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안녕하세요. 4월 첫 번째 뉴스 헐리버리는 관점과 깊이가 있는 심층기사와 칼럼을 모아 전해드리는 PERSPECTIVE EDITION으로 인사드립니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고, 또 최근 들어 스토킹 범죄 사건이 다수 보도되며 여성들을 분노와 불안에 떨게 만들고 있는데요, 이번 호에도 관련 기사들과 함께하시며 의견 나눠보시면 좋겠습니다.
여성신문 기획기사 ‘지방정치 알고리즘’에서 광역의회 여성 대표성이 기초의회와 달리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현실을 짚었습니다. 인물 부족이 아니라 제도의 문제입니다. 더불어민주당 경기지사 후보로 추미애 의원이 확정되었습니다. 추 의원의 본선행으로 1995년 민선 1기부터 이어진 여성 정치인의 광역단체장 도전사가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김미경 젠더폭력예방 경남포럼 대표가 경남에선 여성 기초단체장(시장·군수)이 전무하며, 교육감 또한 과거 선거까지 포함해 ‘여성 후보 0명’인 현실을 돌아보았습니다.
남양주에서 스토킹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피해자는 살기 위해 여섯 차례나 신고했지만 경찰은 가해자에 대한 구속영장조차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여성단체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의 실패”라고 비판했습니다. 경향신문에서 최근 2년간의 스토킹 사건 1심 판결문 56건을 확보해 분석한 결과, 가해자들은 각종 피해자 보호 조치도 아랑곳하지 않고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56건 중 접근금지 명령을 어긴 사례는 41건이었습니다.
성폭행 피해를 신고한 19세 여성 노동자가 경찰의 불송치 결정에 비관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경찰은 피해자가 만취 상태로 쓴 조서의 신빙성을 의심하면서 동시에 만취 상태로 찍힌 CCTV 영상의 모습을 합의된 성관계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가수 나나가 자택에 침입한 강도에게 반격했다가 살인미수와 특수폭행으로 고소당했습니다. 경찰은 이 사건을 정당방위로 보고 불송치했습니다. 이에 양민영 운동친구 대표가 정당방위의 까다로운 요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올해는 세월호 참사 12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반복되는 참사 피해에 대한 더스쿠프 기획기사와 정보라 작가가 실천하고 있는 연대활동을 소개합니다. 이슬기 기자가 남성 상사에 의해 딥페이크 피해를 당한 여성 공무원과 구청장인 남성 상사의 해외 출장에 동행했다가 입길에 오른 또 다른 여성 공무원의 사례를 케이트 만의 저서 『다운 걸』을 읽으며 복기했습니다. 자기결정성을 침해하는 형태의 성적 대상화가 징벌로 작용하는 기제를 들여다봅니다. 성평등가족부에서 ‘공공생리대 드림’ 시범사업 계획을 내놓았습니다. 월경을 둘러싼 국가 책임을 처음으로 정책 의제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촉법소년 연령 하향과 관련해 국회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참가자들은 촉법소년 연령을 낮추는 방식이 실제 범죄 예방이나 피해 회복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중앙일보 기획기사 ‘부모 형벌 나눠 지는 자녀’에서 부모가 범죄 피의자일 때 자녀가 복지 사각지대에 몰리는 현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어린 시절 SNS 중독으로 고통을 겪은 20세 여성이 메타와 유튜브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승소했습니다. 메타와 유튜브는 아동과 청소년에게 유해한 SNS 플랫폼 환경을 의도적으로 구축했다는 혐의로 한화 약 90억원의 손해배상금을 물게 됐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서를 통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민주주의 가치를 확립했지만, 아내의 배다른 여동생이었던 10대 흑인 노예를 성착취하며 사생아를 낳아 다시 노예로 부리는 이중성을 보였습니다.
뉴스 헐리버리가 이번 호에서 준비한 기사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호에서는 주목할 만한 여성 인물 기사들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에디터 오진달래 드림

