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초장레터의두 열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초장레터는 매월 셋째 수요일에 [지구가 보내는 SOS]와 [지구를 구하는 히든 히어로들]이라는 주제로 뉴스 한 조각과 영감 한 스푼을 전해드립니다. 오늘은 지난 호에 이어 플라스틱 시대의 탄생 4편을 준비했어요. 함께 읽으며 지구를 위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작은 변화를 고민해 보면 어떨까요?
초장레터#12
3편에서 1960년대 플라스틱이 우리 일상을 완전히 점령하는 놀라운 이야기, 어떠셨나요? 일회용품부터 장난감, 자동차까지... 모든 것이 플라스틱으로 바뀌어가던 그 화려했던 시절. 하지만 1969년 여름, 북대서양에서 발견된 작고 하얀 조각들이 곧 모든 것을 바꿔놓을 거라고는 그때만 해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바다에서 온 첫 번째 경고
1972년 3월 17일, 권위 있는 과학 저널 Science에 충격적인 논문 하나가 게재됐어요. 우즈홀 해양연구소의 에드워드 카펜터(Edward J. Carpenter)와 K.L. 스미스 주니어가 사르가소해 표면에서 발견한 플라스틱 조각들에 관한 연구였죠.

연구팀은 1971년 대서양 조사에서 평방킬로미터당 평균 3,500개의 플라스틱 조각을 발견했다고 보고했어요. 무게로는 평방킬로미터당 최대 290그램에 달했죠. 당시만 해도 학계의 반응은 미지근했지만, 이것이 해양 플라스틱 오염 연구의 역사적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발견이 세상에 미칠 파장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플라스틱은 여전히 "현대 문명의 상징"이었고, 바다는 워낙 넓으니까 큰 문제가 될 리 없다고 모두가 생각했거든요.
석유파동이 가져온 첫 번째 타격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터지면서 석유 가격이 5개월 사이 4배나 폭등했어요. 석유 기반 플라스틱 업계에도 직격탄이 날아왔습니다. 원료 공급 부족으로 주요 수지 회사들이 고객을 돌려보내는 상황까지 발생했죠.

업계는 위기에 대응해 재활용과 효율성 개선에 주력했어요. 그동안 버려지던 생산 과정의 플라스틱 스크랩을 재활용하는 기술이 갑자기 화제가 되었고, 컴퓨터 제어를 통한 폐기물 방지 기술도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소비자들의 인식에 변화가 생겼어요. "플라스틱은 석유 낭비"라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한 거죠. 1960년대 "한 번 쓰고 버리는 게 최고"라던 광고 카피가 이제는 "자원 낭비의 상징"으로 비춰지기 시작했어요.
환경운동의 등장, "지구의 날"과 플라스틱
1970년 4월 22일 첫 번째 지구의 날에는 전 미국에서 2천만 명이 참가한 역사상 최대 규모의 환경 시위가 벌어졌어요. 이 시위에서 일회용 플라스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플라스틱 보이콧 운동"이 확산됐어요. 시애틀 커피숍들에서는 학생들이 자신의 머그컵을 들고 와서 커피를 마시는 게 하나의 트렌드가 됐을 정도였어요.
1971년 오리건주가 전 세계 최초로 "음료 용기법(Bottle Bill)"을 통과시켰어요. 이 법은 1972년 10월부터 시행되어 맥주와 탄산음료 용기에 보증금을 부과했죠. 당시에는 플라스틱 음료수병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유리병과 캔이 대상이었지만, 환경을 위한 규제의 시초가 된 셈이에요.
새로운 기술의 등장, 그러나 한계도 함께
환경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서도 플라스틱 기술 발전은 계속됐어요. 1978년 코카콜라가 2리터 PET 플라스틱병을 도입하면서 음료 포장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PET병은 유리병보다 훨씬 가벼우면서도 탄산을 완벽하게 보존할 수 있었거든요.

