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미나리>에 관한 단상
코로나 탓에 극장을 피하던 올해 봄, 기대하던 작품인 미나리 덕분에 오랜만에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갔다. 한동안 작은 화면에서만 영화를 보는 게 아쉬웠다. 극장 경험은 단순 영화 관람과 다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은 극장 안의 모든 상호작용을 포함한다. 그렇기에 주변의 관객, 그날의 분위기, 그때의 기분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르다. 따라서 두 시간 길이 영화를 보는 건 단순 관람이 아니라 극장과 상호작용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경험이다.
영화 미나리를 보던 날, 난 오랜만에 색다른 극장 경험을 했다. 영화를 보면서 난 세 사람의 눈물을 느꼈다. 처음은 오른편 자리에 앉은 모르는 중년 남성의 눈물이었다. 그는 영화 중간쯤부터 내내 눈물을 훔쳤다. 두 번째는 왼편 자리에 앉은 엄마의 눈물이었다. 윤여정 선생님이 연기하신 ‘순자’라는 캐릭터가 등장할 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으로 난 나의 눈물을 느꼈다. 그날, 명필름 아트센터 G 열에 앉았던 우리 세 사람은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렸을까?
영화 미나리는 낯선 미국, 아칸소로 이주하게 된 한국계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다. 자신의 농장을 운영하는 꿈을 꾸는 아빠 ‘제이콥’과 일자리를 찾는 엄마 ‘모니카’는 어린아이들을 위해 ‘모니카’의 엄마 ‘순자’와 함께 지내기로 한다. 하지만 딸 ‘앤’과 막내아들 ‘데이빗’은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 ‘순자’가 못마땅하다. 그들은 낯선 땅에 모여 뿌리내리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
‘제가 가족들과 처음 아칸소주에 왔을 때, 저희 할머니가 실제로 미나리를 심었거든요. 호수 아래 작은 냇가에서 아름다운 곳을 찾아서 거기에 미나리를 심으셨어요. 그곳에서 저도 실제로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요. 미나리 자체는 약효가 있고, 물을 정화하는 식물이잖아요.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고요. 그래서 제가 할머니를 생각할 때 항상 떠오르는 게 미나리였어요. 미나리는 제가 할머니 그리고 가족에 느끼는 감정을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어요.’ - HYPEBEAST 매거진, 영화 <미나리> 정이삭 감독 인터뷰 中 -
영화 제목이자, 영화 속 중요한 상징으로 나오는 미나리는 정이삭 감독이 인터뷰에서 말했듯 어디서든 잘 자라는 이로운 식물이다. 극 중 데이빗 가족이 한국계 이민자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미나리라는 상징은 더욱 와 닿는다. 이민자 2세였던 감독에게 미나리는 마치 이민자의 모습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실제로 이민의 경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 모두 각자의 삶에서 이민자가 될 때가 있다. 익숙했던 고향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가게 되는 경험은 인생에서 한 번쯤은 겪게 되는 일이다. 그건 독립일 수도 있고, 유학일 수도 있고, 또는 첫 직장에 입사하는 경험일 수도 있다.
난 미나리가 무언가 떠나온 경험을 한 사람에게 아련한 기억으로 남는 무언가를 은유하는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인생에서 떠나온 시절을 생각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다. 나에게 그건 박카스다.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난 인천에서 조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그 시절의 기억이 이젠 흐릿해졌지만, 박카스에 대한 기억만은 선명하다. 할머니는 박카스를 좋아하셨다. 목욕탕에 갈 때면 나에겐 바나나 우유를 사주시고, 자신은 늘 박카스 한 병을 사서 드시곤 했다.
난 어린 마음에 할머니가 늘 마시는 박카스의 맛을 궁금해했다. 할머니는 어린 손자가 자신의 박카스를 빤히 쳐다보는 걸 느끼셨는지, 박카스를 병뚜껑만큼만 따라서 내게 건네주셨다. 처음으로 맛본 박카스의 맛은 시고 달았다. 어린 나이에 자극적인 맛이었을까. 몸이 부르르 떨릴 만큼 달콤했다. 내가 박카스의 맛을 좋아한다는 걸 아셨는지, 그 이후로 할머니는 박카스를 마실 때마다 내게 병뚜껑만큼 양보해주셨다.
내가 그 시고 단 박카스를 맛볼 수 있었던 건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였다. 그 후, 나는 엄마와 함께 인천을 떠나 인생에서 가장 오랜 기간을 보내게 될 일산으로 떠났다. 나의 유년 시절은 병뚜껑에 담긴 박카스와 함께 지나갔다. 그 시절을 떠나게 됐다.
내가 극장에서 미나리를 봤던 날 느꼈던 세 사람의 눈물은 각자 다른 이유 때문이었겠지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떠나보냈거나 떠나온 가족, 혹은 가족이 함께했던 시간과 장소. 결국 우리는 그 모든 걸 포함한 고향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감독 정이삭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 <미나리>는 우리 기억 속에 있는 보편적인 것을 끄집어낸다. 그건 바로 가족, 그리고 고향이다. 우리가 언젠가 떠나게 되는 그곳 말이다. 그렇기에 영화 <미나리>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어울리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이야기 끝에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만든다.
할머니가 주는 박카스는 이제 마실 수 없다. 슬프게도 그 시절은 지나갔고, 기억 속 할머니의 얼굴은 이미 흐릿해졌다. 하지만 성장한 어린아이는 이제 할머니의 기일마다 박카스 한 병을 챙겨간다. 분명 그 박카스의 맛은 여전히 시고 달 것이다. 할머니가 여전히 그 맛을 좋아하시길 기도해본다.
글쓴이: 순환선
소개: 스쳐가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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