[지방정치 알고리즘] 광역의회 여성 14.8% 정체, 그 해법은?
광역의회 여성 대표성이 기초의회와 달리 제자리걸음하고 있다.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광역의회 지역구 여성 당선자는 전체 779석 중 115명으로 14.8%에 그쳤다.
기초의회 여성 비율이 25.0%까지 올라선 것과 비교하면 차이는 더 뚜렷하다. 여성 정치 확대 제도가 도입됐지만, 광역 단계에선 뚜렷한 확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문제는 인물 부족보다 제도에 있다. (중략)
제8회 지방선거에서 국회의원 선거구 253개 기준으로 환산했을 때 광역의원 여성 후보는 국회의원 지역구당 더불어민주당 0.59명, 국민의힘 0.33명 수준에 그쳤다.
광역의원 선거구가 779개인 만큼, 각 정당이 국회의원 지역구마다 여성 후보를 1명씩 공천할 경우 정당별 여성 후보 비율은 산술적으로 32.5%에 이른다.
광역의회 여성 대표성 정체는 단순한 비율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지역구 광역의원은 광역 비례대표와 기초의원을 거친 여성 정치인이 다음 단계로 올라서는 핵심 통로이기 때문이다.
광역 단계에서 여성 진입이 막히면 기초자치단체장과 국회의원으로 이어질 경로도 함께 좁아질 수밖에 없다. 광역의회 병목을 풀지 못하면 여성 대표성 확대는 기초의회에 머문 채 지방정치의 권력 구조도 바뀌기 어렵다.
(박진경·서정순, 여성신문, 26.03.28)

秋 “의미 큰 일”…女대통령은 있었는데, 시·도지사 없었던 이유
“그야말로 유리천장을 뚫어내는 일이 될 거다.”
더불어민주당 경기지사 후보로 확정된 추미애 의원은 지난 8일 기자들을 만나 “헌정사에 없던 첫 여성 광역단체장이 경기지사가 된다는 건 의미가 큰 일”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추 의원의 본선행으로 1995년(민선 1기)부터 이어진 여성 정치인의 광역단체장 도전사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간 다수의 여성 후보가 수도권 등에서 시·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당선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사이 박근혜 전 대통령이 18대 대선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지만 외려 여성 시·도지사는 배출하지 못한 것이다. 그만큼 여성에겐 도백이 되는 길이 여전히 험준하다.
여성 광역단체장 도전기의 시작은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판사를 거쳐 환경처 장관을 역임한 황산성 후보와 3선 의원 출신의 김옥선 후보가 무소속으로 서울시장에 출마했다. 황 후보가 2.1%, 김 후보가 0.4%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데 그쳐 여성 후보의 도전이라는 데 의미를 둬야 했다.
주요 정당의 공천을 받아 본격적인 도전을 시작한 건 2006년부터다. 당시 첫 여성 법무부 장관을 지낸 강금실 열린우리당 후보는 서울시장에 처음 도전한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와 맞붙었다. 당시 선거는 ‘성 대결’ 양상을 보였다. 열린우리당은 첫 여성 시장 탄생을 바라는 유권자의 기대가 실제 득표로 이어질 것이라고 봤다. 특히 한명숙 국무총리 임명으로 여당이 ‘여풍’의 진원지로 부각된 점이 여성 표심을 확보하는 데 유리할 것이란 분석이 있었다. (중략)
이후 선거에서도 여성 후보들의 석패는 계속됐다. 2010년 서울시장 선거에 나선 한명숙 민주당 후보는 현직 시장인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와 격돌했다. 당시 선거 초반만 해도 “준비된 시장”을 강조한 오 후보의 압승이 전망됐지만, 선거 50여일 전 한 후보의 ‘뇌물 수수 의혹’ 1심 무죄 판결로 판세가 급변했다. 당시 리얼미터 조사 기준 23.3%포인트에 달했던 격차는 7%포인트까지 좁혀졌다. 막판엔 격차가 더 좁혀져 초접전 끝에 0.6%포인트 차이로 오세훈 시장이 재선에 성공했다.
(여성국, 중앙일보, 26.04.12)