이 시기부터 본격적인 플라스틱 재활용 기술 개발도 시작됐어요. 처음에는 기술적 한계가 많았지만, "버리는 플라스틱도 자원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은 분명했어요.
생분해성 플라스틱 연구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습니다. 1975년 일본 과학자들이 나일론을 분해할 수 있는 박테리아를 발견하면서 "썩는 플라스틱"에 대한 연구의 문이 열렸죠. 오카다 히데토, 네고로 세이지 연구팀은 나일론 공장 폐수 연못에서 Flavobacterium sp. K172라는 박테리아가 나일론 부산물을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이 박테리아는 1935년 나일론 발명 이전까지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히 인공적인 화합물을 분해할 수 있는 새로운 효소들을 진화시켰습니다. 이는 "플라스틱도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개념적 가능성을 제시한 중요한 발견이었어요.
하지만 이것이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어요. 생분해성 플라스틱은 특정 조건에서만 분해되고, 산업용 퇴비화 시설이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거든요. 일반 매립지나 해양 환경에서는 기존 플라스틱과 비슷하게 수십 년간 남아있을 수 있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생산 비용이 기존 플라스틱보다 훨씬 높았고, 재활용 시스템에서는 오히려 기존 플라스틱 재활용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문제점도 발견됐어요.
규제의 시작, 산업계의 대응
1976년 미국에서 "독성물질관리법(TSCA)"이 제정되면서, 새로운 플라스틱 첨가제들에 대한 안전성 검사가 의무화됐어요. 특히 PVC 플라스틱에 쓰이는 가소제들이 집중 조사 대상이 됐죠.
업계는 처음에는 강력히 반발했어요. "과도한 규제가 혁신을 막는다"며 로비에 나섰지만, 동시에 "더 안전한 플라스틱" 개발에도 투자를 늘리기 시작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는 전략이었어요.
두 번째 충격, 1979년 이란 혁명
1979년 말, 플라스틱 업계는 또 다른 위기에 직면했어요. 이란 혁명으로 인한 제2차 석유파동이 시작된 거죠. 1970년대 내내 계속된 환경 우려, 규제 강화, 원료비 상승... 1960년대의 무한 성장 신화는 이미 옛 이야기가 돼버린 것 같았어요.
하지만 플라스틱 업계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더 효율적인 생산 방식, 재활용 기술, 새로운 용도 개발에 매진했죠. 1970년대는 플라스틱 산업의 첫 번째 시련기이자 동시에 환경 친화적 기술 개발의 출발점이 된 셈이에요.
비록 생분해성 플라스틱의 한계가 명확했고, 재활용 기술도 아직 초기 단계였지만, 이 시기의 연구들은 환경 친화적 플라스틱 개발 연구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어요. 완벽한 해결책까지는 갈 길이 멀었지만, 적어도 문제 해결의 방향성은 제시된 셈이죠.
모든 게 불확실해 보였던 그때, 바로 태평양 건너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혁신이 막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작은 섬나라 일본에서 개발된 어떤 기술이 곧 플라스틱 산업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게 될 거라고는, 그때만 해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죠.
다음 편에서는 1980년대, 플라스틱이 다시 한 번 세상을 놀라게 만든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 함께 쓰는 지구 일기
함께 쓰는 지구 일기의 여섯 번째 주인공은 Hoze @colnium 님이에요. 스스로를 '빨간약을 먹고 속 편하게 살 수 없게 되었다'고 소개해 주셨는데요, Hoze 님은 인스타그램에 플로깅 기록을 꾸준히 업로드하며 스스로 환경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실천하고 있어요. 어떤 계기로 이런 실천들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직접 그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해결책이 없는 "기후 불안"에서 살아남기
저는 “다음 세대”를 걱정하는 사람입니다. 예전에는 “인간의 다음 세대”만 생각했다면 지금은 “지구의 다음 세대”를 걱정하는 중입니다.
처음 시작은 대학 교양수업으로 들은, 지금은 수업 명도 기억나지 않는 환경 수업이었습니다. 교수님의 결론은 “인구수”였습니다. 당시 60억 인구를 기준으로 나오는 오물과 폐기물이 토양과 수질 오염의 주범이라고 했던 게 생각납니다. 그러나 그때의 저는 환경보다는 “내가 돈을 벌면 불우한 아이들에게 기부를 해야지.”라는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이타심이 있었습니다.
저는 경제 활동을 시작하며 월급의 10%를 불우한 아이들에게 기부를 했고 그렇게 약 4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사회적, 개인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 “인간”이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싫어지니 안 좋은 점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같이 쌓여있는 종량제봉투 무더기, 분리수거가 안 된 각종 쓰레기들, 눈처럼 뿌려진 담배꽁초, 여기저기 버려진 비양심의 흔적들…
그리고 과학유튜브 채널에서 다뤄지는 환경문제 이슈들, 이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 섞이면서 “아이들을 위해선 지구를 살려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후 바로 아이들에게 기부하던 10%를 환경단체 여러 곳에 기부했고 잠시나마 마음의 안식을 얻었습니다.

