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 갈수록 잘 모르겠다.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킬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거 같은데, 아래 내용처럼 이별의 고통이 얽혀있다면, 지고지순한 숭고함 보다 감정의 혼합체에 가깝지 않나?
-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주체성의 산물이기에 ‘나’에 대한 자긍과 자립심이 없으면 연인은 물론 이웃 사랑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공들여 입증한다.
- 세가지 한계
1. 먼저 지적할 것은 동성애에 관한 사항이다. 프롬에게 성적인 사랑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이상적이다. “남녀 사이의 사랑을 통해 남녀는 각기 재탄생하는 것이다.”
2. 두 번째로 프롬의 거의 모든 저작에서 발견되는 사도마조히즘에 대한 판에 박은 해석이다. 그에게 사도마조히즘 관계는 주체가 되지 못한 미숙한 두 인격이 조화 없이 공서(共棲, 전혀 다른 것이 함께함)하는 상태다.
3. 세 번째 한계는 이별에 대한 의미 부여가 없는 것인데, 사랑의 기술을 이야기하면서 이별의 가치를 놓친 것은 중대한 결함이죠.
- 수십 년 만에 프롬을 다시 읽은 것은 헤르만 슈미츠의 〈사랑의 현상학:환상 없는 사랑을 위하여〉(그린비, 2022)를 잘 읽기 위해서였다.
- 현상은 본질 또는 이데아(이상)의 반대말이므로 현상학은 자연히 그리스철학 이래로 서양철학이 추구해온 이성 중심의 목적론을 거부한다.
- 사랑에는 무조건적인 사랑(아가페)도 있고, 우애(필리아)도 있고, ‘파트너 사랑’ 즉 에로스도 있다.
- 한국어판 제목에 덧붙여진 부제 ‘환상 없는 사랑을 위하여’에서 환상은 이데아로 바꾸어 읽을 수 있다. 사랑의 이데아라면, ‘사랑이란 나누어졌던 반쪽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던 플라톤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 ‘둘이서 하나가 되는’ 사랑의 이데아는 가능할까. 나누어졌던 반쪽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서로 붙이고 접합시킬 수 있는 물체, 곧 사물뿐이다.
- 인간은 자신들의 사랑을 상황으로 그리고 감정으로 서로 공유할 뿐인데, 알다시피 상황도 감정도 유동적이다. 게다가 인간은 주체적으로 존재하므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일은 사실상 영원히 불가능”하다.
- 플라톤식 사랑의 이데아에서는 이별이 불가능하다. 원래 나의 반쪽이었던 당신이 떠나는 것을 어찌 감내하랴. 실은 이 주제는 대중가요의 몫이다.
- 하지만 사랑의 완성은 이별이다. 진짜 사랑했다면 헤어질 때도 “사뿐히” 밟고 갈 수 있게 주단을 깔아주어야 하지 않겠나?
- ‘함께 있음’의 원천은 ‘개별화된 각자’라고 말하는 헤르만 슈미츠는 사랑 속에는 이별에 대한 불안과 고통이 내밀하게 얽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삶의 주관성을 양해하는 커플에게는 오히려 그 “고통이 두 사람을 결합시키고, 또한 두 사람의 공동성에 무게와 온기를 부여해준다”.
# 기사 요약글입니다. 원문은 링크를 확인하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