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운영자 Beomkie의 개인적인 생각, 자동차라는 제품을 여러 관점으로 바라보며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어보세요!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시계에도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터스포츠와 시계는 오랜 시간 협력 관계를 이어왔고, 수십만 개의 정밀한 부품이 조화를 이루는 공통점을 갖고 있죠. 그래서 자동차에 관심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시계에 한 번쯤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그런 케이스였습니다. 시계를 전문가 수준으로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관심보다는 조금 더 깊게 들여다봤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시계 이야기냐고요?’ 오늘의 오피니언 주제가 바로 이 시계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야기의 중심은 자동차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고급 자동차를 만드는 제조사들이 최근 맞닥뜨린 위기에 대한 것입니다.
일단 시계 이야기부터 해볼게요.
우선 쿼츠 이야기 입니다.
손목시계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다면, ‘쿼츠’라는 단어조차 낯설게 느껴지실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차고 다니는 손목시계 역시, 사실은 깊이 들여다볼 만한 기술과 역사를 품고 있습니다.
쿼츠 시계는 배터리로 작동하는 시계입니다. 내부에 있는 아주 작은 수정(Quartz crystal)이 전기를 받으면 정밀하게 진동하고, 이 진동을 바탕으로 시간을 표시하는 구조죠.
디지털 시계, 저렴한 아날로그 손목시계, 벽걸이 시계, 그리고 전자레인지나 자동차 계기판에 있는 시계까지 우리 일상 곳곳에서 쿼츠 시계를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 쿼츠 시계는 1969년, 일본의 세이코(SEIKO)가 세계 최초로 선보였습니다.
당시까지 시계는 태엽을 감거나 자동으로 움직이는 ‘기계식’ 방식이 주류였는데, 세이코는 쿼츠 결정이 전기를 받으면 매우 정확하게 진동한다는 원리를 활용해 기계식보다 훨씬 정확하고 저렴한 시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시계 산업의 판도를 뒤바꾼 결정적인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른바 ‘쿼츠 파동(Quartz Shock)’입니다.
쿼츠 파동은 1970년대, 시계 산업 전반을 뒤흔든 거대한 충격이었습니다. 1969년, 일본 세이코(SEIKO)가 세계 최초로 쿼츠 시계를 출시하면서 정밀함과 가격 경쟁력을 동시에 갖춘 이 기술이 스위스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고급 시계 브랜드들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었죠.
그 결과, 일부 브랜드는 도산하거나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겪어야 했고, 시계 산업은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흐름이 완전히 바뀌는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쿼츠 파동은 단순한 기술 혁신을 넘어, 산업의 흐름 자체를 바꿔놓은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명품 시계 브랜드들도 쿼츠 시계를 내놓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판매량은 처참했죠. 소비자들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의 결말은 우리가 알다시피 기계식 시계로 기술이 아닌 가치와 정체성에 집중하며 브랜드의 가치를 잃지 않고 여전히 건재하고 있습니다. 쿼츠보다 정밀하지 않지만, 사람의 손으로 하나하나 조립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수리해서 쓸 수 있는 ‘기계적 아름다움’을 강조했죠. 그리고 소비자들은 그 가치를 인정하고 기꺼이 구매를 하고 있습니다.
스마트 워치라는 또 다른 난관을 맞이 했지만... 어쨌든 쿼츠 파동은 이렇게 일단락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소비자들은 쿼츠가 들어간 롤렉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멘트를 조금만 바꾸면 우리는 현재 고급 자동차 회사들이 왜 머리가 아픈지 알 수 있습니다.
페라리에서 만든 전기차, 사시겠어요?😒
앞서 이야기한 쿼츠 파동은 오늘날 전기차 바람이 불고 있는 자동차 산업의 흐름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세이코는 그 당시 시계 산업의 혁신을 주도했던 존재였고, 이는 지금의 테슬라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죠. 반면, 롤렉스나 파텍필립 같은 명품 시계 브랜드는 오늘날의 페라리, 포르쉐, 부가티와 같은 고급 자동차 브랜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동차 산업이 전기차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자, 고급 브랜드들 역시 모두 전기차 개발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산업의 일부로서 이 흐름에 올라타야만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 변화가 소비자의 자발적인 기대나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산업 구조의 전환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데 있습니다. 마치 쿼츠 파동 당시 명품 시계 브랜드들이 기술보다는 브랜드 정체성과 감성에 집중하며 방향을 재정의했듯, 지금의 고급 자동차 브랜드들 역시 진짜 고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는 점 입니다.