24년 초, 문득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 라는 문장이 뇌리를 스쳐갔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문장은 저를 행동하게 만들었고 12월 처음으로 환경 단체 오프라인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그 후로 출퇴근길이나 운동 후 쓰줍을 하게 되었고 등산 할 때도 꼭 집게와 비닐을 챙기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너무 많은 정보의 습득으로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은 확률적 미래에 대한 불안이 일상 생활에 우울을 만들어내고 있어, 정보를 차단하고 행동만 하려고 노력중입니다.

🌿 Hoze 님은 최근에 기후우울증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는 개인적인 고백도 들려주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을 해내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함께 쓰는 지구 일기는 이렇게 스스로는 특별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꾸준히 일상에서 작은 실천을 이어가는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소소한 노력들이 모여 우리 모두가 조금이나마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요. 다음 주인공은 구독자님이 되시길 바라며, 여러분의 이야기도 기다리고 있을게요. 💚
🌱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의 여섯 번째 주인공은 @Pympigs 님이에요. 이번 주인공은 12년의 추억이 담긴 셔츠를 소개해주셨는데요, 옷을 되게 오랫동안 잘 관리해서 입으신다고 하더라구요. 다음엔 옷을 관리하는 비법도 들어볼 수 있길 바라며, 오늘 소개해주신 옷에는 어떤 사연이 담겼는지 한 번 들어볼까요? 😊
멋쟁이 아빠가 탄식하며 사준 추억의 셔츠
이 파스텔 체크무늬 코튼 셔츠는 2013년 이전에 구입한 100% 코튼 소재의 스탠다드 핏 셔츠입니다. 2013년도에 입고 찍은 사진을 보니 벌써 12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네요.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디자인이라 유행을 타지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이 셔츠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셔츠에는 특별한 추억이 담겨 있어요. 굉장한 멋쟁이이신 아빠와 함께 백화점에 갔을 때, "넌 일부러 그러고 나오냐"라며 직접 골라주신 옷이거든요. 좋은 옷을 사서 기본 십년을 입으시는 아빠가 선택해주신 덕분인지, 자주 입었는데도 보풀 하나 없고 단추도 여전히 튼튼하게 잘 박혀있습니다.
가을, 겨울, 초봄까지 매년 꺼내 입는 이 셔츠는 주름도 잘 가지 않고 색감도 여전히 예뻐서 앞으로 십년은 더 입고 싶어요. 아빠께서 골라주신 이 옷을 입으면서 저 나름 멋을 부리고 다녔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사랑받는 옷이 되었네요.
아빠, 항상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 나름 멋 부리고 다닌거에요!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은 여러분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건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의 오랜 시간이 담긴 물건의 이야기를 나누며, 물건을 애정하는 방법을 함께 배워봐요!
오늘도 함께해 줘서 고마워요! 초장레터를 다 읽으셨다면, 메일함에서 삭제해 주세요. 메일함을 정리하면 데이터 센터의 에너지 사용을 줄여 탄소 배출 감소에 도움이 됩니다. 나중에 또 읽고 싶으시다면, 언제든 초장레터 홈에서 다시 확인하실 수 있어요. 😊
아래 버튼을 누르고 초장레터의 후기를 자유롭게 남겨 주세요. 더 좋은 콘텐츠로 보답 드릴게요💚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