선거와 성평등,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
선거에서는 경제, 지역 개발, 권력기관 개혁처럼 손에 잡힐 듯 선명한 이슈들이 늘 전면에 등장한다. 반면 성평등이나 구조적 차별, 장기적인 사회 변화와 같은 의제는 회의 말미에 덧붙여지는 안건처럼 취급되기 일쑤다.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로 이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성평등과 구조적 차별의 관점에서 우리 사회의 위치를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중략)
대한민국은 1948년 제헌 헌법과 함께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동등한 투표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 권리는 출발의 속도만큼 현실 속에서 충분히 확장되지는 못했다. 투표소 앞에서의 ‘한 표’는 동등했지만, 정치의 언어와 구조, 그리고 의사결정의 중심에서 여성의 자리는 여전히 협소했다.
숫자는 이 현실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지방자치 행정이 30년을 넘어섰지만, 우리는 아직 단 한 번도 여성 광역단체장을 가져본 적이 없다. (중략)
교육계 역시 다르지 않다. 교육은 지식 전달을 넘어 어떤 시민을 길러낼 것인가와 직결되는 사안이다. 즉, 교육감의 가치관은 민주주의 교육, 성평등 교육, 인권·다양성 교육의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친다. 과거 선거까지 포함해 경남 교육감 후보군에 ‘여성 후보 0명’이라는 사실은 실제 교육 현장의 성별 구성과 정책 결정권을 가진 고위 행정 구조가 서로 크게 어긋나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교실 안에서는 여성 교사가 70%를 훌쩍 넘지만, 교장실 문을 열면 그 비율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실과 맥을 같이 한다.
(김미경, 경남일보, 26.04.13)

“내 동생과 닮은 죽음, 국가는 왜 막지 못했나”
“다시는 저와 같은 피해자 가족이 생기지 않기를, 다시는 어떤 부모도 어떤 가족도 사랑하는 딸을 잃지 않기를 정말 간절히 기도하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오늘 그 바람은 또다시 무너졌습니다.”
인천 스토킹 살인사건 피해자의 유가족이자 범죄피해자연대 활동가인 이경숙씨가 목멘 소리로 말했다. 교제하던 상대에게서 스토킹을 당했던 그의 가족은 2023년 7월 경찰의 요청으로 스마트워치를 반납한 지 4일 만에 사망했다. 그리고 지난 14일 경기도 남양주에서 또 한 명의 여성이 살해당했다.
17일 청와대 앞에서 여성인권단체 등이 주최한 ‘남양주 가정폭력·스토킹 여성살해사건 긴급대응 기자회견’에는 인천 강화도 가정폭력에 의한 피해자 뇌사사건 피해자 가족과 인천 스토킹 여성살해사건 피해자 가족이 참석했다. 이들은 남양주에서 또다시 여성살해 사건이 반복된 것이 “국가의 실패”라며 더 이상의 죽음을 막기 위해 국가가 나서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남양주 여성살해사건의 피해자는 살기 위해 여섯 차례나 신고했지만, 경찰은 가해자에 대한 구속 영장조차도 신청하지 않았다. 피해자는 경찰이 지급한 스마트워치를 통해 마지막 구조 요청을 한 후, 신고 2분 만에 사실혼 관계에 있던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가해자는 법무부 감시 아래 있는 전자발찌 착용 대상자였으며, 접근금지 등 잠정조치 처분 또한 받은 자였다.
(김희지, 여성신문, 26.03.17)

판결문 56건 분석해보니…전자발찌·스마트워치·접근금지에도 스토킹은 계속됐다
25일 경향신문은 김훈의 스토킹 살인사건에서 등장한 ‘전자발찌·접근금지·스마트워치·위치추적장치’ 등이 쟁점이 됐던 최근 2년간의 스토킹 사건 1심 판결문 56건을 확보해 분석했다. 가해자들은 각종 피해자 보호 조치도 아랑곳하지 않고 범행을 저질렀다.
56건 중 접근금지 명령을 어긴 사례는 41건이었다. ‘피해자에게 직접 또는 통신 매체를 이용해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을 무시한 사례들이다. 피해자를 보호하는 잠정조치(스토킹)와 임시조치(가정폭력)는 사후에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만, 명령을 어기고 접근하는 스토커를 사전에 막을 수는 없었다. (중략)
스토킹은 강력 사건으로 이어지기 전 위험 신호지만 그 자체로는 무겁게 처벌되지 않는다. 현행 스토킹처벌법은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흉기 소지 시 가중)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번에 분석한 56건의 판결을 보면 실형은 19건(33.9%), 집행유예 30건(53.6%), 벌금형은 7건(12.5%)으로 나타났다. 살인미수, 성범죄, 보복 범죄가 포함된 3건만 6년 이상 징역이 선고됐다. 징역 1~2년이 11건, 1년 이하가 5건이었다.
(전현진·박채연, 경향신문, 26.03.26)

