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마다 읽는 시가 있다. 특별한 뜻은 없고, 그냥 새해마다 마음이 가는 시집을 펼치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시다. 그 이후로 연례행사처럼 읽는다. 이장욱 시인의 <근하신년>이다.
<근하신년 - 코끼리군의 엽서>
이장욱
너에게 나는 소문이다.
나는 사라지지 않지.
나는 종로 상공을 떠가는
비닐봉지처럼 유연해.
자동차들이 착지점을 통과한다.
나는 자꾸
몸무게가 제로에 가까워져
밤새 고개를 들고 열심히
너를 떠올렸다.
속도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야.
사물과 사물 사이의 거리가 있을 뿐.
나는 아무 때나 정지할 수 있다.
완벽하게 복고적인 정신으로 충만하고 싶어.
가령 부르주아에 대한 고전적인 적의 같은 것.
나를 지배하는
기압골의 이동경로, 혹은
저녁 여덟 시 홈드라마의 웃음.
나는 명랑해질 것이다.
교보문고 상공에
순간 정지한 비닐봉지.
비닐의 몸을 통과하는 무한한 확률들.
우리는 유려해지지 말자.
널 사랑해.
(정오의 희망곡, 2006, 문학과지성사)
내게 시를 읽음에 있어 어떠한 독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를 흡수하는 독자에 불과한 대학생이기에, 말 그대로 ‘제멋대로’ 읽고 흡수한다. 시론도, 작법 방법도, 문학적인 음미나 비평의 방법도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좋은 게 좋은 거지, 식으로 시를 읽는다. 시에 대해 분석적인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직관적인 인상과 감정 뿐이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움켜쥐려 노력한다. 이런 뜻인가? 입 안에서 단어를 굴리며 고민한다. 새해 아침은 섣부른 가정으로 시작된다.
종로 상공에 떠다니는 비닐봉지처럼 유연해진 ‘나’는 자꾸 ‘너’를 떠올린다. 속도에 구애 받으며 횡적 이동을 하던 자동차들은 착지점을 상정한 채로 추락한다. 일상적이지 않은 풍경이 계속 된다. 몸무게가 제로에 수렴하면서도 ‘너’를 생각하는 ‘나’는 속도와 거리에 대해 생각한다. 너와 나 사이의 속도와 거리. 아무 때나 정지할 수 있다던 나는 교보문고 상공에 정지한 비닐봉지를 본다. 그 사이로 뱉는 말은, “우리는 유려해지지 말자/ 널 사랑해”.
항상 꽂히는 문장은 따옴표 속 두 문장이다. 결국 새해마다 나는 유려함에 대해 생각한다. ‘유려하다’라는 말은 흐를 류流에 고울 려麗 라는 한자로 조직되어 있다. 글이나 말, 그리고 곡선 따위가 거침 없이 미끈하고 아름답다는 뜻이다. 흔히 말하는 아름다움과 유창함 이외에도 조형적인 매끈함을 나타내는 단어이기도 한 것인데, 유려하다를 발음하면 옥색빛의 무언가가 떠오른다. 옥색 빛의 필세나 자기 그릇 같은 것들. 잠깐 눈을 감고 생각한다. 단순히 옥색빛의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 뿐이라고.
유창함을 원한다고 해서 달변가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고, 아름답고 싶다고 해서 외모적인 발전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게 유려함은 어디론가 잘 흘러갈 수 있는 유연함과 고운 것을 만들고 지킬 수 있는 힘으로 다가온다. 단편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확장해 사유할 수 있는 여유와 틈을 갖길 바라며 얻은 것들을 정돈해 내 것으로 만드는 힘. 그런 것들이 내게 유려함이다. 해마다 추상적이고 반복적인 주문이 계속된다.
새해마다 내가 생각하는 '유려하다'의 정의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새해 아침, 찌뿌둥한 얼굴로 유려함을 되뇌이며 이 시를 읽어나간다. 나의 고민과는 반대로 이 시는 내게 유려해지지 말자고 말한다. 나는 반문하는 과정 끝에서 애써 ‘유려한 체’ 했던 나를 대면한다. 이 과정은 상당히 연례적인 것이며, 반복적임에도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다. 스스로의 미운 점을 들여다보는 일은 이렇게나 새롭다. 단편적인 방식으로 내게 없는 것들을 증명하러 애썼던 모습이 스친다. 결국 남들 보기에 유려한 사람이 되고 싶어 읽고, 쓰고, 말하는 것들은 내게 씁쓸한 후회를 남긴다. 내보이기 위한 것들, 스스로를 증명하고자 했던 것들은 쉽게 바스라지고 초라해진다.
나는 '유려해지지 말자’라는 시구를 통해 애써 유려해지고자 했던 지난 날의 나와 이별하기 시작한다. 잘 써서 내보이고 싶었던 글은 복잡한 기교 뿐이었고, 똑똑한 사람이 읽을 것만 같아 구매한 책들은 끝내 울림을 주지 않았다. 그저 피로하기만 했다. 뭘 그렇게 아등바등거렸는지 모르겠다는 푸념과 함께 조금은 초라한 지난 해의 나와 결별한다. 그리고는 새 노트를 뜯은 기분으로 신년의 유려함을 기대한다. 더는 애쓰지 않기로 한다.
