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히 못할 것 같으면 미루고, 거절이 두려워 '예'라고 말하고, 소속으로 안도를 구해오던 나. 그 아래엔 한 문장이 숨어 있었다.
'나는 충분하지 않다.'
목회자로 30여 년을 살아왔고, 영성지도자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지만, 지금도 이 목소리는 여전히 속삭인다. 소리치지 않는다. 부드럽게, 끈질기게—오래된 상처의 메아리처럼.
이제 나는 묻는다. '나는 무엇으로부터 살고 있는가?'
거짓말 이름 붙이기
완벽주의라는 가면
이번 주 중 하루, 책상 앞에 앉았다. 원고 수정, 책 읽기, 준비해야 할 수련 자료들.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은 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이 가지 않는다. 에너지가 생기지 않는다. 대신 SNS를 확인하고, 이메일을 열고, 유튜브에 손이 간다.
그때 한 문장이 떠올랐다. "미루는 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두려움의 반응이다."
완벽하게 하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 성향. 영어로 책을 읽다가도 모든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불안해지고, 모임에서 말로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면 "나는 충분하지 않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완벽주의는 높은 기준이 아니었다. 그것은 에고가 쓴 화려한 가면—사랑받고 싶어 떨고 있는 내면의 아이를 감추는 방법이었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
더 깊이 들어가면 에고의 또 다른 얼굴이 드러난다.
이번 주에 한 모임 초대가 왔다. 가면 좋은 모임이었다. 의미도 있는 모임이었다. 그러나 정말 나의 참자아가 살아나게 하는 모임인가? 할 때는 선뜻 대답을 못했다. 일정도 빡빡했다. 하지만 나는 "못 간다"고 답을 못하고 미뤘다.
왜? "상처를 줄까봐." "나쁘게 보일까봐." "미움받을까봐."
착한 사람 콤플렉스. 사랑처럼 보였지만, 그 아래에는 두려움이 있었다—좋은 사람으로 남으면 애정을 잃지 않을지 모른다는 연약한 희망.
이 모든 순간에 작동하는 것은 같은 에고의 믿음이었다.
소속과 인정에 대한 집착
어떤 기관과 모임들에 소속되어 있을 때, 나는 안정감을 느꼈다. "나는 거기 속한 사람이다"라는 정체성이 나를 지탱해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떤 모임은 피곤했고, 어떤 모임은 좋았지만 꼭 가야만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반면 지금 듣는 마음 공동체와 외부 기관과 교회에서 안내하는 모임들은 생명력이 느껴졌다.
무엇이 다른가? 전자는 에고의 "해야 한다"에서, 후자는 "이것이 나의 참자아를 살린다"는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었다.
지난 주말 영성수련을 안내하고 났을 때, 한 참여자가 말했다. "더 큰 곳에도 이 프로그램을 광고해보세요. 이 모임은 그렇게 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감사한 마음—인정과 격려로 인한—과 함께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실망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별것 아니네'라고 판단하면?"
이것도 에고였다. "나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들이 나를 정죄할 것이다." 이 두려움이 나를 작게 만들고 있었다.
내적 나침반의 발견

나는 지금 무엇으로부터 살고 있는가?
어느 날 아침, 한 모임을 앞두고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면서, 나는 새로운 질문과 마주했다.
"나는 지금 무엇으로부터 살고 있는가?"
그 질문과 함께, 나는 내 몸에 주의를 기울였다. 어깨가 긴장되어 있었다. 가슴이 약간 답답했다.
"가야 한다"고 생각할 때와 "건너뛰고 싶다"고 생각할 때, 몸의 감각이 달랐다. 전자는 무거웠고, 후자는 가벼웠다.
몸은 머리보다 먼저 안다.
이 결정은 나의 참자아를 살리는가?
며칠 후, 나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조용히 앉아 이냐시오의 성찰기도를 했다.
"오늘 만난 사람들, 한 일들 중에서, 무엇이 나를 더 살아 있게 했는가?"
목회자 과정을 안내한 시간: 가슴이 따뜻했고, 에너지가 흘렀다. 회의에 참석한 시간: 어깨에 긴장이 느껴지고, 시간이 느리게 갔다.
이것은 단순한 "좋다/싫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참자아를 살리는 것과 에고의 기계적 습관을 강화하는 것의 차이였다.
나는 이것을 내적 나침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나침반은 북쪽을 가리킨다. 내 내적 나침반은 참자아를 가리킨다.
몸–마음–소리로 읽는 내적 나침반
이후 며칠간, 나는 내적 나침반의 작동법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마치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작은 나침반을 두신 것 같았다. 금속이 아니라 부드러움으로 만들어진.
| 참자아를 살릴 때 | 에고의 습관일 때 | |
|---|---|---|
| 몸의 느낌 | 가벼움, 열림, 호흡 깊음 | 긴장, 수축, 호흡 얕음 |
| 감정의 색 | 조용한 기쁨, 감사, 평화 | 불안, 미안함, 억울함 |
| 내면의 소리 | "이건 나에게 진실하다" | "해야 한다" "안 하면 욕먹는다" |
내적 나침반은 이성의 계산이 아니었다. "이게 더 유리하니까"가 아니었다. 그것은 감각적 인식이었다.
