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적으로 '다음에'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다음에 만나요, 다음에 꼭 갈게요. 그렇게 우리는 늘 '다음'을 담보로 오늘을 조금씩 미뤄두며 살아갑니다. 그 '다음'이 당연히 올 거라고 믿으면서요.
그런데 그 당연한 믿음이 당연하지 않은 공간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마지막 시간이 고요히 흐르는 곳, 바로 호스피스 병동이죠.
이번 호린 뉴스레터에는 매일 반복하던 요가 수련 끝에 '죽음'이라는 화두에 닿은 한 분의 글을 소개해요. 호린의 오랜 구독자이자 호린이 매주 명상수업을 여는 상암동 '요가피안'의 원장 보경님입니다. 종교도, 특별한 계기도 없던 그가 어쩌다 매주 호스피스 병동을 찾아 누군가의 마지막을 배웅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이별의 시간들이 어떻게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선명하게 깨워주었는지에 관한 기록이죠. 특히 내 안의 영성과 자비를 일깨울 수 있는 경험을 찾고 있는 호린 피플들에게 이 글이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구독자님, 이번 뉴스레터는 이런 내용으로 준비했어요!
- 요가수련자가 호스피스 봉사를 시작한 이유
- 뜻모를 경전이 만트라가 되던 날
- 이별이 깨우는 '지금 이 순간'
- 호린 피플을 위한 호스피스 봉사 안내서
요가수련에서 시작된 '죽음에 대한 사유'
살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 한 번쯤 있으신가요? 예전의 저는 죽음을 그렇게 가까이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특정 종교를 가진 적도 없었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적도 없었죠. 그런 제가 죽음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의외로 거창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반복하던 요가 수련이었어요.
요가 수업의 마지막에는 모든 움직임을 내려놓고 가만히 누워 휴식하는 '사바아사나(송장 자세)'를 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저는 그 시간이 단순한 휴식을 넘어, 마치 잠시 죽음을 경험하는 시간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몸의 긴장을 모두 내려놓고 생각마저 고요해지는 그 순간들을 매일 반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죽음에 대해 사유하게 되었어요.
그 사유가 쌓이면서, 멀게만 느껴지던 죽음 너머의 세계가 어느덧 제 안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진 거죠. 누군가에게 설득당했다기보다, 오래 잊고 있던 감각을 다시 떠올리는 느낌에 가까웠달까요. 그렇게 삶과 죽음에 대한 관심이 깊어질수록 한 공간이 자꾸 마음에 밟히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호스피스 병동이었죠.
주변에 호스피스 봉사를 하던 지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어요. 살면서 그런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던 제게, 수련 끝에 가 닿은 그곳은 참 낯설고도 필연적인 목적지처럼 다가왔습니다.

내가 정말 매주 이곳을 찾을 수 있을까?
처음에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호기심인 줄 알았는데, 그 생각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막상 알아보니 마음만으로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은 아니더라고요. 일정 시간 이상의 교육을 이수해야 했고, 모집도 자주 열리지 않았으니까요. 처음에는 시기를 놓쳐 한 번 접어야 했지만, 한참 뒤 다시 기회가 생겨 3일간의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교육을 받고서도 바로 봉사를 시작할 마음이 선뜻 생기지는 않았어요.
저는 그저 마음이 동할 때 가끔 가서 조용히 돕고 오면 되는 일이라고 가볍게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교육을 받으며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는 뜻밖에도 ‘꾸준함’이었어요. 환자분들은 생각보다 봉사자들의 방문을 오래 기억하고 또 기다리신다고 해요. 그래서 최소 6개월 이상, 매주 한 번씩은 정기적으로 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셨죠.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음이 많이 망설여졌어요.
‘한 번도 이런 공간을 가까이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내가 정말 매주 이곳을 찾을 수 있을까.’
두려움도 있었지만, 한번은 직접 마주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저는 자원봉사 신청서를 내게 되었습니다. 첫날 병동의 문을 열었을 때, 저를 맞이한 건 예상외로 참 따뜻하고 고요한 풍경이었어요. 병의 통증과 죽음의 두려움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을 거라는 지레짐작과 달리, 대부분의 환자분들이 참 온화한 얼굴을 하고 계셨거든요. 막상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제가 상상했던 어두운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결의 평온함이었습니다.
