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쉬이 아름다움으로 여겨진다. 정갈하게 쓰인, 어디선가 엄숙하게 선별된 듯한 낯선 단어와 글자들. 이를 통해 전달되는 의미와 감정들 또한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기에, 때때로 시의 어려움은 곧 숭고한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시란 아름다움에 대해 쓰는 것이고,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아름다움 그 자체가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과연 아름다움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여기, 시를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하는 한 사람이 있다.
소설가 출신의 영화감독 이창동이 만든 영화 <시>에는 주인공 미자가 나온다. 미자는 손자와 함께 살아가는 나이 든 노인이다. 세상에 놓인 지 오래되었고, 그다지 형편도 여유롭지 않은 미자. 그럼에도 미자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세상의 좋은 면만 바라보며 살고 있다.
팔이 저려 찾아간 병원에서 자꾸만 말을 잊어가는 것에 대해 경고하더라도, 스스로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일 뿐이고, 몸이 불편한 노인의 간병인 노릇을 하며 돈을 벌고 있어도, 불평 하나 없는 즐거운 나날들이다.
그러던 어느 날, 미자는 강물에 투신해 자살했다는 여학생의 유족을 마주하게 된다. 응급실 앞에서 망연자실한 유족을 바라보지만 잠시 안쓰러울 뿐, 미자는 강 건너의 불행을 보듯 그 일을 지나친다.
그런 미자에게 시를 배울 기회가 찾아온다. 동네 문화원에서 시 수업을 수강하게 된 미자는 시는 무언가를 제대로 보는 것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듣는다. 그때부터 미자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자세히 보려 노력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자세히 마주하면 할수록, 삶은 아름다움이 아닌 절망과 슬픔을 미자의 눈앞으로 가져온다.
그저 불행한 풍경으로만 여겼던 투신자살한 여학생의 일은 강물 저 멀리 떠내려가는 일이 아닌, 미자의 눈앞에 떨어진 일이 되어버리고, 불행은 미자에게 책임과 부도덕함, 아름답지 않은 것들을 강요한다. 미자는 도망칠 곳도 의지할 곳도 없게 된다. 그럼에도 과연 미자는 아름다운 시를 완성할 수 있게 될까.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시와 삶이 주는 것이 과연 아름다움뿐일까. 그렇다면 슬픔과 고통이 담긴 삶은, 또는 시는 아름다운 것이 아니게 되는 걸까.
결말을 이야기하자면 미자는 시를 완성한다. 아름다움만을 바라보며 시상을 찾아 헤매던 미자는 되려 삶의 불행에서 시상을 얻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시를 완성하게 된다. 그리고 그 완성은 분명 아름답게 느껴진다.
삶과 시는 닮아있다. 무언가 의미를 찾아 헤매는 것,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는 것. 그런 바람들이 시를 쓰는 것과 살아가는 것을 닮게 만든다. 아마 그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시를 쓰고 싶은 미자 같은 사람이며, 삶이 아름다워지길 바라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미자가 시를 쓰기 위해 거쳐왔던 과정처럼, 아름다워지길 바라는 마음은 제대로 마주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시 수업에서 강사가 했던 말처럼 '본다'라는 행위를 우리는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삶이 아름다워지길 바란다면 먼저 삶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제대로 마주해야 한다.
어떤 시인은 시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시인은 슬픔을 자처하는 사람" 나에게는 이 말이 시를 쓴다는 일이 슬픔을 자처할 정도로 삶을 사랑해야 하는 일이라 느껴진다. 결국에 시를 쓴다는 것은 삶을 온전히 소화해내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각자의 삶을 가지고 시를 쓴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시를 쓰게 될까. 어떤 형식과 내용의, 어떠한 모양의 시를 쓰게 될까.
나는 미자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결국에는 모두 자신의 삶에서 시를 찾을 수 있길 바라게 되었다. 그것이 아름다운 과정이 아닐지라도, 결국에는 모두의 삶이 좋은 시가 되어 아름다움에 이르길 바라게 되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시> 스틸컷,
감독 : 이창동, 제작사 : 파인하우스필름, 유니코리아문예투자
글쓴이: 호모루덴스
소개: 낭만이 밥을 먹여주진 않지만, 밥을 맛있게는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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