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황은 바뀌지 않아도, 받은 빛으로 조용히 밝히는 삶—그것이 감사의 삶이다.” Generated by ChatGPT
두 개의 질문
갈등 없이 살 수 있는가?
절망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가?
크리슈나무르티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갈등 없이 사는 것이 가능한가?"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해요. 당신은 자기 기만에 빠진 거예요."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가능하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있는 그대로와 함께 사는 것이다."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다이아나 버틀러 배스는 인생의 깊은 위기를 겪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침마다 속삭이는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내가 살아있어서." 처음엔 아무 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그 단순한 감사의 실천이 그녀를 변화시켰다.
이 두 질문은 하나로 만난다.
감사는 내면의 갈등 없는 삶을 여는 조용한 열쇠가 된다.
자동으로 살 때, 나는 기계가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 나도 모르게 나는 외부 상황에 자동으로 반응한다.
누군가 칭찬하면 들뜨고, 비난하면 움츠러든다. 일이 잘 풀리면 기분이 좋고, 안 풀리면 불안하다. 버튼을 누르면 작동하는 기계가 된다.
Fourth Way의 스승 모리스 니콜은 말했다. "당신이 일이 잘 풀릴 때만 행복하고 안 풀릴 때 불행하다면, 당신은 기계처럼 사는 것이다."
기계처럼 반응하는 동안 감사는 없다.
감사는 중심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중심이 없으면 반응할 뿐이고, 중심이 있으면 선택할 수 있다.
니콜은 계속한다. "이 작업(Work)의 목적은 당신 안에 외부 사건들로부터 독립적인 어떤 것을 만드는 것이다. 일이 조금 잘못되었는데도 여전히 평화로운 사람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 흔들리지 않는 중심.
바로 거기에서 진정한 감사가 피어난다.
스페인 레스토랑에서
지난주, 딸들과 사위들이 찾아왔다.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함께 좀 값이 나가는 스페인 레스토랑에 앉았다. 메뉴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갑자기 20년 전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2004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이런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조차 꿈도 꾸지 못하던 때. 신분이 뒷받침되지 않아 고생하던 시절.
딸들의 사춘기가 떠올랐다. 세대 차이와 문화 차이 속에서 겪었던 오해와 갈등. 한국인 부모와 미국에서 자란 아이들 사이의 긴장과 아픔. 때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울었던 밤들.
딸들의 대학 시절도 떠올랐다. 재정적 여력이 없어 힘들게 보냈던 시간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딸들은 미국 사회에 잘 적응했다. 심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해졌다. 부모를 찾아와 함께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첫째 딸은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임신해서 내년이면 출산을 앞두고 있다. 하나씩 정성으로 두 부부가 잘 준비해 나간다.
둘째 딸의 만성적인 다리 통증도 떠올랐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명확한 진단도 없는 통증이다. 그 아픔을 볼 때마다 내 마음도 아팠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딸은 꾸준히 운동하는 법을 배웠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그 과정이 딸을 더 깊은 사람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지나갔다.
가족과 함께 앉아 있으면서, 나는 다시 깨달았다. 감사는 종종 무엇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마침내 보게 되는 것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저녁에 감사한 것들을 나눌 때, 목이 메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것이 감사였다.
때로 감사는 말이 아니다. 기억이다. 돌아봄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것이다.
바꾸려는 노력이 갈등을 만든다
오랫동안 나는 감정들과 씨름했다.
불안이 오면 빨리 없애려 하는 경향이 있었다. 시기심이 일어나면 억압하려 했다. 분노가 치밀면 잘 직면하고 표현하고 다뤄야 한다고 배웠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크리슈나무르티는 전혀 다른 방법을 말한다.
"시기심이 생겼다고 하자. 우리 교육은 그것을 부정하라, 억압하라, 통제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말한다. 판단하지 마라. 평가하지 마라. 도망가지 마라. 그냥 그것과 함께 살아라."
