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채원입니다.
지난 글에서 AI한테 PPT 만들어달라고 하지 말고 HTML로 시키라는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같은 AI, 같은 내용인데 출력 형식 하나 바꿨더니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또 한 단계 달라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slides-grab이라는 도구를 써봤습니다. 이것도 HTML 기반인데, 결과물이 저번에 제가 직접 "HTML로 만들어줘"로 뽑던 것과 또 달랐습니다. 더 정돈됐고, 더 일관됐고, 더 완성도가 있었습니다.
같은 HTML 기반인데 왜 이렇게 다를까. 궁금해서 파봤습니다.
slides-grab은 뭘 하는 도구인가
이 도구는 슬라이드 만드는 과정을 3단계로 나눕니다.
1단계. Plan (계획)
슬라이드 아웃라인을 주면, 도구가 아웃라인 맥락을 읽어서 35개의 프리셋 스타일 중 맞는 후보 몇 개를 추천해줍니다.
저는 사업계획서 아웃라인을 그대로 던져줬습니다. 톤이나 청중을 따로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아웃라인 자체에서 맥락을 읽어내서 모던한 코퍼레이트 스타일을 후보로 올려주었습니다.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고르면 되고, 다 별로면 다른 후보를 보여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스타일이 정해지면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2단계. Design (디자인)
승인된 아웃라인과 스타일을 바탕으로 HTML 슬라이드를 만듭니다. 여기서 인상적이었던 건, 만들고 끝이 아니라 자동 validation이 돈다는 점입니다. 검증에 실패하면 AI가 알아서 수정합니다. 다이어그램이 필요하면 tldraw를 부르고, 이미지가 필요하면 Nano Banana Pro 를 호출합니다.
그리고 PDF로 바로 내보내기 전에, 완성된 HTML을 먼저 보여줍니다. 브라우저에서 슬라이드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그 단계에서 다시 수정하고, 최종 OK 한 다음에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3단계. Export (내보내기)
PDF로 변환합니다. 참고로 PPTX 변환도 있긴 한데 "experimental / unstable"이라고 제작자가 친절하게 명시해뒀습니다. 이미 제작자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PPT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왜 이게 더 잘 되는가 — 3가지 이유
이유 1. 한 번에 시키면 어디서 틀어졌는지 모릅니다.
"슬라이드 10장 만들어줘"는 사실 10개의 작업이 아닙니다. 구조 잡기, 스타일 정하기, 각 슬라이드 내용 쓰기, 디자인 입히기, 다이어그램 그리기, 이미지 붙이기, 내보내기. 최소 7~8개 작업이 한 덩어리로 묶여 있습니다.
이걸 한 번에 시키면, 결과가 별로일 때 어디서 틀어졌는지 모릅니다.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드네" 싶어서 프롬프트를 고치면 구조가 또 달라집니다.
반면, 단계를 쪼개면 각 단계에서 품질을 체크하고 확정할 수 있습니다. 스타일이 정해진 다음에는 그게 고정된 상태로 디자인이 돌아가니까, 한 번 결정한 건 안 바뀝니다.
이유 2. 스타일을 '선택'하게 해줍니다.
지난 '역설계 편'에서 이런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AI한테 '잘 만들어줘'가 안 통하는 건, '잘'을 내가 정의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slides-grab은 이 문제를 프리셋 35개로 해결했습니다. 매번 "깔끔하게, 모던하게, 세련되게"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미리 정의된 35개 스타일 중에서 고르는 방식입니다. 풀네임이 뭔지 몰라도 눈으로 보면 "아, 이거다" 싶은 걸 선택하면 됩니다.
매번 '잘'을 정의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유 3. AI가 못하는 건 전문 도구에 넘깁니다.
지난번에 "AI는 HTML/CSS 같은 텍스트 기반 도구에 강하다"고 썼습니다. 그런데 HTML/CSS로 만들기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복잡한 다이어그램, 품질 좋은 이미지.
slides-grab은 이 부분을 아래와 같이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 다이어그램은 tldraw
- 이미지는 Nano Banana Pro
HTML로 억지로 그려내는 게 아니라, 그 작업에 맞는 도구를 불러와서 결과물만 가져오는 방식입니다.
이게 PPT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slides-grab을 쓰면서 든 생각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 복잡한 작업일수록, 한 번에 시키지 말고 단계로 쪼개야 한다.
저는 뉴스레터를 쓸 때도 그렇게 합니다. 아웃라인 작성 → 원고 작성 → 검토 → 제목 뽑기 → 배포용 변환. 이걸 한 번에 안 시키고 단계별로 따로 갑니다. 그랬더니 품질이 훨씬 올라갔습니다.
사업계획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웃라인 잡기 → 타이틀 워싱 → 슬라이드별 내용 쓰기 → 디자인 입히기로 쪼개면, 한 단계의 완성도가 다음 단계를 가볍게 해줍니다.
둘. 각 단계는 그 일을 잘하는 도구한테 시켜야 합니다.
slides-grab이 다이어그램은 tldraw에, 이미지는 Nano Banana에 넘기는 게 정확히 이 원리입니다. 하나의 AI한테 다 시키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팀을 짤 때 이렇게 합니다. 기획자에게 디자인을 시키지 않고, 디자이너에게 개발을 시키지 않습니다. 각자 잘하는 사람한테 잘하는 일을 맡기고, PM은 그걸 엮는 역할을 합니다. AI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명의 만능 직원보다 전문가 팀이 결과가 좋습니다.
물론 모든 작업을 이렇게 쪼개고 도구를 분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간단한 메모나 요약은 한 AI한테 한 번에 맡겨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결과물의 완성도가 중요하거나, 여러 사람에게 보여줄 자료라면 단계를 나누고 도구를 분리하는 쪽이 거의 매번 더 좋은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제 작업 방식도 이렇게 정리됐습니다. 문체를 잡는 AI 따로, 제목을 뽑는 AI 따로, 객관적으로 검토해주는 AI 따로. 각각 그 일에 특화된 도구를 부르고, 저는 그걸 엮는 역할만 합니다. 매번 처음부터 설명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AI한테 복잡한 걸 시키고 있다면, 두 가지만 점검해보세요.
"한 번에 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AI가 못하는 부분은 다른 도구로 넘길 수 있지 않은가?"
이 두 질문이 결과를 바꿔줍니다.
AI를 잘 쓴다는 건 결국 좋은 프롬프트를 쓰는 게 아니라, '좋은 팀을 짜는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하나의 AI에 다 맡기지 않고, 잘하는 도구한테 잘하는 일을 시키고, 단계마다 확인하는 것. 우리가 PM으로 일할 때 하던 일과 똑같습니다.
slides-grab을 만든 분은, 그런 의미에서 어떤 도구가 어떤 역할을 잘하는지를 직접 실험을 통해 깊이 알고 계신 분으로 느껴졌습니다. 알고 보니 만드신 분은 김동규님이라는 분으로, SK AI Summit 2025 Claude Code Builder Hackathon에서 1등을 하셨더군요. 이 도구를 쓰면서 가장 많이 배운 건, 사실 만든 분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PPT 만드실 일이 있으시면 slides-grab 꼭 한 번 써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여러 시도를 해봤지만, 제가 해본 시도 중에서는 단연 최고의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AI에게 어떤 작업을 단계별로 쪼개서 시키고 계신가요? 편하게 답장으로 알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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