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제 마지막 독서기입니다. 언제 여기까지 온 것인지.... 노션, 사진, 다양한 기록들을 들춰보면서 독서 생활을 돌아보니 2023년을 두 번 보내주는 느낌입니다. 마음이 이상하네요. 그래도 시작해보겠습니다.
23년 9월은..... 흠
장이지 시인의 <연꽃의 입술>은 도서관에서 홀린 듯이 대출해 읽었던 시집이에요. 곽재구 시인의 <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하고 색감도 닮고, 뭔가 제가 느끼는 감상들도 같은 결이라서 둘을 병렬해 읽었답니다. 요즘도 장이지 시인의 시집을 탐독 중입니다.
다음은 <소설보다 가을>이에요.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읽기 좋았던 것 같아요. 저는 특히 이주혜 작가님의 인터뷰를 참 좋아합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성장은 기꺼이 발전의 역방향을 자처하는 일에서 시작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앓는 존재를 만나기 위해 정상이 아닌 땅끝으로 가는 일, 여름에 배추씨를 뿌려 겨울을 도모하는 일, 서슬 퍼런 밤바다에 맞서 낭독의 빨간 날개를 피는 일, 바람과 함께 담배를 나눠 피는 일, 스스로 짐짝의 위치로 이동하는 일, 함부로 짐을 내팽게치지 않는 일, 초로한 몰골로 날갯짓을 연습하다 당바닥에 떨어져 죽음 직전에 내몰린 상태에서도 이소를 단념하지 않는 일, 내일을 위해 오늘을 버리지 않는 일,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회하지도 후퇴하지도 않고' 내일을 향해 곧장 가는 일. 그토록 구차하게 이소를 거듭하는 일이 제겐 곧 성장이고 이때 성장은 더 이상 추락의 반의어가 아닐 겁니다. 게리온처럼 소설가도 시인도 번역가도 철학자도(저도 살짝 끼겠습니다) 추락하며 날아오르고 있으니까요.
소설 보다 가을 속 이주혜 작가 인터뷰
제 삶 속 '나아감'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어요. 성장과 발전이 똑닮은 단어라고 생각해왔는데,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내일을 향해 오늘을 버리지 않는 일,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회하지도 후퇴하지도 않고 내일을 향해 곧장 가는 일'이 결국 성장이 된다. 이런 문장에는 늘 마음이 쓰입니다. 과거의 나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인데, 제가 너무 늦게 읽어버린 것만 같아서 미안하기도 해요. 적어도 지금 이 말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잘 가닿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책은 <알랭 바디우 세미나: 프리드리히 니체> 입니다. 이것 또한 <행복의 형이상학> 이후 두번째로 꺼내든 바디우의 책이었는데.... 앞 부분 좀 읽다가 반납 기한을 핑계로 포기하였습니다. 2024년에 다시 꺼내들어 읽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도 좋았던 부분이 있어서 공유합니다.
애우리피데서는 비극에 대한 소크라테스적 탈구dislocation입니다. 그는 '범죄자-철학자'인 것입니다. 니체적 반철학의 특징 중 하나는 특히 철학자들에게 '범죄자'라는 별칭이 정해져 있다는 점임을 기억합시다.
알랭 바디우, 알랭 바디우 세미나: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 수업도 듣고, 소크라테스 수업도 들었어서 그런지 이 부분이 잘 와닿았답니다.
사랑하는 독서모임의 9월 책은 신형철 평론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입니다. 저는.... 신형철 평론가의 글을 읽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정도로 그의 글을 좋아합니다. 평론이라는 것이 제가 먼저 원 텍스트를 읽지 않으면 와닿지 않을 때가 많아서 그의 평론집을 사 두고 평론한 작품들을 읽기 시작했을 만큼 좋아합니다. 사실 바디우를 읽게 된 계기도 어떤 전공적 결심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신형철 평론가가 쓰는 '바디우' 예시를 읽고 싶어서였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선 이 책은 아주 어려운 평론은 아닙니다. 산문집이기 때문에 조금 더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읽었던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인데, 다시 읽으니 생각이 바뀐 지점들도 많고 재밌었습니다. 또, 이때 독서모임에서 슬픔을 기억하는 방법, 공통의 슬픔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말들도 많이 나왔었어요. 저는 벤야민 얘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슬픔은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게 아니라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다. 그 자리를 박차고 우리에게 계속해서 다가온다. 고등학교 때 최성만 선생님의 <발터 벤야민 기억의 정치학>을 읽고 그나마 머리에 남았던 것들을 읊는 것에 불과하였지만... 기억에 대해 말하고 스스로도 기억을 되짚게 되는 이 과정이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독서모임 공동 노션에는 이런 소감을 남겼다네요.
신형철은 누군가의 그늘을 깊이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누구보다 어두운 곳에 있었던 사람이겠지. 그래서 신형철은 그늘에 대해서도, 빛에 대해서도 잘 안다. 인간 자체가 결함임을 인정하고 나아가는 숭고한 첫걸음에 슬픔이 있다. 결국 우리는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 타인의 슬픔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의 글을 통해 오늘도 어설픈 걸음을 재촉한다.
