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번 국도를 타고 느리게 이동 중이었다. 새벽 2시쯤이라고 시계가 소식을 전했다. 칠흑 같은 어둠, 검은색보다 더 진한 밤이 주위를 완전히 감싼 곳에서 나는 목적 없는 여행을 도모하고 있었다. 전조등을 최대한 상향시켜놓고 구부러진 길을 따라 왼쪽으로 다시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며 가능한 모든 집중을 앞쪽으로 쏟아붓고 있었지만, 도저히 집중하기 힘들었다.
나는 왜 이곳에 있을까. 대체 어디로 가려고 모든 인간이 사라져버렸을 것 같은 심야시간에 이 낯선 공간을 통과 중일까. 궁금했지만 가끔 그런 의미 없는 생각이 불쑥 주위를 산만하게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머리를 최대한 앞쪽으로 숙여가며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곳을 의지할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오른쪽 도로 위로 한 사람이 보였다. 최대한 천천히 움직이는 중이라, 초행길이기도 몇 년 만에 운전을 시작한 탓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피곤한 탓에 그 장면을 허상이라고 여겨버릴 것은 아니었으리라. 나는 50미터쯤 지난 후에 차를 갓길에 서서히 멈추어두곤, 사실 갓길과 도로의 구분이 무색할 정도로 허술한 곳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차를 정차해두고 백미러로 내가 본 것이 헛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려 했다.
한 사람이 우두커니 걸어오고 있었다. 아니 한 남자였다 그 형상은. 그 남자는 검은색 재킷, 청바지 그리고 등에 작은 배낭을 메고 있었지만, 빈약하기만 한 크기로 짐작하건대, 그 속엔 도대체 무엇이 들었을지는 몰라도 간단한 속옷 정도가 전부일 거라는 사실. 그 사실 하나는 크게 추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백미러로 수상쩍은 그 남자를 잠시 바라보다, 남자를 차에 태워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때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사실 지금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와 나 사이에 어떤 우연한 고리가 연결되어 있는 건 아닐까, 오해했던 것 같다.
나는 차를 후진시키다, 그 남자의 오른쪽으로 닿을 무렵 정지시켰다. 그리고 창문을 내리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같은 방향이면 태워드릴까요?” 내가 차를 멈춘 것은 그를 태워주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 분명했으므로 그에게 이런 제안을 내리기까지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건 사실이었으나 이렇게 노골적인 제안을 던져버리는 나에게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남자는 보행을 멈추고 고개를 숙이더니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나와 그 사이에 석연찮은 공기가 잠시 흘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차 안이 궁금하지도 않은 것처럼 오직 내 얼굴만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는 잠시 후, 아무런 말 없이 뒷문을 열었다. 그리곤 침착하게 자신의 배낭을 얌전하게 올려놓곤 마치 시간이 멎은 것처럼 느리게 뒷문을 닫았다. 그러더니 잠시 서서 다시 나를 주시하다, 앞문을 열고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곤 어디로 가든지 가는 방향까지만 신세를 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혼자 떠들기 시작했다. 말없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지나치게 공포를 환기시키는 것 같았기에.
나는 다시 회전이 심한 길을 운전하기 시작했다. 5분 전과 다름없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쏠려가며 가로등조차 하나 없는, 세상에서 빛이 완벽하게 차단되어버린 듯한 그 반가운 어둠 속을 내달렸다. 그 남자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더니 한 마디를 조용하게 어둠 속에 풀어놓는 것이었다.
“팔봉산은 처음이신가요?”
“아, 이곳은 20년 만에 다시 옵니다. 20년 전에 친구들과 여행을 왔었죠. 그때는 정신없이 기차를 타고 왔다 택시를 타고 이 길로 이동했죠. 밤늦은 시간에 도착해서 별다른 선택이 없었어요. 웃돈을 주고 유원지로 이동했지 뭡니까. 5만 원씩이나 주고요. 완전 도둑놈이었어요” 오래된 기억을 겨우겨우 되살려가며 짜증을 내며 그에게 말했다.