"마치 어머니가 못생긴 아기를 바라보듯이. 세상은 그 아기가 끔찍하게 못생겼다고 말한다. 하지만 엄마는 말한다. '이건 내 아기야. 나는 이 아이와 함께 살아. 이 아이는 추하지 않아. 내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아이야.'"
감정은 추한 아기가 아니다. 도망치지 않고 안아줄 때, 감정은 자연스럽게 변한다.
천천히,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재정적 불안이 올 때, 예전엔 즉시 반응했다. 기도로, 긍정적 생각으로, 무엇이든 해서 그 느낌을 빨리 없애려 했다.
이제는 잠시 멈춘다. 숨을 쉰다.
"아, 불안이 있구나."
도망가지 않는다. 10초만 그 불안과 함께 앉아있는다.
이 단순한 행위 속에서 배움이 깊어진다. 불안을 관찰하면서, 그 아래에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두려움. 그 아래에 있는 것.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
멈춰서 보는 이 과정이 나를 조금씩 변화시킨다.
이것이 바로 감사의 비밀이다.
감사는 상황을 바꾸지 않는다. 하지만 상황과의 관계를 바꾼다. 저항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은혜를 발견한다.
평범함이 성스러워지는 순간
아침에 책상 앞에 앉는다.
랩탑, 키보드, 책상. 20여 년 동안 함께한 도구들이다.
요즘 나는 이것들을 묵상한다. 각각에 서두르지 않고 15초 동안 주의를 머물게 한다.
이 키보드로 얼마나 많은 글을 썼는지. 이 책상 위에서 얼마나 많은 기도를 드렸는지. 이 랩탑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었는지.
갑자기 이 평범한 물건들이 성스러워진다.
인터넷이 있어 한국과 미국을 연결한다. 책들이 있어 지혜를 배운다. 이 작은 공간이 있어 글을 쓰고 묵상한다.
하나님은 특별한 곳에만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미 여기, 이 평범한 책상 앞에 계신다. 이 낡은 키보드 안에 계신다. 이 일상의 소소함 안에 계신다.
캘리포니아의 은혜
오전이 되면 아내와 함께 트레일로 나간다.
올해 생일에 딸로부터 자전거를 선물받은 아내. 중고지만 아주 가볍고 잘 나가는 자전거다. 지금까지는 아내는 걷고 나는 뛰었다. 이제는 아내는 타고 나는 뛴다. 서로 다른 속도로, 하지만 같은 길을 함께 간다.
캘리포니아의 햇빛. 맑은 공기. 산책로를 걸을 수 있는 다리. 뛸 수 있는 폐.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아내.
15년 전, Concord에 왔을 때 나는 감사했다. 하지만 이내 이 자연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환경을 갖지 못한다. 나 자신도 언제든 건강을 잃어 더 이상 뛰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요즘 나는 뛰며 감사한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이 햇빛에, 감사합니다." "이 공기에, 감사합니다." "이 두 다리에, 감사합니다." "함께 이 길을 가는 아내에, 감사합니다."
뇌과학 연구는 말한다. 긍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최소 15초 동안 붙잡고 있어야 뉴런에 각인된다고.
선한 것을 15초 붙잡는 것은 관상기도와 같다.
아내와 함께 성숙해가는 시간
아침 찻잔 하나를 서두르지 않고 15초 동안 바라본다.
이 잔으로 아내와 함께 얼마나 많은 아침을 나눴는지. 이 작은 의식이 우리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게 했는지.
30여 년을 넘게 함께 살면서, 우리는 많이 변했다.
서로가 많이 성숙해졌다. 부드러워졌다. 갈등이 생겨도 빨리 중심으로 돌아와서 마음을 푼다. 서로를 좀 더 친절하게 대한다. 상대를 위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저절로 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작은 선택들의 결과다.
멈추기. 숨쉬기. 반응하지 않고 관찰하기. 용서하기. 다시 시작하기.
이 찻잔은 그 모든 시간을 담고 있다.
감사합니다.