22년 10월은.....
10월은 왠지 모르겠지만 시집이 자주 끌렸습니다. 마음이 복잡했던 터라 긴 글들은 잘 들어오지 않더라구요. 그래도 소개합니다!
고등학교 독서모임에서는 이성복 시인의 <그 여름의 끝>을 읽고 각자 평론 비슷한 감상을 써오기로 했습니다. 은사님도 좋아하시고, 저도 원래 좋아하는 시집이라서 정말 행복하게 읽고 썼던 것 같아요.
이런 감상을 남겼다네요. 기특해라!!
그리고 이은규 시인의 낭독회에 다녀왔습니다.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를 참 좋아하는데, <무해한 복숭아>를 함께 읽으니 이은규 시인의 모든 시를 사랑하고 싶어졌답니다.
그리고 <시 보다 2021>를 읽게 됩니다. 김리윤 시인의 시집을 좋아해서 이름을 보자 마자 학교 서점에서 구매해서 읽었습니다. 햇빛 좋은 날에 벤치에 앉아 읽으니 이보다 좋은 것이 없구나.... 너무 좋았습니다. 여러분도 빛이 좋은 날 시를 읽어보세요. 특히 빛에 대한 시를 쓰시는 김리윤 시인의 시를요. 같이 감상을 나누어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친구들과의 독서 모임에서는 <내게 무해한 사람>을 읽었네요. 최은영 작가를 매우 좋아하는 민 양이 골라주었습니다. 저는 물론 연극 일정으로 이 모임이 참가하지 못했는데요...... 정말 너무나도 아쉬웠습니다. 얼마나 재미난 이야기들을 했을지. 모든 관계에서 우리는 한톨이라도 유해해지지만, 그럼에도 무해함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중요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12월의 책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 같네요? 12월의 책도 기대해주세요. 그럼 11월 독서 목록으로 넘어갑니다!
22년 11월은...... 연극을 올려서 빈곤해져버린 독서
저는 지난 23-2학기 연극을 하나 올렸는데요. 극의 조명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정신 없이 연습 가고, 과제하고... 이러다 보니 독서 생활을 놓고 있지 않았나. 그래서 새로운 책보다는 제가 기존에 좋아했던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이장욱 시인의 낭독회에 다녀왔습니다. 그 전날 밤에 <정오의 희망곡>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을 혼자 읽어보고 다녀왔는데요... 정말 너무 재밌고 좋았습니다. 시로만 시인을 만나다가 말을 하고, 웃고, 재치 있는 농담을 건네시는 시인을 보니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습니다. 근사한 분이셨습니다. 요즘 시를 쓰고 있는데... "시를 쓰고 계신가요?"라는 말에 "열심히.."라고 말한 뒤 매우 부끄러워졌던. 왜 이렇게 부끄러워졌을까요? 참나.... 그리고는 "또 다시 뵙길 바라요" 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무래도 이날부터 시를 더 열심히 쓰게 된 것 같습니다.
박시하 시인의 <우리의 대화는 이런 것입니다>는 표지 색감이 너무 아름다워서 도서관에서 홀린 듯 빌려 왔는데요. 좋았던 시 하나를 공유합니다.
시간
멀어지는 별을 그리워했다
안 들리는 노래를 기록했다도달하지 않은 별의 점을 쳤다
미래의 눈물을 왼쪽 손목에 발랐다멎은 심장 위에흰 깃털을 그려 넣었다
빙하들이 녹아내렸다아무 대가도 없이시간, 박시하
다음은 진은영 시인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를 읽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진은영 시인의 신작이 나왔다기에 나온 날에 바로 시켜 두근대는 마음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두근대는 마음으로 다시금 시집을 펼치니 너무나도 행복했답니다. 진은영 시인의 철학 서적도 좋아하고 시집도 좋아하는데, 올해에는 정말 제대로! <일곱 개의 사전>을 비롯한 다른 저서들을 읽어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22년 12월은.......
정신 없이 기말고사를 치고 마음의 안정기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는 김소연 작가의 <어금니 깨물기>를 읽게 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지난 2023년을 되돌아보기도 했어요. 보기 싫거나 버티기 힘든 상황에서 어금니를 깨물었던 내가 생각나기도 했고, 책 속 엄마와 딸의 관계를 읽으며 저와 엄마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시간이 지나면 후회할 것이라는 걸 알아도 늘 마음만큼 하지 못하는 제가 미웠습니다. 마주치는 이들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어야지, 늘 다짐하면서 왜 가족들에게는 그러지 못했는지. 익숙했던 것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더 잘해야겠다고 느꼈어요.
다음은 양안다 시인의 <작은 미래의 책>입니다. <숲의 소실점을 향해> 이후로는 양안다 시인의 시집을 못 읽고 있었는데 다시 읽으니 웬걸, 너무 잘 읽히고 재밌었습니다. 필사하고 싶은 시들이 한 바가지라서 정말 재밌게 읽고 썼어요.
