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후]우리 각자의 영화

'추후'의 뉴스레터

2021.05.19 | 조회 7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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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후

우리는 서른살이 됐고, 글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 단편 소설 ‘0%를 향하여’, 서이제

 망해버렸다. 작년 이맘때쯤 난 내 인생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독립 장편 영화 연출팀 일을 마친 후였다. 나이는 어느새 서른 줄이었고 이뤄놓은 건 하나 없었다. 문득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었던 그때 나의 통장 잔고는 0을 향하고 있었다. 집안의 동전을 긁어모아 집 앞 편의점으로 향했다. 난 편의점 직원에게 500원과 100원짜리 동전 더미를 동전 별로 정리해서 담배 한 갑을 얻었다. 그렇게 담배를 피우며 나는 시작한 적도 없던 영화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2021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읽던 중 서이제 작가의 단편 소설 ‘0%를 향하여’를 보며 난 그때의 나를 떠올려보게 됐다. 의식의 흐름대로 독립영화의 현실과 소규모 예술영화관, 그리고 영화를 붙잡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이 소설을 보며 난 아팠다. 내 주변의 친구들을 보는 것 같아 슬프기도 했고, 내가 속한 세계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이 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소설의 시간보다 현재 영화판이 더 암울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은 소설 속에 언급되는 수많은 영화제가 운영의 어려움을 겪고 폐지를 선택하고 있다. 영화를 다루는 전문지에선 영화와 극장의 종말을 언급하고 영화 교육 현장에선 OTT를 새로운 미래로 제시하고 있다. 말 그대로 극장이 사라지고 있다. 영화가 사라지고 있다. 우린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서이제 작가의 ‘0%를 향하여’는 독립영화를 위한 마지막 연서와 같은 소설이다. 독립영화라는 규정하기 어려운 개념에 대해 작가가 제시하는 서사적 순간은 매력적이다. 영화를 보기 위해 찾아갔던 관객의 발자취를 쫓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장은 그 답이 될 수 있을까?

 ‘보고 싶었다.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감독의 첫 장편 영화를 보기 위해 내 하루를 다 쓰기로 마음먹었는데, 내가 왜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주말에 대전으로 갈 계획을 짰다. 무엇이, 어떤 힘이, 도대체 왜, 나를 낯선 곳까지 이르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 ‘0%를 향하여’, 서이제 中

 이 소설은 마냥 독립영화를 위로하지 않는다. 오히려 객관적으로 그 속의 사람들을 바라본다. ‘자기들끼리’ 찍고 ‘자기들끼리’ 보고 ‘자기들끼리’ 해 먹는다고 말하는 누군가의 말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들을 위한 변명의 문장을 덧붙인다. ‘자기들끼리’라도 안 보면, 정말로 독립영화를 봐줄 사람이 없었다고. 독립영화는 답 없고 미래가 없고 망했을지라도 우린 여기를 지키고 싶다고.

 극 중 ‘나’의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대부분 영화감독 지망생인 그들의 모습과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이 겹쳐져 보였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영화를 하면 안 되었다’는 문장을 만났을 때 작년에 망해버렸다고 생각했던 내가 떠올랐다. ‘돈을 벌 때 내 노동력을 파는 게 아니라 내 시간을 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나날들.

 하지만 그런데도 난 여기에 남아 있다. 남아 있기 위해 뭐라도 하고 있다. 왜 그러냐고 묻는 사람에게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그땐 입안에 맴돌던 그 문장이 뭐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극 중 ‘내’가 영화과 입시 과외를 하며 가르치는 학생의 말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을까. 그 학생에게 영화를 보러 와달라고 부탁했던 그 형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두 명의 다른 관객과 함께 영화를 보고 영화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 학생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래도 어디선가 잘 해내고 있겠죠.’라고 믿고 싶은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내가 계속하고 싶었던 그 마음도 그런 마음들과 닮아있을까.

 우리 모두 삶의 어떤 순간 뭔가를 지망한다. 지망생. 그건 곧 미생이다. 그 지망을 놓지 못한다고 바보도 아니고 포기했다고 해서 실패자도 아니다. 극 중에 ‘내’가 만난 한 할머니는 주민 센터에서 뒤늦게 영화를 배워 자신의 영화 상영에 ‘나’를 초대한다. 도무지 연출 의도를 알 수 없는 할머니의 영화를 보며 ‘나’는 지금껏 극장에서 만났던 헤아려지지 않는 얼굴들을 머릿속에 그린다. 나 또한 내가 지나왔던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그 사람들은 잘 해내고 있을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우리 모두 연출 의도를 알 수 없는 한 편의 영화를 연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이 어떤 인생을 연출하고 있든 어디선가 잘 해내고 있을 거라 믿고 싶다. 한 친구가 내게 말해줬던 것처럼 영화는 끝이 나도 내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니까. 우리의 인생은 끝날 때까지는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


글쓴이: 순환선

소개: 스쳐가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매거진 '추후' 이제 막 서른이 된 친구들이 모여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영화, 음악, 문학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서른의 시선을 담은 글을 매주 [월/수/금]에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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