“웃고 대화하면 합의한 건가”... 성폭행 무혐의 처리에 투신한 19세 여성 노동자
성폭행 피해를 신고한 19세 여성 노동자가 경찰의 불송치 결정에 비관하며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경찰은 사건 직후 면허 취소 수준의 만취 상태에서 작성한 피해자의 조서는 의심했지만, 피해자가 기억을 잃었다고 주장한 시점 전후의 CCTV 속 모습을 성관계 합의의 근거로 삼아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 (중략)
경찰은 일이 벌어진 시점 전후에 두 사람이 웃고 대화하며 주점 내부를 오가고, 서로 헤어질 때는 배웅을 했으며, 이에 앞서 동석자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는 여러 차례 스킨십하는 등의 장면이 CCTV에 포착된 점을 근거로 A씨가 항거불능 상태에서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냈다. B씨 역시 “합의로 이뤄진 성관계였다”며 혐의를 부인했고, 참고인 조사에서도 혐의를 인정할 만한 진술이 없었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결국 경찰은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A씨는 올해 2월 18일 불송치 통보서를 받고 사흘 만인 같은 달 21일 건물에서 투신해 숨졌다. A씨는 고소 이후 사망할 때까지 지인들에게 SNS를 통해 “성폭행당했다”, “죽고 싶다”는 등의 메시지를 보냈던 것으로 뒤늦게 드러났다. 또 숨진 A씨의 휴대전화에는 “(수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 (성관계) 동의 의사를 보인 적이 없다. 사건 이후 정신적 충격이 크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이의신청서가 들어있었다.
경찰은 A씨가 이의신청서를 낸 것으로 간주하고, 이의신청을 접수했다. 이에 따라 사건은 송치로 변경됐다. 이후 검찰은 지난달 16일 보완 수사를 요구했으며, 경찰은 이달 7일 보완 수사 결과를 검찰에 통보했지만, B씨의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결론은 그대로 유지됐다. (중략)
10일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성명에서 “만취 상태에서 웃고 걸었다는 이유로, 합의한 관계라고 판단하는 것이 과연 수사인가. 20세의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동의하지 않은 성행위를 인지한 즉시 경찰에 가서 고소한 사건에서, 40대 사장이 말한 ‘합의’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가해자의 일방적 주장 외에, ‘동의’를 입증할 근거가 단 하나라도 있었는가” 반문하며 “심신상실, 항거불능은 끝없이 (증거를) 요구하면서 피해자의 ‘동의’ 의사는 단 한 번도 확인하지 않은 경찰의 소극적이고 편향된 판단에 분노한다”고 밝혔다.
(김희지, 여성신문, 26.04.10)

[운동사이] “뭔가 많이 잘못됐다” 가수 나나에게 공감한 이유
"정당방위로 인정될까요?"
"가해자에게 역고소당하지 않을까요?"
여성만 참여하는 자기방어 클래스에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나는 대답을 망설이다가 상황에 따라서 쌍방 폭행처럼 다뤄질 수도 있다고 답한다. 자신을 지키고자 방어법을 배우는 여성들에게 정당방위를 인정받으려면 법의 높은 문턱을 넘어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은 언제나 씁쓸하다.
최근 가수 나나의 자택 강도 사건은 정당방위에 얽힌 여성들의 딜레마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보도에 따르면 한 30대 남성이 나나의 집에 침입해 흉기로 나나와 그의 어머니를 위협하고 돈을 요구했다가 나나의 반격으로 제압당하고 체포됐다. 그러나 가해자는 되레 나나를 살인미수와 특수 폭행 혐의로 고소했다. 경찰은 절차상 나나를 피의자로 입건해 조사한 뒤 정당방위에 해당한다고 보고 불송치했다. (중략)
법은 정당방위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형법 제21조 1항에 따르면 타인의 법익을 방위하기 위한 행위가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만 정당방위가 성립한다. 문제는 실제 수사와 재판에서 이 '상당성'을 매우 엄격하게 따진다는 것이다.
수사기관은 상당성을 판단하기 위해 피해자가 꼭 반격해야 했는지, 반격의 정도가 적절했는지, 상대를 제압한 뒤에도 추가 공격이 있었는지 등을 고려한다. 정당방위를 인정받으려면 피해자는 목숨을 위협받는 순간에도 과도하지 않게 저항하고 가해자를 크게 다치지 않게 하면서 재빨리 현장을 벗어나야 한다. 실현 불가능한 균형을 피해자에게 요구하는 셈이다.
(양민영, 여성신문, 26.04.14)

