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작담이 통신] 가보자고! 가보자고!! 가보자고!!!

적어도 부끄럽게 굴지는 말아야지

2025.09.12 | 조회 70 |
0
작담이 통신의 프로필 이미지

작담이 통신

목수의 아무런 이야기

첨부 이미지

동료 작가님과 대화 중 낯선 낱말이 섞여 있었던 거예요.

"작가님은 완벽주의자라서 (...)"

번뜩 정신 차리며, 동시에 몸서리도 치며. 사실을 바로잡겠다는 일념. "아뇨아뇨, 저 완벽주의 그런 거 아니에요. 그저 적당히 인간에 불과해요."

 

이 몹쓸 습관은 회사 다니던 시절 도드라져서 주어진 일은 늘 적당히 하고 뒤에 숨어버리곤 했습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러지 말 걸. 호작담 꾸린 뒤로는 숨을 곳이 없더라고요. 뒤로 가도, 뒤로 가도. 나뿐인 이곳. 조직도 동료도 없이 오직 나뿐인 일이니까. 그로 인해 적당히 인간의 면모가 아주 사라졌냐고 물으면 그렇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이건 참 부끄러운 습관이더라고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여전히 완벽주의는 아니지만, 부끄럽게 굴지는 말아야지 다짐합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훨씬 오래전부터 부끄럼에 관해 강박이 있었나 봅니다. 지금의 저는 몹시도 뻔뻔한 사람이 되고 말았지만, 타고난 내성적 성질 탓에 어린 시절에는 주목받으면 안면 홍조가 발현되곤 했습니다. 고교 시절에 진짜 나쁜 선생님이 있었는데요. 학생들 약점을 찾아 별명으로 부르면서 재밌어하는 분이었어요. 제 별명은 빨갱이였습니다. "야, 빨갱이!" 부르면 주목받으니 제 홍조의 불길은 잦아들 줄 몰랐지요. 같은 반에 저보다 심하게 홍조 드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를 발견한 뒤로 그 친구는 빨1, 저는 빨2가 되었습니다. 진짜 몹쓸 인간 아닌가요? 거의 매일 마주쳐야 했던 수학 과목은 제게 최악 중 최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근데, 그 선생님 머리숱 없어서 되게 밉지는 않아요. 지금은 한 올도 안 남아 있을 듯!

 

더불어 제가 갖는 공포심 중에는 스스로 상황을 통제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현장 작업하며 많이 느껴요. 목수는 여러 갈래로 나뉘는데요. 저처럼 가구 만드는 소목수, 집 만드는 목수는 대목수. 현장에서 공간을 꾸리는 내장 목수 등이 있습니다. 저는 제 공간에서 작업을 마치도록 세팅이 되어 있습니다. 그에 반해 현장은 변수가 많아요. 바닥과 벽은 대부분 평평하지 않고요. 굳게 믿었던 샷시도 일자가 아닌 것이 태반이에요. 그래서 내장 목수들은 현장에서 나무를 가공할 수 있도록 휴대용 기계를 가지고 다닙니다. 이게 가능한 건, 현장에서 사용하는 나무들은 무르고 품질이 좋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저는 그렇지가 않은 거예요. 사용하는 나무가 단단하고 품질이 좋으니 기계도 자연스레 힘이 좋아야 하고, 덩치는 크고 무거워집니다. 휴대가 불가능해지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휴대 가능한 기계를 또 사자니 비용이 만만치 않고, 놓을 공간도 없단 말이에요. 현장 작업이 생기면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하지만, 늘 긴장됩니다. '변수에 대응할 수 없으면 어쩌지?' 하고요.

근데 그 염려가 생각보다 커서 긴장을 정말 많이 해요. 자주 하지도 않는 현장 작업 중 그야말로 탈탈 털린 적이 있어서 말이지요. 지난 며칠 동안 저는 온갖 상상을 했습니다. 그거 하나 제대로 못한 부끄러운 사람이 되어버린 제 모습을 조각조각 모으며 작업 당일 아침에 완성시켜버리는 것이지요. 어쨌거나 시간은 잘 갑니다. 시간은 늘 성실하니까.

그리고 오늘 낮, 현장 향하는 차에서 혼자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가보자!!!! 가보자고!!!! 별거 없어!!!!!!!! 괜찮아!!!!!!!!! 가보자고 가보자고!!!!!!!!"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인데요. 저는 마음먹고 목소리 키우면 정말로 큽니다. 군 복무 시절, 목소리 크다고 사랑받은 사람 저예요... 군 제대 후 누구도 저의 큰 목소리 들어본 적 없지만, 차에서나 공방에서 혼자 있을 때. 긴장하거나 많이 답답할 때는 함성을 질러보곤 합니다. 오늘 현장은 분량이 많았을 뿐 작업 자체는 쉽게 잘 풀렸어요. 바리바리 싸 들고 간 장비들 쓸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지요. 호호. 이렇듯 걱정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알면서도 늘 반복되는 염려는 어쩔 줄을 모르겠고요.

 

며칠 동안 차에 오늘 작업할 나무 싣고 다녔더니 나무 향이 가득 차있습니다. 이제 차는 텅텅 비었지만, 향은 쉬이 빠지지 않더라고요. 돌아오는 길에는 창문 열고 노래 들으며 흥얼 거렸어요. 잔나비의 <옥상에서 혼자 노을을 봤음>이라는 곡에는 '어쩌다 망할 놈의 음악을 한답시고 많은 것을 모르려 들었나 봐. 이제 와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이런 날 어떻게 사랑해?'라는 대목이 있더라고요. 저는 어쩌다 이토록 부끄러운 감정에 놓였나 문득 생각 했습니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다른 뉴스레터

© 2025 작담이 통신

목수의 아무런 이야기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로10길 6, 11층 1109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