새로운 길 위에서
지금 나는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
듣는마음 공동체(Listening Heart Community)를 시작했다. 전통적 목회를 내려놓았다. 많은 것이 불확실하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불안이 온다. 당연하다.
하지만 그 불안과 함께 앉아있는 법을 천천히 배워가고 있다.
멈춘다. 숨을 쉰다. 관찰한다.
그러면 불안 아래에 있는 것이 보인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 나를 계속 성장시켜 가신다. 익숙한 것을 내려놓게 하시고, 새로운 것을 배우게 하신다.
이 어려움도 은혜다.
예전 같으면 이 상황을 빨리 해결하려 했을 것이다. 확실한 길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통제하려 했을 것이다.
이제는 배움이 깊어지고 있다.
어려움 자체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자리라는 것을. 불확실함 속에서 신뢰를 배운다는 것을. 통제를 내려놓을 때 더 큰 은혜가 온다는 것을.
지금은 작지만, 내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환경이다. 앞길을 잘 알지 못해도, 어떤 보장이 없어도, 이런 삶을 살고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어떤 아침에는 아직도 이 새로운 길이 나를 어떻게 지탱해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그 불확실함 속에서도 조용한 초대를 감지한다: 여기 머물러라, 열려 있어라, 감사하라.
모든 상황에서, 모든 상황 때문에가 아니라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6-18)고 썼다.
그런데 그는 그 편지를 어디서 썼을까? 쇠사슬에 묶인 감옥 안에서다.
"모든 상황에서"는 "모든 상황 때문에"가 아니다.
우리는 어려움 자체를 감사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할 것을 찾을 수 있다.
불의를 감사할 수 없다. 하지만 불의와 싸우는 과정에서 발견하는 용기에 감사할 수 있다.
갈등을 감사할 수 없다. 하지만 갈등을 통해 배우는 성숙함에 감사할 수 있다.
상실을 감사할 수 없다. 하지만 상실이 가르쳐주는 소중함에 감사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잃어도, 한 가지는 남는다.
"이 숨결에, 감사. 이 눈물에, 감사. 내가 한때 누렸던 것의 기억에, 감사. 빼앗긴 것에 분노하지 않고, 한때 주어졌던 것을 기뻐할 수 있는 능력에, 감사."
기억이 완성하는 감사
누가복음 17장 11-19절에는 나병환자 열 명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이 열 명을 치유했는데, 단 한 명만 돌아와서 감사했다.
열 명은 깨끗해졌지만, 돌아온 한 명만 온전해졌다.
감사는 기억을 통해 완성된다.
내가 얼마나 무력했는지. 그 속에서 어떻게 은혜가 임했는지.
20년 전 가난했던 유학생. 신분이 불안했던 이민자. 갈등 속에 있던 아버지.
그리고 지금, 이 자리.
딸들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이 순간. 손주를 기다리는 이 기쁨. 글을 쓸 수 있는 이 책상. 아내와 함께 트레일을 나가는 이 아침.
돌아본다. 기억한다.
그러면 눈물이 난다. 감사의 눈물이.
오늘, 지금, 여기서
아침: 중심 잡기
아침마다 이렇게 시작한다.
심장에 손을 얹고 세 번 숨을 쉰다.
"오늘 일이 잘 되든 안 되든, 나는 내 안의 평온한 중심을 지키겠다."
평범한 것 하나를 선택하고 서두르지 않고 15초 동안 주의를 머물게 한다. 찻잔, 창문, 책상.
낮: 있는 그대로와 함께
부정적 감정이 일어날 때, 10초만 투자한다.
멈춘다. 숨을 쉰다. "아, [감정]이 있구나." 없애려 하지 않고 그냥 느낀다. "이게 나에게 뭘 보여주려는 거지?"
완벽하게 하지 못한다. 자주 실패한다. 하지만 멈춰서 보는 이 배움이 조금씩 깊어지고 있다.
저녁: 기억하고 돌아가기
잠들기 전, 세 가지를 기억한다. 각각에 주의를 머물게 하고, 가라앉게 한다.