“그러셨군요. 이곳은 밤이 되면 다른 곳보다 더 어두운 편이죠. 사람이 지나갈 곳이 아니에요” 그가 말했다.
잠시 대화 같지 않은 대화가 어색하게 끝난 후, 나는 차라리 그와 대화를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30분이 지나면 그를 유원지에 내려주면 그만이 아닌가. 그와는 잠시의 인연일 뿐이다. 어둠 한가운데서 그를 만났을 뿐이고, 나는 그를 잠시 내 차에 의탁해 준 것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의미도 없다. 우린 그냥 지나가다가 서로를 잠시 알아봤을 뿐이 아닌가.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많았다. 이곳 70번 국도, 남춘천 IC를 통과한 이후 유원지까지는 차로 30분 이상의 거리다. 그 남자가 어디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그 남자는 적어도 몇 시간 이상을 걸어야 유원지 근방에 도착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런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나는 그의 이상한 행색을 다시 그려보기 시작했다. 검은 재킷, 닳아빠진 청바지, 그리고 가볍기만 한 작은 배낭, 도대체 이 남자는 뭐 하는 사람일까, 하필이면 인적이 끊어진 완벽한 어둠 속에서 그는 왜 혼자 걷고 있었을까. 게다가 그 남자는 작은 랜턴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맙소사,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스마트폰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체 이 남자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것이었을까.
“세상엔 이유 없이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 남자가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속으로 내 생각을 들켜버린 것 같아서 무안해졌으나 애써 침착하게 아무것도 들키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하려 했다. 등 위쪽에서 갑자기 서늘한 바람과 함께 뜨거운 땀이 흘러내렸지만, 그 기운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의심하고 계시겠지요. 저라는 존재에 대해서. 왜 하필이면 이곳에서 사람이든 유령이든 양쪽의 어떤 존재도 드나들 것 같지 않은 어둠 속에서 제가 갑자기 출현했는지, 그 사실이 궁금하셨겠지요. 호기심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은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선생님이 혹시나 속으로 저의 존재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품평을 한다 한들, 그것은 하등의 잘못도 오해도 해당되지 않겠지요”
“저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런 물체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선생이 나를 인식했으니 저는 이곳에서 지금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하, 그렇다고 제가 이 세상을 초월한 그러니까 유령, 혹은 70번 국도만 떠도는 지박령 같은 존재는 적어도 아니라는 겁니다. 단지 저는 우연히 이 도로를 지나고 있었고 선생이 저에게 뜻하지 않은 그러니까 반가운 제안을 주신 것이지요. 저는 그 점을 매우 행운이라 여기고 있으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남자가 말했다.
“아,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이곳을 홀로 지나고 계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내가 물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겠습니까? 선생이 내리는 결정에 특별한 근거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가 선생을 이곳에 데려왔다고 믿습니까? 이유는 없습니다. 오직 이 세상엔 불확실함만 가득합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것들 중에서 우연히 한 가지를 선택할 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이유가 있어서 현재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죠. 현재를 과거의 틀에 맞춰서 억지로 이유를 만듭니다. 그렇게 조각을 맞춰놓으면 그 형상이 완벽한 모습을 갖춰나가게 될까요? 그게 모순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까? 현재가 과거 때문에 존재한다는 사실, 과연 그 이론이 현재를 생산하는 걸까요? 인생이 예측하지 못한 돌발 변수들 덕분에 흘러가는 거라고 가정하는 건 어떨까요? 선생과 내가 이곳 70번 국도에서 새벽 2시에 우연찮게 마주쳤던 것처럼 말이죠”
“선생의 말대로 현재는 현재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과거라는 수많은 이론이 쌓이고 쌓여 현재라는 모순적인 딜레마를 양산했을 수도 있겠죠. 단지 그 규칙적이지도 않은 말 하자면 마치 톱니바퀴가 일정한 규칙성을 갖고 서로 맞아떨어지게 회전한다는 원리란 것은 우리의 착각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인간은 현재를 판단할 때, 과거를 기초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우리가 가진 인식의 한계가 아닐까요?” 내가 말했다.