그렇게 매주 같은 병동을 드나들면서, 그 공간을 가득 채운 온기를 알 것 같았어요. 의사와 간호사, 수많은 봉사자들까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오직 한 사람의 마지막 시간을 편안하게 지켜주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거든요. 그 어떤 계산이나 이익도 없이 말이죠. 타인을 위해 마음을 쓰는 사람들 곁에 있다 보니, 저 역시 같은 방향으로 마음을 쓰게 되더라고요. 다정함은 그렇게 소리 없이 번져서, 어느새 제 마음의 결까지 바꾸어 놓고 있었습니다.
임종한 스님을 위한 정성스러운 기도
종교가 있는 분들에게는 신앙이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 앞에서 큰 위안이 되곤 합니다. 이곳에서는 환자분들이 마지막 순간에 평온을 찾도록 돕는 영적 돌봄이 세심하게 이루어져요. 환자분의 종교에 따라 성직자나 스님이 오셔서 기도를 해주시기도 하고,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경전을 읽어드리거나 찬송을 불러드리기도 해요.
저의 경우에는 종교를 따로 두고 있진 않지만 우연한 기회로 불교 봉사팀에 합류하게 되었어요. 평소에는 따뜻한 오일로 환자분들의 발 마사지를 해드리는 봉사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저처럼 종교가 없는 사람도 충분히 참여할 수 있어요. 가끔 종교에 의지를 많이 하시는 환자분께는 경전을 읽어드리기도 하고요.
하루는 여느 때처럼 봉사를 하고 있는데 수간호사님께서 조심스럽게 부탁을 하나 꺼내셨습니다. 오전에 임종하신 스님이 계신데, 그분을 위해 기도를 해줄 수 있겠냐고 하셨죠. 이미 임종하신 분을 마주하는 일은 자칫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기에 수간호사님도 무척 조심스러워하셨어요. 봉사자들은 모두 흔쾌히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 제 마음은 굉장히 떨렸습니다.
가족의 장례를 치르며 고인을 본 적은 있지만, 생판 모르는 타인의 죽음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거든요.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이 정돈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배려해 주는 호스피스 병동답게, 오전에 임종하신 스님도 오후가 되어야 고인을 모실 채비를 해드릴 수 있었어요. 그때까지는 조용한 1인실에서 머물고 계셨죠.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 안에는 이전부터 틀어두었을 잔잔한 불경 소리가 흐르고 있었어요. 침대 위 고인의 얼굴은 하얀 천으로 조용히 가려져 있었지만, 방 안을 채운 특유의 서늘하고도 엄숙한 공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게 되더라고요.

뜻 모를 경전이 만트라가 되던 날
손끝에 살짝 땀이 배어날 만큼 긴장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평소 기도 봉사는 봉사자들끼리 경전을 파트별로 나누어서 나직하고 잔잔하게 읊조리듯 읽어드리곤 해요. 하지만 임종이 임박했거나 막 숨을 거두신 분이 계실 때는 달라요. 그 공간이 가득 차도록 모두가 마음을 모아 정말 큰 소리로 읽어야 하거든요.
실제로 임종 직후에도 청각은 비교적 늦게까지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연구들이 있기에 호스피스 현장에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따뜻한 말과 기도를 건네는 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우리 봉사자들은 어쩌면 이 기도의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큰 소리로 경전을 읽어 내려갔어요.
아직 마지막 여정의 길목에 머물러 계실지 모르는 스님께서 모든 고통을 내려놓고, 두려움 없이 평안한 마음으로 다음 걸음을 내디디시기를 바라면서요.저는 뜻도 모르는 아미타경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비록 우리말로 쓰여 있었지만 신자가 아닌 제게는 그 문장들의 의미가 온전히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제 마음속에는 단 하나, 스님께서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부처님이 계시는 그 어느 곳으로 나아가시길 바라는 마음뿐이었어요. 그렇게 한 자 한 자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갈수록 이상하게도 그 울림이 저를 같이 흔들고 있었달까요. 분명 스님을 위해 시작한 기도였는데, 어느새 저 역시 그 평온한 진동 안에 깊숙이 들어온 것 같았습니다. 그때 새삼 실감하게 되었어요.