오늘 좋았던 일 하나. 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여주는 카톡 사진. 아내의 미소. 맑은 하늘.
평범했지만 당연하지 않은 것 하나. 따뜻한 물. 전기. 인터넷.
힘들었지만 그 안에서 발견한 것 하나. 불안 속에서 만난 하나님.
절망 속에서의 감사
버틀러 배스는 매일 아침 감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내가 살아있어서."
처음엔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저 말만 했다.
하지만 몇 주가 지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감사는 복리처럼 쌓였다.
작은 감사가 더 많은 감사를 발견하게 했다. 시야가 바뀌었다.
감사는 다른 방식의 존재다.
분노 속에서도 친절. 분열 속에서도 연결. 두려움 속에서도 희망.
감사는 고통을 부정하지 않는다.
고통은 진짜다. 불의는 진짜다. 상실은 진짜다.
하지만 감사는 하나의 거짓된 서사를 무효화한다.
그것은 "이것이 전부다", "절망이 마지막 말이다"라는 거짓말이다.
감사는 조용히 외친다.
"그리스도 안의 나의 참 자아는 여전히 여기 있다."
달처럼 살기
위대한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근원에서 힘을 얻는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도구다. 그들의 천재성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빌린 것이다.
달은 자기 빛이 없다. 하지만 태양 빛을 받아 어둠 속을 비춘다.
내 안의 모든 좋은 것—지혜, 사랑, 인내—은 내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다.
내 삶 자체가 선물이다. 생명도, 가족도, 사역도, 오늘도.
이것을 아는 것이 겸손이다.
이것을 느끼는 것이 감사다.
이것을 나누는 것이 사랑이다.
이제 나는 안다
감사는 상황을 바꾸지 않고 나를 바꾼다.
감사는 특별함을 기다리지 않고 평범함을 변형시킨다.
감사는 갈등을 없애지 않고 갈등 속에서 평화를 찾는다.
감사는 고통을 부정하지 않고 고통 안에서 은혜를 본다.
감사는 외부를 통제하지 않고 내면의 중심을 강화한다—우리가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그 흔들리지 않는 자리를.
감사는 이론이 아니다. 매일의 선택이다.
오늘, 지금, 이 순간.
원망과 감사를 함께 품는다. 원망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감사를 선택한다. 두려움과 사랑을 함께 품는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사랑을 선택한다. 부정과 긍정을 함께 품는다. 현실의 어둠을 보면서도 빛을 선택한다.
이것이 혁명이다. 조용하지만 강력한, 개인적이지만 세상을 바꾸는.
감사는 삶을 바꾸지 않는다. 그것을 사는 사람을 바꾼다.
묵상을 위한 질문
나는 언제 "당연한 것"이 실은 "기적"임을 깨닫는가? 15초만 멈춰 바라보면 성스러워질 평범한 것은 무엇인가?
지금 내가 없애려 하고 있는 감정이 있는가? 만약 그 감정과 10초만 함께 앉아있는다면, 그 아래에서 어떤 은혜를 발견하게 될까?
2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를 돌아볼 때, 어떤 은혜의 여정이 보이는가? 그 여정을 기억하며 오늘 나는 무엇에 감사를 선택할 것인가?
기도
하나님,
오늘 저에게 감사의 눈을 주소서. 상황이 좋을 때만이 아니라 어려울 때도 감사할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주소서.
평범한 것들 안에서 당신의 성스러움을 보게 하시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은혜를 발견하게 하소서.
감사가 저의 안에서 복리처럼 쌓이게 하시고 절망 속에서도 저를 지탱하는 조용한 힘이 되게 하소서.
오늘, 지금, 여기에서 제가 잃은 것보다 여전히 주어져 있는 것을 더 오래 바라보게 하소서.
저를 달처럼 만드소서. 당신의 빛을 받아 어둠 속을 비추는 달로.
오늘, 지금, 이 순간 감사를 선택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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