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채원입니다.
지난 글들에서 '역설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죠. 잘 된 결과물을 AI한테 보여주고 패턴을 뜯게 하면, 내 톤과 구조에 맞는 결과물이 나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역설계마저 안 통하는 케이스를 만났습니다. PPT였습니다.
사업계획서를 PPT로 만들기 위해 AI에게 시켰습니다. "만들어줘"만 한 게 아닙니다. 지난 글에서 말씀드렸던대로 잘 된 참고 PPT도 같이 넣어줬고, 톤과 구조를 역설계해달라고 했고, 그 규칙대로 만들어달라고 했습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촌스러운 그림자, 투박한 레이아웃, 정렬이 어긋난 박스들. 참고 자료를 줬는데도 똑같았습니다. '프롬프트
가 문제인가? 참고 자료가 부족했나?' 한참 헤맸습니다.
그러다 방법을 바꿨습니다.
"PPT 만들어줘" 대신, "HTML로 슬라이드 만들고 PDF로 변환해줘"로요.
결과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같은 AI, 완전히 다른 결과물
- Before: "PPT로 만들어줘" → 촌스러운 그림자, 투박한 폰트, 어긋난 정렬.
- After: "HTML로 슬라이드 만들고 PDF로 변환해줘" → 깔끔한 타이포그래피, 세련된 여백, 일관된 디자인.
같은 AI였습니다.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다른 건 출력 형식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프롬프트가 문제가 아니었구나.
왜 그런지 파봤습니다
이게 궁금했습니다. 왜 AI는 PPT는 못 만들면서 HTML은 잘 만드는 걸까요?
이유 1. python-pptx는 '디자인 라이브러리'가 아닙니다.
클로드에 참고 PPT를 주고 만들어달라고 하면 'python-pptx'라는 파이썬 라이브러리가 호출됩니다. 이 라이브러리의 목적은 '예쁜 PPT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PPT 파일 포맷을 프로그래밍으로 다루는 것'이에요. 기본값이 2000년대 PowerPoint 디폴트 스타일이다 보니, 당연히 촌스럽게 나옵니다.
이유 2. AI가 학습한 python-pptx 예제는 '튜토리얼 코드'입니다.
GitHub, Stack Overflow에 있는 python-pptx 예제 대부분은 "이렇게 사용하는 법"을 설명하는 튜토리얼 코드입니다. 실무 디자이너가 만든 코드가 아니에요. AI는 그 튜토리얼 패턴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이유 3. AI는 HTML/CSS를 압도적으로 많이 학습했습니다.
반대로 HTML/CSS는 인터넷의 디폴트 언어입니다. 예쁜 웹사이트 수천만 개, Tailwind 같은 디자인 시스템, 세련된 컴포넌트 라이브러리 — 학습 데이터가 넘쳐납니다. AI가 '예쁜 HTML'을 구성하는 감각은 매우 잘 훈련되어 있는 거죠.
그리고 CSS는 "왼쪽 정렬", "가운데 배치", "여백 20px"처럼 디자인 의도를 직접 표현하는 언어입니다. python-pptx처럼 "x=100, y=200에 박스 찍기" 식의 좌표 계산이 아니에요. AI가 실수할 여지가 적습니다.
마지막으로, HTML을 PDF로 변환하는 건 이미 완성된 디자인을 박제하는 거예요. Chrome의 Print to PDF 기능 하나면 깨지지 않고 그대로 나옵니다.
정리하면, AI는 텍스트로 표현 가능한 도구에 강합니다. 그리고 학습 데이터가 많은 도구에 강합니다. HTML/CSS는 둘 다 해당합니다. python-pptx는 둘 다 해당하지 않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도구가 더 예쁜가"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야기예요.
이게 PPT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이 경험이 알려준 건 단순히 "PPT 말고 HTML을 쓰세요"가 아닙니다.
진짜 교훈은 이거였어요.
AI에게 일을 시킬 때, "어떤 형식으로 만들지"도 선택지다.
같은 결과물을 만드는 경로는 여러 개입니다. 그리고 경로마다 품질이 달라요.
PPT → HTML을 발견하고 나서, 다른 업무도 형식을 바꿔보기 시작했습니다. 워드로 만들던 자료를 마크다운으로 바꿨더니 PDF 변환이 훨씬 빠르고 예뻤습니다.
매번 같은 패턴이었습니다. AI는 텍스트로 표현할 수 있는 도구에 강합니다. GUI 기반 도구(PPT, 워드, 포토샵)는 약하고, 코드로 표현되는 도구(HTML, 마크다운, 파이썬)에 강합니다. 결과가 마음에 안 들 때마다 형식을 바꿔보니, 생각보다 많은 경우에 달라졌어요.
AI 결과물이 별로일 땐, 프롬프트 말고 '형식'을 의심해보세요
AI한테 뭘 시켰는데 결과가 마음에 안 들 때, 우리는 보통 프롬프트를 고칩니다.
"좀 더 세련되게", "좀 더 깔끔하게", "이런 느낌으로".
그래도 안 될 땐, 프롬프트가 아니라 출력 형식을 의심해보세요.
지금 AI한테 시키는 형식이, AI가 잘하는 형식인가요?
- PPT 말고 HTML → PDF
- 워드 말고 마크다운 → PDF
- 엑셀 차트 말고 파이썬 코드 기반 차트
- 포토샵 말고 SVG 코드
결국 이런 뜻입니다. AI한테 일을 시킬 때, 내가 원하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AI가 잘하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물에 도달하는 경로는 여러 개니까요.
프롬프트를 고치기 전에, 한 번 물어보세요.
'이걸 꼭 이 형식으로 만들어야 할까?'
이 질문 하나가 생각보다 많은 걸 바꿔줍니다. 여러분도, 스스로에게 한 번 질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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