를 한참 바라본다. 산을 내려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 앞서 말했듯, 먼저 올라왔다고 먼저 내려가야하는 법은 없다. 일출을 한참 보던 모든 이들이 각자 내려가고 싶을 때, 저 밑으로 다시 내려가야 할 시기가 되었을 때 제 여정을 다시 시작한다.
산에서 완전히 내려와 운동화 발치에 묻은 흙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나는 생각한다. 삶의 속도에 대한 에피소드가 흔해 빠졌을지 몰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를 꼭 나만의 언어로 기록하고 싶다고. 그리하여 제 삶의 속도를 고민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꼭 응원과 위로를 보내주고 싶다고 말이다. 그게 오로지 나 한사람일지라도!
Question . 여정 중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때.
결국은 완주했던 경험이 있나요?
Answer . 혼자 생각해보기, 글로 써보기, 예은에게 보내주기 등등..
그럼, 다섯번째 편지에서 만나요 :)
24년 01월 06일 토요일.
예은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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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슈
이번 글 좋다. I lik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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