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에 갈 때는 항상 책을 들고 갑니다.
이상하게 몰입이 잘 되더라구요.
저에게는 지하철이 몰입 1순위, 미용실이 몰입 2순위입니다.
미용실에서 다들 스마트폰을 볼 때면 혼자 외계인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더 좋아집니다.
염색약을 바르고 30분 남짓, 누군가 글로 구축해놓은 세계로 입장합니다.
미용실 의자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머리에는 은박지가 붙어 있고, 몸은 케이프로 감겨 있고, 손은 책 한 권만 쥐고 있습니다.
도망갈 곳은 없습니다.
책을 펼치는 순간 염색약이 스며드는 30분, 나는 여기에 없습니다.
책장을 펼힌다는 것은누군가 평생을 갈아 넣어 구축해 놓은 세계의 문 앞에서 서서 조용히 손잡이를 돌리는 일입니다.
나는 그 세계의 방문자가 됩니다.
그 희열을 나누고 싶어, 오늘도 글을 씁니다.
영화는 이미지가 있고, 음악은 감정의 방향이 미리 주어진다면 책은 다릅니다.
문장만 있고 나머지는 없습니다.
저자가 설계도를 그리면, 건물을 올리는건 독자입니다.
책 속의 세계는 저자의 것이면서도 동시에 독자의 것이기도 합니다.
책을 읽으며 공동 창작자가 됩니다.
텍스트를 읽으며 어떻게 느끼고 생각할지는 독자의 몫이니까요.
몰입은 선택이 사라진 순간에 찾아옵니다.
지하철 의자나, 미용실 의자는 다른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선택지가 없으니 책을 펼치면 몰입이 쉬워집니다.
비좁은 공간이 오히려 생각을 넓게 만드는 역설. 제약이 자유를 줍니다.
그 상태에서 좋은 문장을 만나면, 뭔가가 딸깍 맞아 들어가는 느낌이 있어요.
내가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을 누군가 이미 언어로 표현한 문장.
이 감각은 공감과는 조금 달라요.
공감이 '나도 그래'라면, 이것은 '이미 누군가 여기 있었다'에 가깝습니다.
내가 처음이 아니었다는 안도. 이 세계를 먼저 통과한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
한 번이라도 깊이 들어간 세계는 어딘가 남아서, 자신의 언어와 감각에 조용히 침전됩니다.
그래서 독서는 축적이 아니라 합류에 가깝습니다.
나라는 사람 안에 점점 더 많은 목소리가 쌓여갑니다.
염색이 끝나고, 책장을 덮으면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직 누군가가 구축해 놓은 세계를 다 보지 못했습니다.
잠시 다녀온 곳인데 무언가를 두고 온 것 같은 기분. 그게 좋은 책이라는 증거겠죠.
완전히 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것. 지하철에서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게 만드는 것.
누군가 평생을 들여 만든 세계에, 나는 고작 30분을 냈습니다.
그런데도 뭔가 달라진 채로 나옵니다.
이것이 독서가 가진 가장 이상한 마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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