뜻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진심을 담아 소리 내어 읽을 때, 그것은 단순한 낭독을 넘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만트라'가 된다는 것을요. 어쩌면 만트라란 어렵고 특별한 진언 같은 게 아닌, 그저 진심 어린 소리의 진동일 뿐일지도 몰라요. 그렇게 기도 봉사를 마치고 1인실을 나서는데, 평소 하던 발 마사지 봉사보다 곱절은 더 진이 빠져 정신이 혼미했어요.
누군가의 마지막 길을 진심으로 배웅하는 일, 그리고 그 간절한 기도를 20분 넘게 흐트러짐 없이 유지하는 것은 생각보다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더라고요. 내가 가진 온 마음을 아낌없이 쏟아내야 비로소 한 사람을 보낼 수 있음을 알게 된 날이었습니다.
이별이 깨우는 '지금 이 순간’

호스피스 병동은 매주 밀도 높은 이별이 너무나 당연하게 흐르는 공간입니다. 죽음을 이토록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일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더라고요. 특히 따뜻한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분들과의 이별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요.
하루는 휠체어 산책이 예정되어 있던 환자분이 갑작스러운 고열로 방 밖을 나서지 못하셨어요. 아쉬운 마음에 침대맡에서 굳어 있는 발을 정성껏 마사지해 드렸더니, 고맙다며 아이스크림을 사주시겠다고 몸을 일으키려고 하셨어요. 저는 그저 가볍게 웃으며 “다음 주에 사주시면 되죠” 하고 손을 잡고 아픈 환자분을 조심스레 다독여 드렸어요.
하지만 일주일 뒤 다시 병동을 찾았을 때 제가 마주한 건, 1인실로 옮겨져 마지막 임종을 준비하고 계신 그분의 모습이었습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함께 웃으며 아이스크림 이야기를 나누었던 분이었는데 말이죠. 다음 주에 사주겠다던 그 달콤한 약속은 결국 지켜지지 못한 기약이 되었어요.
우리는 습관처럼 '다음'을 이야기하지만, 이곳에서는 그 '다음'이 결코 당연하지 않아요. 그래서 호스피스 병동에서의 '다음'은 약속이라기보다 바람에 가깝습니다.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 같은 것이죠.
다음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저는 발 마사지를 할 때도, 기도를 할 때도 늘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지금 이 순간 건네는 손길과 마음이 그분께는 생의 마지막 기억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지금을 살아야 한다.'
어쩌면 너무 흔해서 식상하게 들리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호스피스 병동에서 만난 수많은 이별은 그 말을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오게 해요.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머문다는 것, 즉 '현존'의 의미를 저는 이 봉사를 통해서 매주 알아차리게 됩니다.
내일도, 다음 주도 당연히 주어질 것처럼 살아가지만, 사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뿐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저절로 자애 명상이 되는 곳
명상 중에 나와 타인, 나아가 모든 존재가 고통에서 벗어나 평안하기를 마음속으로 빌어주는 자애명상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 자애명상을 배웠을 때 잘되지 않았어요. 아무리 외워봐도 그 문장들은 어딘가 허공에 떠있는 느낌 같았어요.
타인의 아픔이라는 게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까지는 내려오지 않았던 거죠. 그런데 호스피스 병동에 있어보니 애써 일으키려 해도 일어나지 않던 그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더라고요. 숨을 의식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고통과 슬픔이 들숨처럼 마음 안으로 들어오고, 곁을 지키며 건네는 작은 기도가 날숨처럼 흘러나가니까요.
그렇게 타인의 아픔을 들이마시는 시간 쌓일수록 이상하게 가슴 깊은 곳에서 참회에 가까운 마음이 올라오곤 했어요. 무엇을 향한 뉘우침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살아오며 참 많은 인연을 맺고 저마다의 흔적을 남기며 살아왔구나 하는 막연하면서도 묵직한 감각이랄까요. 좋은 일을 해보려고 시작한 봉사였는데 정작 비워지고 씻겨 나가는 건 제 안의 해묵은 감정들과 욕심들이었던 거죠.
