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경주역이 2021년 12월 28일에 폐역된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1박 2일 여행을 잡았다. 마지막 무궁화호를 타고 경주 시내 중심가로 바로 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103년간 운영되던 구 경주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니. 과거의 무언가가 사라지는 광경을 보는건 뭔가 여려 생각을 하게 된다. 뭔가 아쉬워서 일부러 무궁화호를 탔다.
숙소에 짐을 풀고 황리단길을 걸었다. SNS에서 많이 본 그 거리였는데, 막상 와보니 서울의 그런 핫플레이스들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카페, 옷가게, 소품샵들이 비슷비슷하게 늘어서 있고. 그런데 뭔가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아서 골목골목 들여다봤다.
'어서어서책장'라는 간판이 보여서 들어갔다. 작은 서점이었는데 입구에 '문을 살살 여세요'라고 적혀있더라. 유리창에는 '어디에나 있는 서점, 어디에도 없는 서점'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서울과 비슷한 느낌의 핫플레이스에서 서점을 보니 딱 그런 느낌이었다. 어디에나 있는 거리에 어디에도 없는 서점.
안으로 들어가니 책을 약처럼 판다는 컨셉이 신기했다. 계산할 때 노란 약봉지에 넣어서 처방전처럼 복용법까지 써준다고 한다. 사장님은 다른 손님과 이야기하고 계셨고 나는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책들을 둘러봤다. 문학서적이 많은 편이었고, 독립출판물도 꽤 있었다.
쭉 둘러보다가 눈에 띄는 제목을 발견했다. 『경주가 경주생일에 경주여행』. 라임도 좋고 뭔가 의미 있어 보였다.
살짝 내용을 보니 그림일기처럼 되어 있었다. '경주'라는 이름을 가진 작가가 자신의 생일에 경주로 여행 간 이야기더라. 소소하고 재미있어 보였다. 예전에 파리 신혼여행 갔을 때 레고 『파리 레스토랑』을 사와서 집에서 조립한 적이 있는데, 볼 때마다 그때 여행이 생각난다. 이 책도 그런 역할을 할 것 같아서 일단 구매했다.
계산할 때 사장님이 노란 약봉지에 내 이름을 써주셨다. 책이 들어 있는 약봉투를 보니 "취침 전 1회, 그리워질 때마다 복용하세요" 라고 하는것 같았다.
근처 카페에 가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신기한 부분을 발견했다. 책 속에서 작가가 어서어서 책방에 가서 책을 사는 내용이 나오는 거였다. 내가 지금 어서어서 책방에서 산 이 책을, 책 속에서도 어서어서 책방에서 사고 있다니. 뭔가 패러독스 같은 느낌이었다. 경주 여행하면서 다른 사람의 경주 여행기를 보는 것도 신기한데, 같은 책방에서 산 책에서 그 책방 이야기까지 나오다니.
여행이 원래 이런 소소함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거창한 일정보다는 이런 우연한 발견들, 이런 작은 순환과 연결고리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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