다시 돌아온 4월… 우리는 참사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때는 2020년 4월 29일. 완공을 두달여 앞둔 이천시 '물류센터 신축공장'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화마火魔가 시작된 곳은 지하 2층. 우레탄폼 작업 중 발생한 유증기에서 불꽃이 튀면서 화재가 번졌다.
면적 1만㎡ 크기의 공장이 삽시간에 불과 연기에 휩싸였다. 38명이 사망했고, 10명이 부상을 입었다. 2008년 사망자만 40명 발생한 '이천 냉동 물류센터' 화재 이후 12년 만에 터진 참사였다. 주요 원인은 '샌드위치' 패널이었다. (중략)
그렇다면 참사 후 만든 '법망'은 통제력을 발휘했을까. 그렇지 않다. 법망의 힘은 허약했다. 참사는 새 법망을 농락하듯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실례를 보자. 2022년 소방대원 3명의 목숨을 앗아간 평택 물류창고 화재, 50일 간격으로 잇따라 터진 2024년 문경 육가공 공장 화재와 인천 가방공장 화재, 그리고 2026년 또 하나의 참사 '대덕산업단지 자동차 부품공장' 화재까지…. 상흔이 선연한 이 참사들의 원인은 공교롭게도 '샌드위치 패널'이었다. (중략)
이유가 뭘까. 답은 어렵지 않다. 안전 불감이다. 2021년에 시행한 '품질인정제도'는 소급 적용이 불가능했다. 쉽게 말해, 2021년 전에 만든 샌드위치 패널은 통제 자체를 할 수 없었단 얘기다. 그런데도 정부·지자체는 '법망 밖'에 있는 샌드위치 패널을 꼼꼼하게 감독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았다. '설마 사고가 또 터지겠어'란 안전 불감이 참사를 낳은 셈이다. 인재人災다.
이유는 또 있다. 인간의 망각이다. 참사는 대중에게 '집단적 충격'을 줬지만 오래 기억되지 않았다. 사고의 원인은 어느샌가 대중의 인식에서 사라졌고, 그렇게 남은 원인은 또다른 참사의 원흉이 됐다. 그 과정에서 참사는 몇몇 이에게만 '파편적 상처'로 남았다. (중략)
어찌 보면 달라진 게 없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참사는 안전 불감과 망각이란 장막의 뒤편에서 '나쁜 습관'처럼 반복되고 있다.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12주기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날의 비통함을 기억하고 있을까. 우린 과연 불감과 망각을 걷어내고 '비극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을까.
(이윤찬, 더스쿠프, 26.04.09)

[정보라의 세상 속으로]연대활동에 관하여
재난참사 피해자분들과 연대할 때 슬프지 않냐고 어떤 분이 물으신 적이 있다. 내가 이해한 질문의 의미는 인간으로서 마음의 슬픔과 연대활동의 균형을 어떻게 찾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좋은 질문이다. 시민으로서 연대활동도 중요하고 개인으로서 자신의 마음을 보호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 4월을 맞이하여 연대활동의 여러 방식을 제안하고자 한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 기억상점에서 물품을 구입하거나 지역 리본공방에서 노란리본 만들기 등의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기억상점은 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가 운영하는 재정사업이다. 가장 기본적인 기억물품인 노란리본 금속배지 1000원, 기억팔찌도 1000원이다. 유가족 부모님들이 직접 만든 물품을 구입할 수도 있다. 배송비가 아까우니까 아는 사람들을 모아서 물품을 공동구매해서 나눠 가지면 그 과정 전체가 연대활동이다.
노란리본을 직접 만들 수도 있다. 노란리본 공방은 대체로 지역별로 있다. 만약 없다면 3명 이상 모여서 4·16연대에 문의하면 재료비 10만원을 지원받을 수 있다. 일명 ‘군번줄’과 에바폼, 가위, 강력접착제, 그리고 강력접착제를 에바폼에 묻힐 이쑤시개가 필요하다. 강력접착제는 손가락에 묻으면 피부가 상할 수 있고 옷에 한번 묻으면 절대로 지워지지 않으니 주의하시기 바란다. 나는 2017년에 세월호가 인양됐을 때 목포시민연대와 함께 노란리본을 만들었는데 청바지에 그때 묻은 강력접착제가 아직도 남아 있다.
(정보라, 경향신문, 26.04.14)

