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배우 정혜안입니다.
오늘은 ‘사라짐’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사라짐, 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아쉬움과 헛헛함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사라져‘버렸다’에 더 가까운 느낌이랄까요? 사라지는 주체보다는 사라짐을 당한(?) 입장에 더 몰입하는 경향이 있나 봅니다. 미처 내가 손쓸 수 없었던,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벌어지는 일들이요.
그렇다면 혹시, 사라짐을 목격하신 적 있으신가요? 표현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사라짐‘과 ’목격하다‘는 단어가 공존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하구요. 최근 읽고 있는 책에서 무대 공연의 관객을 ‘사라짐의 목격자’로 비유한 표현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공연예술의 가장 큰 특징은 사라짐에 있다”고요. “연극과 같은 시간예술은 시간에 깃들어 발생했다가 그 흐름과 더불어 종결된다”고요.
이렇게 보니 저는 꽤 많은 순간 사라짐의 목격자가 되어왔습니다. 왜인지 뿌듯하기도 한데요! 이 표현에 가장 좋았던 것은, 사라짐이라는 것이 긍정적인 감상으로 다시 스며드는 감각이었습니다. “점차 기억은 희미해”지며 “시간예술의 근본에는 슬픔이 있다”는 저자의 말에 백번 공감하면서도, 그렇기에 아름답다고도 생각하거든요. 때로는 희미하다는 이유로 더 애틋해지는 법이니까요. 존재하는 동안의 소중함이 증폭되는 효과가 있으니까요.
사라져서 슬프다는 것은 그만큼 좋았다는 것의 반증인데, 왜 항상 한쪽 면만 보고 다른 쪽은 보지 못하는 걸까요? 참 애석합니다.
저는 ‘찰나’의 순간을 좋아합니다. 일상 속에서, 혹은 누군가에게서 보이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할 때 굉장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어쩌면 저는 사라짐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금세 사라지기 때문에 더 귀하고, 찬란하다고 느끼는 게 아닐지요. 아, 제가 어릴 때부터 무대를 동경했던 이유 또한 사라짐에 있었나 봅니다. 존재하는 동안의 소중함을 만끽하면서요.
더 이상 사라지는 것이 마냥 슬프지만은 않을 것 같네요. (과연?)
이토록 좋은 것을 잊을 수가 있을까. 그리고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기록하기 위해 몸을 움직임으로써 행복의 구체를 깨지 않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모든 것을 잊었다. 이토록 좋은 것을 잊을 수가 있을까, 생각하고 이내 고개 저었던 내 안의 순전함만을 기억할 뿐.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8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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