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하겠습니다”

2021.03.22 | 조회 8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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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오직 글로서만 승부하는 글쟁이의 뉴스레터, 주로 생산성 툴에 관련된 글을 보내드립니다.(가끔 소설도 씁니다.)

“안 하겠습니다”

안 하겠다는 말, 말하자면 관두겠다는 말, 이런 포기의 말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뭘? 안 하겠다는 뜻일까. 뭘, 놓아버리고 싶다는 걸까. 알 수 없다. 원인도 주체도 불분명하니 그 말은 나에게서 시작했으나 용수철처럼 튕겨나갔다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고 만다. 이 말 역시 모호하다. 왜 나는 “안 하겠습니다”라는 충격적인 문장을 전개하는가. ‘일간 공심’ 프로젝트를 안 하겠다는 말로 이해해도 되는가? 그런가?

업체, 아니 그 단어보다는 갑이라는 말이 훨씬 잘 어울렸을 법한 그 업체와 함께 벌였던 프로젝트는 결국 막을 내릴 것 같았다. 시작이 이상하면 마무리도 그렇게 흘러가리라는 나의 짐작대로 몇 달 동안의 프로젝트는 성과 없이 끝이 났다. 대표는 나에게 “안 하겠다고 통보하세요”라며 강력한 의사를 그들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격앙된 목소리로 훗날은 전혀 고려하지 않겠다는 톤으로……. 그의 감정은 나에게서 또 갑에게 고스란히 원래의 형태대로 보내졌다. 나는 중간에 끼어서 절대 그 감정에 편승하거나 휘둘리면 안 된다는 각오로, 극도로 고조된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썼으나 그런 생각은 희망에 불과했다. 감정이란 것은 그만큼 냉정하며 잔인했다. 애써 거부하려 해도 쉽게 전염되는 바이러스의 잔혹스러움처럼, 그것은 내 의식 정중앙으로 파고들었고 마주치는 것이 무엇이든 파괴하려 애썼다.

나는 "안 하겠다"라는 문장 하나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글을 쓰고 말로서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답게 온갖 기교와 수사를 섞어서 갑에게 묘사했다. 대표의 짜증과 격노는 최대한 배제한 채, 제3자처럼 내 일이 아닌 것처럼 전하려 애썼다. 그러니까 나는 결국 주체도 갑도 아닌 어느 축에도 끼지 못하는 방관자의 시선으로……. 그것이 갑에게 더 큰 분노를 안겼을지도.

하지만 괴로웠다. 양쪽의 원망과 투정이 뇌관으로 침투하여 속을 뒤집어 놓은 채 다시 바깥으로 탈출하는 것을 넋 놓고 구경해야 했으니까, 그런 상황이 닥치면 나는 대체 어느 편에 속해야 하는 것인가 고민이 생긴다. 나는 주최 측인가, 개최 측인가, 아니면 구경꾼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냥 지나가는 주변 인물 3쯤은 될까. 문득 서로 안 하겠다는 말을 듣고 다니, 이제야말로 내가 개입되어 있던 그러니까 내가 가짜라는 사실을 증명하던 신분 중에서 적어도 한 가지 정도는 떼어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만 증폭됐달까.

사실, 나는 안 하겠다는 말을 진즉 던지고 싶었다. 내가 나라고 세상에 증명하는 일을, “나는 이러이러한 일들을 잘 합니다”라고 가짜로 떠벌이는 일들을, 나를 표현하는 모든 거짓 수단에 대해 “그만두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대체 나는 얼마나 많은 일을 저지르며 얼마나 많은 내가 아닌 인격들을 만들어왔단 말인가. 회사원이라는 직분은 절대 포기하지 못하면서,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겠다고 의사를 표현하면서, 얼마나 많은 프로젝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나의 반경으로 끌어들였단 말인가.

나는 일 덕분에 움직이는 사람은 아닐까. 일이 아니라면 작동을 멈추게 되지는 않을까. 결국 내가 살아있는 것은 일 때문이라는 방정식이 성립하는 건 아닐까. 해결해야 하는 일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어서 내가 지금까지 생존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던 수수께끼가 풀리는 걸까.

어제는 이전 직장에서 같이 근무했던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Hello 이사님, how’s it going on?”이라는 말과 함께……. 그는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인도인이었다. 하지만 그가 인도인이라는 사실을 그와 함께 일하면서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그는 친근했고 서글서글한 구석이 많았다. 어느 순간 모태 한국인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친화력이 좋았던 그 친구. 나는 그 친구를 현재 회사에 스카우트하려 했으나, 그는 그것이 불가능할 것 같다고 전했다. 말하자면 그의 말도 “안 하겠습니다”라는 분위기의 연장선이었던 셈.

“안 하겠습니다” 내가 자주 내뱉고 싶던 말, 그러니 그렇게 하지 못하던 말. 그러나 남들에게는 비교적 자주 듣던 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는 말. 내가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 만큼 자주 듣는 말이지만, 여태껏 안 해야 하는 일을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으므로 나는 이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기 힘들다는 사실. 써먹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말이라는 사실.

하기 싫은 것들, 헤서는 안 될 일들, 그런 말에 자신감이 붙기를……. 늦었을지라도 자신감이 부족하더라도 “못하겠습니다”가 아닌 “안 하겠습니다”라고 강하게 말하는 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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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망

    0
    over 3 years 전

    메일 받자마자 글을 안쓰신다는 줄 알고 엄청 놀랐어요! ㅎㅎ! 저도 직장에서 꼭 해야하는 말은 속시원하게 하고 싶어요 필요시 꼭 해야말 중에 "안하겠어요"도 필요한 시기인거같은데 @_@아직도 넘사벽입니다.그래도 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오늘도요!

    ㄴ 답글 (1)
  •  veca의 프로필 이미지

    veca

    0
    over 3 years 전

    제목이 시선을 끌만큼 자극적입니다ㅎㅎ할말 다하고 사실 것도 같은데 또 아니신것 같기도 하고 공심님은 여러가지 색이 아주 분명하게 공존하는 분입니다. 오늘 글도 잘읽었습니다.^^

    ㄴ 답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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