두 여성 공무원의 노동권을 생각한다 [이슬기의 무기가 되는 글들]
여기, 두 명의 여성 공무원이 있다. 두 사람 다 서울 시내의 각기 다른 구청에서 일한다. A는 자신도 모르는 새 마치 연인인 듯 합성된 딥페이크 사진이 남성 상사의 카카오톡 프로필에 내걸렸다. B는 3년 전 다녀온 해외 출장 건으로 갑자기 입길에 올랐다. 남성 상사와 둘이 갔으며, 출장지 중에 멕시코 칸쿤이라는 대표 휴양지가 있다는 것이 공격의 빌미였다. A는 상사를 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지만, 곧 날아온 것은 '혐의없음' 통지서였다. 신상정보가 털린 B는 전방위적인 공격에 시달리고 있다. (중략)
페미니스트 철학자 케이트 만이 쓴 책 『다운 걸』은 '여성혐오'의 뜻을 바로 세우려는 시도다. 여성혐오는 '여성 일반에 대한 혐오'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여성혐오자는 여성 전체를 증오하기보다, 거침없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여성처럼 '여성은 남성에게 베푸는 존재'라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부합하지 않는 여성들에게로 분노를 집중시킬 때가 많다. 케이트 만은 여성혐오는 일부 여성을 다른 여성의 대리인으로 보고, 이들을 공격함으로써 가부장제 질서를 회복하려는 시도와 연결돼 있다고 말한다. 마침 지근거리에 있는, '만만한' 여성에게로 실제 그녀와는 무관한 불만을 쏟아낸다는 얘기다. 또한 책은 철학자 레이 랭턴과 마사 누스바움의 개념을 경유해 '여성혐오와 성적대상화'를 설명한다. 랭턴은 성적대상화를 통해 인간성의 핵심인 '자기결정성'이 부정될 수 있다고 말한다. 대상의 자기결정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침해하는 방식으로. 누스바움은 자기결정성을 침해하는 형태의 성적대상화는 징벌적 성격을 띠며, 이는 인터넷 상에서의 여성혐오 표출에 지대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만이 얘기하는 '여성혐오의 논리'는 정 예비후보에게 드리워진 '출장 의혹'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특별한 인과관계나 확실한 물증 없이 정황 증거로서 느슨하게 제시된 '출장, 여직원, 칸쿤'이라는 키워드는 여성 공무원의 자기결정성을 침해하는 방식으로 성적대상화를 감행한다. 사진의 노출 정도가 심하지 않다는 이유로 '혐의없음' 결정이 내려진 A씨 사례 또한 딥페이크 합성 사진을 통해 자기결정성이 침해된 성적대상화임은 분명하다. 이같은 일들은, 만이 언급한 여성혐오의 폐해로서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을 단속하는 결과를 낳는다. A씨나 B씨 같은 여성 공무원들, 수많은 남성들과 함께 일하는 일터의 여성 노동자들을 둘러싼 인식과 그들의 행동거지를.
(이슬기, 여성신문, 26.04.07)

[성·재생산권은 민생이다] ②깔창 생리대에서 공공 생리대까지... 월경권 어디까지 왔나
이재명 대통령의 생리대 무상공급 지시 이후, 성평등가족부는 취약계층을 넘어 보편지급 ‘공공생리대 드림’ 시범사업 계획을 내놓고 있다. 이는 월경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공공의 건강권으로 접근하겠다는 정책 방향을 분명히 한 조치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 변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한때 ‘깔창 생리대’라는 말이 한국 사회를 흔들었다. 생리대 가격을 감당하지 못해 신발 깔창이나 휴지로 대신했다는 청소년들의 사연은, 월경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임을 드러냈다. 가격 외에도 유해성 문제와 생리통 등 월경권 전반의 문제는 여전히 정책의 바깥에 머물러 있다. 공공생리대 이후, 이제 질문은 달라져야 한다. 월경권은 어디까지 국가가 책임질 것인가. (중략)
최근 공공생리대 시범사업은 월경을 둘러싼 국가 책임을 처음으로 정책 의제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정책은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성·재생산권을 공공 정책으로 인정한다면, 가격과 안전성뿐 아니라 성교육, 피임, 임신중지, 생리통을 포함한 건강과 연구 영역까지 포괄하는 기준이 필요하다.여성환경연대 이안소영 대표는 “공공생리대 지원사업은 월경문제를 보편적 인권과 건강권의 문제로 진전시킨 정책으로, 앞으로는 지속적인 제품 안전관리 대책 마련, 월경교육 강화, 여성건강 연구와 제도적 지원까지 포함한 종합 정책으로 확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월경 논의가 접근성을 넘어 성·재생산 건강 전반을 아우르는 국가 책임으로 이어져야 함을 보여준다.
(박진경, 여성신문, 26.03.29)