내게 유려했던 구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하다. 내게도 유려한 구석이 있다. 지나가버린 일년을 돌아보면 즐겁고 반짝였던 모퉁이들이 서운한 표정을 짓고 있다. 모퉁이들에 잠시 기대어 섭섭한 마음을 달랜다. 완전히 옥색으로 빛나지 않았지만 엇비슷했던 지난 날들을 떠올린다.
실제로 유려했던 구석들은 겨울 외투 속 잊었던 지폐 같은 것들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나는 자주 유창해지고 아름다워진다. 내보이려고, 혹은 내보이지 못해 전전긍긍했던 것들보다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야밤 산책 속 몇 마디, 졸며 기록했던 다이어리 속 다짐, 부치지 못한 편지 속 성급하지만 무른 문장들, 읽었던 책에 대한 짧지만 투명한 회고, 걸어가며 찍었던 엉성한 사진, 비공개로 썼던 짤막한 글들이 유려함에 가까워보인다. 더 옥색으로 빛난다. 계획해서 빠짐없이 채워넣으려던 지식보다 스쳐지나가며 들은 것들이 나를 더 유연하게 만든다.
그리곤 이어 읽는다.
‘널 사랑해’
그 행간 사이에 수많은 내가 있다. 그리고 나는 결국 유려해지려 노력하는 나도, 노력했지만 실패했던 나도, 초라해서 조금은 우울해진 나도, 그러나 신년을 맞아 새로운 유려함을 꿈꾸는 나도 모두 모두 사랑하게 된다. 나는 비로소 명랑해진다. 무한상사 시무식 편을 보는 시청자처럼 실없이 웃을 수 있게 된다. 그래, 유려해지지 말자. 오히려 그게 더 유려해질 수도 있는 길이야. 논리적이지 못한 문장에도 절로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엉성한 곳에서 자주 유려하고 명랑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음악, 친구들과의 대화, 조금 미지근해진 술, 수시로 펼쳐보는 시집, 꿀이 들어간 차, 온도 차가 적어 무미건조한 듯 따사로운 영화들, 쓰지 않고 쌓아두기만 하는 다이어리, 아끼다 잃어버려 다시 구매한 블랙윙 연필 같은 것들은 삶을 단단하게 지탱하지만 동시에 엉성하고 무르다.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다. 그런 구석들을 이어보며 나는 나의 유려함을 짐작하게 된다. 지난 해 유려함을 닮았던 날들을 되돌아본다. 그런 모퉁이에서 나는 내가 때때로 유려했음을 깨닫고 기뻐한다. 나의 작위와 유난을 용서하게 된다.
시집을 덮을 즈음이면 이제 유려함을 위해 체계적으로 노력하기 보다는 자린고비처럼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기만 하면 되겠다고 생각한다. 신년 맞이 쇄신은 이런 식으로 끝이 난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찬 공기를 쐬고는 새 마음을 부여 받은 것 같은 착각에 휩싸인다. 더 잘 살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은 이해하지 못한대로 두어야 미덕이라는 말이 있다. 시를 읽을 때에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래도 좋아서 필사해놓고 몇날 몇일, 길게는 몇 개월을 지내다 보면 불현듯 어떤 이해가 생긴다. 그 시구는, 그 단어는 아마 이런 의미이지 않았을까. 횡단보도 앞 골똘히 고민해본 적도 있다. 아마 그건….
이 글에서 골백번은 쓴 것 같은 ‘유려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이것을 정확히 정의내리지 못할 것이다. 숙제와 같은 내가 갖고 있는지 없는지, 완벽히 판단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현듯 ‘유려함’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끝내주게 기뻐할 것이다. 붕어빵 사먹을 삼천 원을 발견한 것처럼, 예측하지 못했던 곳에서 나는 자주 유려해질 것이다. 이제는 스스로를 조금 덜 미워하고 조금 더 많이 좋아해보기로 한다.
나는 신년 인사를 건네며 올해에도 불가해할 나와, 내가 가진 유려함의 조각들을 상상한다. 옥색보다 탁하며 버드나무 이파리를 닮은 탁한 녹색을 가진, 아직 유려하지 못한 나를 만지작거린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너무나도 미숙하며 성급해서 연약한 모습의 나. 나는 내가 움켜쥔 세계조차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읊조리다 펼쳐 둔 이장욱의 시집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불가해한 것들이 힘이 되어주는 인생도 생각보다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새해에는 왜 이렇게 희망찬 말을 많이 하게 되는 건지. 이유 없이 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틈에 나는 유려함을 닮게 될까. 기대하며 지나갈 나의 일월 일일.
아, 엉성하지만 그래도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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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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