“저는 오늘 오전에 작은 숲길을 걸었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목적지는 없었죠. 한참을 걸었어요.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지만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것을 보니 12시쯤은 된 것 같았어요. 아무튼 계속 걸었죠. 왜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멈출 수는 없잖아요. 인생이 어느 순간 우연히 시작됐듯, 끝날 때까지 상영을 멈출 수 없는 영화관처럼 우린 끝을 알면서도 걸어야 하죠. 걷다 보니 갈림길이 나왔어요. 왼쪽과 오른쪽, 선생님은 보통 어느 쪽을 선택하시는 편인가요? 저는 보통 오른쪽을 선택해요. 직관적이고 본능적이죠. 대체로, 아니 거의 오른쪽만 선택해요. 그 선택은 과거에서 오나요? 경험에서 비롯됐나요? 그 순간 선생은 얼마나 많은 정보를 수집해서 효과적인 결정을 하시나요? 만약에 그 결정이 잘못됐다면요? 늘 오른쪽만 선택하다, 왼쪽을 선택했는데, 그 결과가 파국을 맺게 한다면요? 그러면 오른쪽은 어떻게 되죠? 그렇게 되면 오랫동안 자신과 맺은 계약이 파기되는 거죠. 후회해도 소용없어요. 오른쪽은 영원히 떠나버렸으니까요. 과거에서 겪은 경험들이 현재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까요? 그 판단과 지금의 판단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나요? 나의 현재 유동성은 과거의 책임이 되나요? 그렇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되죠? 선생님과 내가 이 시간에 만나서 같은 차 안에 타고 다시 유원지로 이동하는 확률과 거의 같을까요?”
그는 확률에 관련된, 그리고 선택에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를 설파하곤 다시 말문을 닫았다. 나는 그의 이론에 동조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주장이 무엇인지 대략적으로 이해할 순 있었다. 아니, 낯선 이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이 무슨 대수랴. 이 깊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와 잠시 친구가 되어서, 대화를 나눴다는 것 자체가 충분히 의미가 되는 것을. 그것이면 충분한 것을.
어느새 목적지에 닿았고 나는 그를 내려줬다. 그는 어디론가 떠나면서 나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갈림길에서 오른쪽만 선택한다면 언젠가 다시 선생을 만나게 되겠죠. 그때는 우리 왼쪽을 선택하는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얘기해봅시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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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ca
공심님이 공 심 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글 같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앗 그런가요? ㅎㅎ 그림자와 이야기를 나눈 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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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그릿
누군가와 잠시 친구가 되어서, 대화를 나눴다는 것 자체가 충분히 의미가 되는 것을. 그것이면 충분한 것을..생각하게 하는 글이네요~~
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네 우리에겐 대화가 필요합니다. 심지어 어둠속에서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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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돌여행
혹시 픽션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공심님이 만나고 싶은 또 다른 한 남자와 그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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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 맞아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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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정원
"오직 이 세상엔 불확실함만 가득합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것들 중에서 우연히 한 가지를 선택할 뿐입니다." 이 말이 저에게 은근한 위로가 되네요. 갈림길에서 왼쪽을 선택하는 문제에 대한 대화도 기다려지네요ㅎㅎ
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위로가 되었다니 너무나 감사하네요. 왼쪽길도 한 번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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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히
새벽에 만난 그분은 직감 영감 쯤? 되실까 나름 해석해보네요 이러한 흥미진진한 문학을 하시는 분이시라니요 멋짐!
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직감 영감? 오 그것도 좋은 해석이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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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
일상에 친구는 필요합니다.! 언젠가 그때처럼 또하나의 친구를 만났으면 하네요!
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친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지만, 친구는 중요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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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flower 🌻
긴 글입니다. 다 읽었어요~ 공심님 테스형을 자주 만나시는 것 같아요~^^이번엔 70번 국도에서 만나샸네요. 오싹합니다. 나의 현재 유동성은 과거의 책임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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