다음으로는 시험기간에 읽었던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를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시인이자 철학 전공자이기도 한 진은영 작가의 책인데요. 칸트 원문을 읽다가 너무 지쳐서 2차 자료를 살피던 중 발견했습니다. 이것도 조금 무거운 감이 있지만, 칸트 사상을 가볍게 읽어보고 싶은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독서모임의 12월기 책은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이었습니다. 오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나와 보여주는 세상 사는 이야기. 우리는 언제까지고 타인에게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이고,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이해하며 이 삶을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인물의 말은 이것이에요.
보이는 토대와 보이지 않는 토대를 다지지 않고 허무는 사람들 말이다. 발밑으로 모래가 흘러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 그리하여 입을 벌린 구덩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등을 뒤에서 밀어버리는 사람들.... 같은 사람들이야. 말해주고 싶었다. 말해야할 것 같았다.
정세랑, 피프티 피플
내가 말하지 못했을 법한 말을 용기 있게 하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를 예민하게 감각할 줄 아는 시인인 배윤나. 그리고 한 인물이 더 있는데, 그 인물은 하계범 씨예요. 하계범 씨가 동화책을 발견하는 장면에서는 눈물도 나고... 괜히 마음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지는 것 있죠. 도마뱀과 계범. 저는 이 애틋한 둘을 생각하며 잠에 들기도 했답니다. 왜 그토록 애틋했는지 궁금하시다면.... 같이 읽어 봐요.
마지막으로 택한 시집은 황인찬 시인의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였습니다. 서점에서 갑자기 눈에 띄는 거예요. 할 수 없이 집으로 들고 왔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했던 시는 바로 이것.
그 해 구하기
여름빛과 함께 새 한 마리가 집에 들어온 것이다
그는 새가 들어와 무섭다며 야단이고새는 온 집안을 종종거린다무엇인가를 찾는 것처럼
그러나 새가 무엇인가를 찾는 일은 없다그저 여기저기 들쑤실 뿐그때마다 그는 소리를 질렀고
창문은 모두 닫혀 있는데 어디로 들어왔을까그렇게 생각하며 온 창문을 활짝 열었다
새가 스스로 나가기를 바라며
그러나 새는 떠나지 않았고그가 울기 직전의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후로 새는 여기서 오래 살았다
아무것도 찾지 않으면서 무엇인가를 찾는 것처럼 자꾸 집안을 들쑤시면서
그가 떠나고활짝 열린 창을 보면서도
새는 아무것도 찾지 않았다황인찬, 그 해 구하기
여름빛과 함께 새가 들어왔습니다. 그 새는 집안을 어지럽게 하고, 한 사람을 울게 만들지만 그는 본격적으로 새를 쫓아내진 않아요. 왜 그럴까요? 함께 살아가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그 사람과 새는 오래 삽니다. 그 사람이 떠난 집에 남아 새는 아무것도 찾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집을 떠나지도 않아요. 뱅글 뱅글 생각이 계속되는 시였습니다.
저에게 새는 불안과 슬픔으로도 읽혔어요. 우리는 언제까지고 불안이나 슬픔과 함께 살아야할 것입니다. 행복한 와중에도 불안은 씨앗처럼 맘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니까요. 창문을 열어 내보내려고 해도 마음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 새는 우리와 오래도록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간 나이가 들어 불안과 슬픔에 무뎌지는 날이 온다면 우리는 그 집을 떠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불안과 슬픔만 남긴 채로 덩그라니. 그때 쯤의 내 얼굴과 내 주변이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2023년의 독서기는 마무리됩니다. 사실 독서는 읽은 책의 권 수보다는 어떤 책을 얼마나 잘 읽었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편식이 좀 심하긴 했지만, 이게 제 취향인 것을 어쩌겠어요. 올해에는 조금 더 다양한 분야의 책을 들여보기로 합니다. 올해는 정말 책을 많이, 그것도 잘 읽고 싶습니다. 그래서 기록도 더 잘해내고 싶고 도서관에 오래 상주하는 대학생이 되고자 해요. 여러분의 독서 생활은 어떠셨나요. 제 작은 독서기를 돌아보면서 여러분도 독서 생활을 되짚어 보신다면, 그래서 2024년에는 조금 더 나은 독서 생활을 영위하게 되신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이 없겠습니다.
긴 글 꾸준히 사랑해주시고 성원해주시고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글은 2024년 현재 독서 상황에 대한 글이 될 수도 있고, 그저 제 생활에 대한 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책 얘기만 계속하면 재미 없잖아요. 의견이 있으시면 댓글 부탁드립니다. 글감을 찾는 데에 엄청난 도움이 되어요.
댓글 하나 하나 다 읽어보고 있는데, 답장을 고민하다 자버리는 날들이 많아서.... 여전히 답을 못 드리고 있습니다. 언젠간 모든 댓글에 답이 다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제 안에서 적절한 답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늘 마음이 너무 넘쳐서 글이 느끼해지거나, 마음에 비해 글이 너무 무미건조해져서 서글픈 날들이 반복됩니다. 이해해주세요!
여튼, 여러분! 다시 한 번 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우리는 다음 메일링에서 또 뵈어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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