“피해자는 처분 결과도 모르는데… 촉법소년 ‘연령 하향’이 답?”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월 촉법소년 연령 하향 여부에 대한 검토를 주문한 이후 관련 논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소년범죄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커질수록 '엄벌' 요구는 커지고 있지만, 처벌 중심 접근이 피해자 회복과 늘 맥을 함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주희 의원실과 탁틴내일에서 공동 주최한 ‘청소년 성범죄 대응과 피해자 회복을 위한 통합적 접근 모색’ 토론회가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렸다. (중략)
토론자들은 소년범죄를 단순한 일탈이나 개인 책임으로만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청소년기 범죄는 충동성, 또래 압력, 왜곡된 성 인식 등 발달적 특성과 환경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중략)
결국 핵심은 '언제,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라는 데 있다는 지적이다. 토론자들은 범행 이후 처벌보다 초기 비행 단계에서의 개입과 교육, 환경 개선이 더 효과적인 대응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중략)
이날 토론에서는 특히 소년사법 체계 전반을 '응보 중심'에서 '회복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다.
임수희 서울남부지방법원 판사는 아동사법의 방향을 '처벌'이 아닌 '권리 보장'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유엔 아동권리협약 등을 근거로 "아동은 특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는 존재"라며 "국제 기준 역시 형사처벌보다 회복과 사회 복귀를 중심에 두도록 요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피해자·가해자·공동체가 함께 참여해 관계를 회복하는 '회복적 사법'이 재범 방지와 사회 통합에 더 효과적인 접근"이라고 덧붙였다.
청소년 당사자 관점에서도 연령 하향 논의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 장효주 청소년모임 어부바 활동가는 "연령을 낮추는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방식"이라며 "교육과 사회적 지원을 강화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신선진, 여성신문, 26.04.14)

엄마 수감 뒤 방치된 아기…경찰·지자체 ‘위기 공유’ 없었다 [부모 형벌 나눠 지는 자녀]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의 수감 이후 아버지와 네 자녀가 숨진 ‘울산 일가족 사망’ 사건 당시 수사기관과 지방자치단체·교정시설 간 자녀의 위기 상황 정보가 공유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수용자 자녀 등 위기 가정의 복지 사각지대를 밝히기 위한 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2년째 표류하고 있다.
13일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달 울산 사망 가정의 어머니 김모(35)씨가 범죄에 연루돼 지난해 11월 구속된 이후 아버지와 5개월 된 자녀 등 남은 이들은 생활고를 겪었지만 경찰과 지자체에선 위기 신호를 제때 파악하지 못했다. 경찰은 지난 1월 “아이가 예비소집에 오지 않고, 보호자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초등학교 담임 교사의 112 신고를 접수해 주거지를 방문했지만, 아동 학대 정황이 없다고 보고 사건을 종결했다.
지자체는 경찰 방문으로부터 한 달이 더 지난 2월이 돼서야 위기 징후를 파악했다. 해당 가정은 지난해 3월 이미 지자체 관리 대상 가구로 선정돼 긴급 생계비 등 지원을 받았지만, 그해 12월 지원 기간이 끝났다. 울산 울주군은 지원 종료에 앞서 생계를 책임지던 김씨가 구속됐단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울주군청 관계자는 “구속 사실은 민감한 개인정보에 해당하기 때문에 수사기관과 교정시설에서도 함부로 알려주지 않는다”며 “지자체에선 공과금 체납이나 이웃 신고 등을 위기 징후를 토대로 추후에 상황을 파악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수사기관은 수사 진행 상황을 알릴 수 있는 근거가 없단 입장이다. 중앙일보가 확인한 경찰청 ‘피의자 체포 시 자녀 배려 등 유의사항’에 따르면 경찰은 2019년 일선 수사기관에 “피의자 체포로 자녀 등이 홀로 남겨지는 경우 적절한 안전 확보 수단을 강구”하라고 안내했다. 하지만 수사 현장에선 이것 만으론 부족하단 목소리가 나온다. 한 경찰 관계자는 “구체적으로 상황마다 수사기관이 어떤 조치를 해야 하는지 명확한 근거 지침이나 매뉴얼이 없다”며 “미성년 자녀가 있는 피의자는 가급적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하는 것 정도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임성빈·김예정·오삼권, 중앙일보, 26.04.14)