그래서인지 봉사를 마치고 병원 문을 나설 때면, 불교의 '업장소멸'이라는 말이 문득 떠오르기도 해요. 이 시간 속에서 제 안의 모난 부분들이 조금씩 깎여 나가고, 그 자리에 사랑과 연민이 조금씩 스며드는 것을 느끼니까요. 이렇게 가만히 눈을 감고 바랬던 자애가 봉사를 통해서 비로소 제 삶 속에서 움직이는 명상으로 매주 피어나고 있습니다.

호린 피플을 위한 호스피스 봉사 안내서
이렇게 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혹시 “나도 한번 해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의 작은 파동이 일어난 호린 피플이 계실지 모르겠어요. 만약 그렇다면, 이 길을 먼저 조금 걸어본 사람으로서 실용적인 안내서를 조심스레 건네어 봅니다. 호스피스 봉사는 마음이 동했을 때 바로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환자분들의 마지막 여정을 돕는 일인 만큼 사전 준비가 필요합니다.
Q. 어디서 신청하나요?
여러분이 사시는 지역의 호스피스 전문기관은 중앙 호스피스센터(hospice.go.kr)의 '전문기관 찾기'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구체적인 자원봉사자 모집·교육 공지는 각 대학병원 완화의료센터나 의료 사회복지팀 홈페이지에서 따로 확인하시면 됩니다.
Q. 종교가 없어도 할 수 있나요?
네, 당연히 가능합니다. 호스피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특정 신앙의 유무가 아니라, 생명과 마음에 대한 깊은 존중이니까요. 실제로 마지막 순간까지 종교를 갖지 않는 분들도 많고, 환자분의 성향과 선택에 맞춰 돌봄이 제공됩니다. 만약 경전을 낭독하는 기도 봉사가 심적으로 부담스럽다면, 환자분들의 굳은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발 마사지 봉사'나 '산책 봉사'를 주로 맡으실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Q. 얼마나 자주, 오래 해야 하나요?
병동의 환자분들은 생각보다 봉사자의 방문을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병원 측에서도 최소 6개월 이상, 주 1회 정기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분을 원합니다. 만약 지금 내 일상이 너무 가변적이거나 바쁘다면, 이 약속을 책임감 있게 지킬 수 있을 때로 잠시 미뤄두시는 게 환자분들을 위한 배려가 될 수 있어요.
Q. 어떤 분께는 권하지 않나요?
가까운 가족이나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아직 내 안의 슬픔이 크게 출렁이는 분들께는 권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곳을 가벼운 호기심이나 스펙 쌓기용 경험으로만 생각하시는 분들도 환자분들의 깊은 영혼을 온전히 마주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 내 내면의 중심이 단단하고 고요하게 서 있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노크해 주세요.
Q. 활동 시간과 사전 교육은 어떻게 되나요?
봉사는 주로 평일 오전이나 오후 시간대에 이루어지기에, 주말에만 시간을 낼 수 있는 직장인 분들께는 현실적인 제약이 있을 수 있어요. 또한, 기관에 따라 평일 중 2~3일에 걸쳐 사전 필수 교육을 진행합니다. 이 교육을 신청하실 직장인 호린 피플들은 연차를 활용하셔야 하니 이 점을 꼭 염두에 두세요. (팁이 있다면, 교육만 미리 들어놓고 실제 자원봉사 활동은 여유가 생기는 먼 훗날 신청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 짧은 안내가 누군가의 첫걸음에 작은 등불이 되면 좋겠어요. 혹 지금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처음 제게 그랬듯, 그 작은 파동은 잊힐 만하면 다시 마음을 두드릴 테니까요.
보경님의 따뜻하고 다정한 글, 구독자님은 어떻게 읽으셨나요? 저도 보경님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호스피스 봉사라는 게 있다는 것,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몰랐어요. 그런데 보경님의 체험담을 들으며 죽음을 마주하는 이 경험이 삶을 더 선명히 볼 수 있게 해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삶의 전환점이 필요할 때 이 글이 저에게도 호린 피플들에게 작은 삶의 힌트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소중한 경험 공유해주신 보경님께 감사드리며, 구독자님도 '지금 이 순간'을 사는 편안한 주말 보내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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