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26 | 195호 | 구독하기 | 지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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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가 살아 있어도 결정이 늦으면 조직은 멈춘다. 구성원이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고, 리더가 충분히 듣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관계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일이 추진되지는 않는다. 어느 순간에는 방향을 정해야 하고, 우선순위를 선택해야 하며, 무엇을 할 것인지와 하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좋은 관계는 의사결정이 실행으로 이어지도록 돕는 기반이지만 의사결정을 대신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많은 리더가 결정 앞에서 멈춰 선다. 결정을 피하고 싶어서 만은 아니다. 오히려 더 잘 결정하고 싶기 때문에 머뭇거린다. 시장 자료를 더 확인하고, 고객 반응을 더 살피고, 경쟁사의 움직임을 더 찾아보고, 구성원의 의견을 한 번 더 듣는다. 여기에 AI까지 더해지면서 정보는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넓게 리더 앞에 쌓인다. 검색하면 자료가 나오고, AI에게 물으면 여러 관점이 정리되며, 데이터 대시보드는 실시간으로 새로운 수치를 보여준다. 과거에는 정보가 부족해서 결정이 어려웠다면, 지금은 정보가 계속 추가되어서 결정을 끝내기 어렵다.

정보가 많아진 환경에서 리더가 마주하는 어려움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정보가 많아질수록 선택지가 늘어난다. 정보가 많아지면 리더는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선택해야 할 가능성이 늘어난다. A안이 좋아 보이다가도 다른 자료를 보면 B안의 근거가 생기고, B안으로 기울다가도 C안의 가능성이 보인다. 선택지가 늘어난다는 것은 기회가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포기해야 할 것도 늘어난다는 뜻이다. 리더는 무엇을 선택할지뿐 아니라 무엇을 선택하지 않을지도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정보가 많을수록 결정은 더 무거워진다.
둘째, 같은 정보도 신뢰도와 해석이 갈라진다. AI 시대에는 정보 접근성은 높아졌지만, 그 정보를 어디까지 믿을지 판단하는 부담은 오히려 커졌다. 어떤 자료는 객관적 데이터처럼 보이지만 특정 관점으로 해석된 결과일 수 있고, 어떤 AI 요약은 그럴듯하지만 출처와 맥락이 불분명할 수 있다. 더 어려운 것은 같은 정보를 보고도 구성원마다 다른 결론을 낸다는 점이다. 영업은 시장 기회라고 보고, 재무는 비용 리스크라고 보며, 개발 부서는 구현 난이도를 먼저 본다. 정보는 하나인데 해석은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이때 리더가 해야 할 일은 지금 우리 조직이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지를 정하는 일이다.
문제는 많은 리더가 이 지점에서 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데 있다.
“조금만 더 확인해봅시다.”
한두 번이면 신중함이다. 그러나 이 말이 반복되면 신중함은 결정 지연이 된다. 그리고 결정 지연은 중립적인 상태가 아니다. 결정이 늦어지는 동안 구성원은 각자 다른 가정으로 움직이거나, 아예 움직이지 않는다. 우선순위는 흐려지고, 실행의 타이밍은 지나가며, 책임의 방향도 모호해진다. 리더는 더 정확한 판단을 위해 기다린다고 생각하지만, 구성원은 점점 방향을 잃는다. 의사결정이 늦어지는 시간은 단순한 대기 시간이 아니다. 조직의 에너지가 분산되는 시간이다.

좋은 결정은 정보를 더 많이 모으는 데서만 나오지 않는다. 무엇을 기준으로 정보를 볼 것인지, 어느 지점에서 정보 수집을 멈출 것인지를 정할 때 나온다. 결국 의사결정의 본질은 정보가 부족한가 많은가의 문제가 아니다. 언제까지 볼 것인가, 무엇을 기준으로 볼 것인가, 그리고 어느 순간 실행으로 옮길 것인가의 문제이다.
Eisenhardt(1989)의 연구는 흥미로운 역설을 보여준다[1]. 빠르고 좋은 결정을 내리는 리더들은 정보를 적게 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실시간 정보를 더 자주 살피고 더 많은 대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그들은 정보를 쌓아두지 않았다. 명확한 기준 위에서 대안을 비교하고, 결정과 실행을 곧바로 연결시켰다. 빠른 결정은 직감이 아니라 기준 있는 정보 활용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리더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첫째, 이번 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무엇인지 먼저 정해야 한다. 속도인가, 품질인가, 고객 가치인가, 비용인가, 리스크 관리인가. 기준이 없으면 모든 정보가 중요해 보인다. 리더의 역할은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결정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둘째, 어떤 정보까지만 볼 것인지 정해야 한다. 더 보면 좋은 정보와 반드시 봐야 할 정보는 다르다. 리더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 정보가 들어오면 결론이 달라질 수 있는가?” 결론을 바꿀 수 있는 정보라면 더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결론을 바꾸지 못하고 불안만 줄이기 위한 정보라면, 그것은 결정 자료가 아니라 참고 자료이다. 많은 리더가 참고 자료를 결정 자료처럼 다루기 때문에 결정이 늦어진다.
셋째, 결정 후 무엇을 점검할지 미리 정해야 한다.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 결정한다는 것은 한 번에 완벽한 답을 내겠다는 뜻이 아니다. 결정하고, 실행하고, 중간에 점검하며 조정하겠다는 뜻이다. 언제 중간점검을 할 것인지, 어떤 지표가 예상과 다르면 방향을 수정할 것인지, 누가 실행 과정의 신호를 보고할 것인지 정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결정의 부담은 줄어든다. 결정이 완성된 답이 아니라 검증 가능한 가설이 되기 때문이다.
AI 시대의 리더십은 더 많이 아는 능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보가 많을수록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검색이 아니라 더 분명한 기준이다. 더 많은 자료가 아니라, 무엇을 기준으로 자료를 볼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다. 더 많은 검토가 아니라, 어느 순간 검토를 멈추고 실행으로 넘어갈 것인지에 대한 책임이다.

리더십은 불완전함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 아니다.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도 기준을 세우고, 정보 수집을 멈출 지점을 정하며, 결정한 뒤 실행 속에서 조정하는 능력이다.
[1] Eisenhardt, K. M. (1989). Making Fast Strategic Decisions in High-Velocity Environments. Academy of Management Journal, 32(3), 543–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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