미 법원 'SNS 중독성' 첫 인정...메타와 유튜브 유죄 판결 받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배심원단이 25일(현지시간) 어린 시절 SNS 중독으로 고통을 겪은 20세 여성이 메타와 유튜브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기념비적인 승소 평결을 내렸다.
배심원단은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왓츠앱을 소유한 메타, 유튜브를 소유한 구글이 아동과 청소년에게 유해한 SNS 플랫폼 환경을 의도적으로 구축해 이 여성의 정신 건강을 해쳤다고 판단했다.
'케일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미국인 여성은 600만달러(약 90억원)의 손해배상금을 받게 됐으며, 이 평결은 현재 미국 법원에서 진행 중인 수백 건의 유사 소송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중략)
변호인은 무한 스크롤 같은 인스타그램의 기능이 중독성을 유발하도록 설계됐으며, 메타가 젊은 층의 플랫폼 사용을 유도하는 성장 전략을 추진해왔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전문가와 전직 메타 임원들의 증언을 토대로, 젊은 이용자들이 더 오랜 시간 플랫폼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는 점 때문에 메타가 이들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고도 덧붙였다.
(칼리 헤이스·나딘 사드·리건 모리스, BBC뉴스 코리아, 26.03.26)

‘건국의 아버지’…10대 흑인 성 착취 오점
제퍼슨은 흑인의 단물을 알차게 빨았다. 경제적으로도, 성적으로도 그랬다. 흑인 여성 노예 샐리 헤밍스를 자신의 침대로 끌어들여, 여섯 명의 사생아를 봤다. 헤밍스는 제퍼슨의 사별한 아내의 이복동생이었다. 헤밍스의 엄마는 농장주의 성 노예였고, 헤밍스 그 자신도 형부 제퍼슨의 성 노예에 가까웠다. 저주의 악순환. 제퍼슨의 노예제를 향한 이율배반은 경제사에 얼룩을 남겼다.
토머스 제퍼슨은 흑인 노예의 피와 땀 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대농장의 농장주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먹는 고기와 우유, 입는 비단옷, 거주하는 웅장한 저택이 노예들의 고된 노동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노예 없이는 제퍼슨의 윤택한 삶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본인은 와인과 캐비어를 즐기면서, 퍽퍽한 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민중의 고단함을 이해한다는 위선자의 역사는 유구한데, 제퍼슨은 그 단적인 예였다. 제퍼슨은 사람은 피부색과 관계없이 누구나 자유인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외치는 계몽주의자였다. 인디언도, 흑인 노예도, 양질의 교육과 문명 교화로 당당한 자유 시민이 될 수 있다고 힘줘 말했을 때, 그의 노예들은 채찍을 맞고 있었다.
제퍼슨의 문장으로 미국의 흑인 노예들은 가슴이 뛰었다. 제퍼슨은 미국 3대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는 아내 마사가 죽자 그녀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 재산 목록 중의 하나가 아내의 이복 여동생 샐리 헤밍스였다. 마사의 아버지가 흑인 노예를 건드려 태어난 딸. 핏줄에 흑인 노예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여 있으면 노예가 된다는 게 당대의 법이었으므로, 샐리 헤밍스는 노예로 살아야 했다. 피부색이 조금 덜 검었어도, 노예는 노예일 뿐이었다. 제퍼슨은 그녀의 육체를 탐했다. 제퍼슨은 40대였고, 헤밍스의 나이는 고작 14살이었다. 주인의 요구를 10대의 노예는 거절할 수 없었다. 헤밍스는 그렇게 여섯 아이를 낳았다. 여섯 모두 노예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다른 대감댁 흑인 노예들이 “제퍼슨이야말로 우리 흑인을 위한 정치인”이라고 목에 핏대를 세울 때, 제퍼슨의 노예들은 속이 메슥거렸다.
(강영운, 매경이코노미, 26.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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