고객들이 원하지 않더라.
전기차 시대가 도래하면서, 하이퍼카와 슈퍼카 시장에도 전동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크로아티아의 신생 브랜드 ‘리막(Rimac)’이 있습니다. 리막은 고성능 전기차에 대한 높은 기술력과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전기 하이퍼카 시장을 선도해 왔습니다. 특히 (폭스바겐 그룹 투자 과정 중)부가티까지 인수하며 보여준 그들의 성장은 단기간에 이룬 눈부신 성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러나 최근 리막의 창업자 마테 리막(Mate Rimac)은 2024년 영국에서 열린 한 컨퍼런스에서 흥미로운 발언을 남겼습니다. 2021년에 출시되어 150대 한정 생산된 자사의 전기 하이퍼카 ‘네베라(Nevera)’가 여전히 주문 가능한 상태라는 점을 언급하며, “럭셔리 및 고성능 차량을 구매하는 부자들은 전기 스포츠카에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한 것이죠. 이어 그는, “전기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 이상의 가치를 전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리막은 최근 부가티 브랜드를 통해 내연기관 모델을 선보이고 있으며, 이미 2017년부터 리막을 위한 내연기관 엔진 개발을 진행해왔다는 사실도 공개했습니다.
아직 시장이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것 같습니다.
많은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들은 2020년 초반, EU가 내연기관 차량 판매를 금지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자 이에 발맞춰 각자의 전동화 로드맵을 수립했습니다. 그리고 그 로드맵에 따르면, 2026년은 수많은 슈퍼 전기차가 등장하는 해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거의 모든 브랜드가 전략을 수정하기 시작한 것이죠.
람보르기니는 전기 콘셉트카 ‘Lanzador(란차도르)’를 공개하며 전동화 의지를 보여왔지만, 전기차 시장이 2026년까지 충분히 성숙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과, 럭셔리 세그먼트 내에서 실질적인 수요가 부족하다는 판단에 따라 전기차 출시 계획을 2029년으로 연기했습니다.
페라리도 비슷한 노선을 따르고 있습니다. 애플의 전 수석 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Jony Ive)가 디자인을 맡고, 한국의 배터리 및 디스플레이 기술이 적용될 예정인 전기차 프로젝트는 원래 2026년 공개를 목표로 했지만, 페라리 역시 전략을 재조정하며 2028년으로 일정을 미뤘습니다. 그들도 아직은 확신이 없는 겁니다. 전동화 흐름이 명확하긴 하지만, 지금은 시장을 좀 더 지켜보고 싶다는 것이죠.
가장 전동화가 빨랐던 포르쉐
포르쉐는 럭셔리 브랜드 중 가장 빠르게 전동화에 나선 브랜드입니다. 브랜드 최초의 전기차 타이칸(Taycan)은 큰 주목을 받았고, 최근에는 가장 많이 판매되는 모델인 마칸(Macan)을 전기차 모델로만 출시하며 전동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포르쉐라고 해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2024년, 포르쉐의 전반적인 판매량은 감소세를 보였고, 타이칸의 판매량은 지속적으로 하락(변화 없이 오랜 시간 판매한 영향도 있음)했습니다. 전기차로 새롭게 선보인 마칸 EV 역시 출시 직후 시장 반응은 다소 냉담했죠. 마칸은 오랫동안 유럽 등 여러 국가에서 사랑받아온 포르쉐의 엔트리 SUV였는데, 전동화 이후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수요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많았습니다. 물론 최근 들어서는 대체 모델이 없다는 점에서 마칸 EV의 판매량이 다시 오르고 있긴 하지만, 이전 내연기관 모델만큼의 성과를 낼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쉐는 여전히 대부분의 모델을 하이브리드 혹은 전기차로 전환하며 럭셔리 브랜드 중 가장 적극적인 전동화 행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는 과거 포르쉐가 ‘카이엔(Cayenne)’이라는 최초의 슈퍼카 브랜드 SUV를 과감히 선보이며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던 전략과 비슷한 접근일지도 모릅니다. 전기차 시대에도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다시 한번 시장의 흐름을 주도하려는 포르쉐만의 방식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반대로 유리한 럭셔리 브랜드도 있다.
슈퍼카나 스포츠카처럼 내연기관 특유의 엔진 사운드와 감성이 중요하지 않다면, 전동화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롤스로이스는 2023년 말, 첫 전동화 모델 ‘스펙터(Spectre)’를 공개했습니다. 2+2 구조의 쿠페 형태로, 가격은 약 7억 원이 넘는 고가의 전기차였죠.
스펙터는 2024년 유럽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고, 국내에서도 전체 롤스로이스 판매량 중 약 30%를 차지할 만큼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참고로, 롤스로이스는 브랜드 특성상 모델별 정확한 판매 수치를 공개하지 않습니다.)
롤스로이스는 오랫동안 6.75L V12기통 엔진으로 강력한 성능과 정숙성을 동시에 추구해왔지만, 사실 이 브랜드의 진정한 가치는 파워트레인보다는 장인의 손길로 완성된 인테리어와 외장, 극도의 정숙성과 안락한 승차감에 있었습니다. 수백 kg에 달하는 방음 소재들이 차량 전체에 적용될 정도죠. 그렇기 때문일까요? 엔진 사운드가 사라져도, 오히려 더 조용하게 강력한 출력을 낼 수 있는 전기차가 브랜드의 가치와 더 잘 어울린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실제로 스펙터의 등장 이후, 판매량 감소나 브랜드 가치 하락에 대한 우려는 크지 않았습니다.
롤스로이스는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 두 번째 전동화 모델의 출시를 준비 중입니다.
롤렉스보다 카시오가 유리할 때도 있다.
전기차 시대에 접어들며, 한 가지 흥미로운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내연기관 대비 상대적으로)모두가 고성능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죠.
시계로 비유하자면, 롤렉스는 브랜드 자체로 ‘고가’의 출발점을 갖고 있는 반면, 카시오는 ‘가성비’라는 출발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둘 다 똑같이 정확하고 튼튼한 것에 가치를 맞춘 시계를 만든다면, 소비자는 굳이 더 비싼 롤렉스를 선택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와 비슷하게, 현대차 같은 대중 브랜드가 고성능 전기차를 만들었을 때 사람들은 여전히 “대중 브랜드인데?“라는 인식의 장벽을 가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브랜드와 관계없이 전기차의 성능이 상향 평준화되면서그 차이는 점점 무의미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고점입니다. 럭셔리 브랜드는 기본 가격대가 높기 때문에, 그만큼 소비자가 기대하는 ‘가치’도 훨씬 높아집니다. 하지만 전기차는 감성보다는 스펙 중심의 시장이며 그 스펙의 기준이 상향 평준화 되었기 때문에 그 기대치를 만족시키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거죠.
결국, 같은 성능을 보여주는 전기차라면 ‘가성비로 만족을 주는 대중 브랜드’가 오히려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습니다. 브랜드의 시작점이 다르기 때문에, 기대와 실망의 간극도 다른 셈이죠.
※ 그럼에도 아이오닉 5N 등 대중 브랜드의 고성능 전기자동차들이 쉽게 도로에서 보이지 않는 만큼 여전히 쉽게 구매가 이루어지는 시장은 나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페라리, 람보르기니 등의 럭셔리 브랜드들이 계획을 미루는 이유가 어느 정도 공감이 됩니다.
재빠르게 바뀌는 세상 속 그 중간 어느 지점
결국, 지금 우리는 자동차 산업의 ‘쿼츠 파동’과 같은 변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기술은 평준화되고 있지만, 소비자의 기대와 감성은 여전히 브랜드마다 다르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빠르고 정숙한 전기차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이 브랜드의 정체성과 가격, 감성까지 설득할 수 있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일부 고성능 브랜드들은 여전히 내연기관의 가치를 놓지 않으려 하고, 합성 연료나 탄소중립 연료 기술 같은 대체 방식을 모색하며 ‘전기차가 유일한 미래는 아닐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조심스럽게 내비치고 있습니다.
마치 기계식 시계가 기술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치의 영역’에서 살아남았듯, 내연기관 역시 기능을 넘어 감성과 정체성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앞으로 내연기관이 감성의 영역으로 살아남을지, 혹은 완전히 새로운 고성능 전기차 시장이 열릴지는 아직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브랜드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지금은 그저, 소비자와 브랜드 모두가 실험을 거듭하는 시장의 과도기에 들어섰습니다.
“롤렉스에서 만든 쿼츠 시계, 사시겠어요?”
글의 제목이자, 마지막으로 던지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반대로 그 질문을 받아든 브랜드의 고민, 조금은 공감되시나요?
Written by @beomk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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