어떤 결정을 앞두고 마음이 조용해졌을 때, 몸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가벼움" 또는 "무거움". 이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참자아는 때로 말로도 하지만—조용하고 분명하게—대부분 감각으로 말한다. 몸의 가벼움과 무거움, 가슴의 열림과 닫힘, 호흡의 깊이와 얕음. 이것이 참자아의 언어였다.
알아차림—자동반응 앞의 1초
불안 속에 머무는 법
며칠 후, 영성지도 세션을 앞두고 불안이 올라왔다. "지난번에 좀 어색하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고 끝났는데, 오늘은 어떻게 해야 하지?"
예전 같으면 준비를 더 하거나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 에고—내가 충분하지 않다는 믿음—를 보호하려는 선택이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그 불안 속에 머물렀다. "나는 지금 불안하다. 그러나 이 불안을 느끼는 '나'는 그것보다 크다."
이 문장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러자 여전히 불편했지만, 그 불안이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했다.
세션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을 싫어하고, 다른 사람들도 싫어하며, "다 끝내고 싶다"고 말했다. 세션 내내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나는 몇 가지 질문을 했지만, 그의 마음은 닫혀 있었다.
예전 같으면 나는 불안한 마음에서, "뭔가 해줘야 하는데." "이렇게 끝나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 불안 속에 머물렀다. 그리고 조용히 그와 함께 앉아 있었다. 극적인 깨달음도 없었고, 눈물의 치유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무겁게 세션을 마쳤다.
하지만 세션이 끝나고, 무거운 마음이 전해져서 나에게 남아 있긴 했지만 그 마음을 내어드릴 수 있었다.
멈춤 1초: 자동반응에서 자유로
알아차림은, 내가 발견한 것은, 생각이 아니라 호흡이었다—나를 나 자신의 두려움의 파도에서 익사하지 않게 하는 하나의 조용한 호흡.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감정을 느끼는 능력. 두려움을 피하지 않으면서 두려움에 삼켜지지 않는 능력.
그 자리에 서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더 이상 나를 자동적으로 움직이지 못한다.
완벽주의로 미루는 것. 착한 사람 콤플렉스로 거절하지 못하는 것. 소속감에 대한 집착으로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 영성지도에서 뭔가 보여주고 싶은 것. 잘못하면 판단받을까봐 작아지는 것.
이 모든 에고의 자동적 반응들을 나는 이제 조금씩 더 깊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반응에 따라 움직이기 전에,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멈출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자유의 시작이다.
매일의 작은 멈춤들
내적 나침반과 알아차림을 발견한 후, 나는 하루를 다르게 살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잠시 앉아서 호흡을 느꼈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일정을 볼 때, 예전처럼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오늘 하나의 의식적 행위는 무엇인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이것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즉시 판단하지 않았다. 조금 시간을 두고, 몸의 감각을 느꼈다. 가벼움인가, 무거움인가.
대화를 할 때도, 말하기 전에 잠시 멈췄다. "이 말은 진실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두려움에서 나오는가?"
이 모든 것이 작은 멈춤들이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짧게 멈춰서, "나는 지금 무엇으로부터 살고 있는가?"를 물었다.
이것이 관상적 경청의 기도였다. 하나님께서 머리의 생각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몸의 감각을 통해, 감정의 움직임을 통해, 내면의 고요함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배우는 것.
침묵 속에서 에고를 바라보기
작은 멈춤과 함께, 나는 더 긴 침묵의 시간도 필요했다.
매일 아침, 아니면 하루 중 조용한 시간에, 나는 20-30분씩 앉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하지도, 기도 제목을 나열하지도 않았다. 그저 앉아 있었다.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느꼈다. 몸의 감각을 느꼈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것들이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 시간은 "무언가를 얻기 위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참자아 자체를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하나님께서 느낌을 통해, 몸의 신호를 통해, 깊은 고요함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말이 아닌 현존으로, 생각이 아닌 감각으로, 요구가 아닌 내어드림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이 깊은 침묵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나는 충분하지 않다"는 목소리가 단지 에고의 목소리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된 습관, 오래된 두려움의 메아리였다.
어느 날, 침묵 속에 앉아 있을 때, 다양한 에고의 소리들이 찾아왔다. 지금 해야 할 것들을 미루고 있는 나에 대한 자책하는 마음, 부담감. 광고를 부탁해야 하는 부담감. 다른 사람들이 나의 못난 모습을 알게 되면 어쩌나? 이런저런 소리들...
예전 같으면 이 생각들에 휩싸여 불안해졌을 것이다.
나는 그 생각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하늘을 지나가는 구름처럼. "아, 이것이 에고가 작동하는 방식이구나. 이렇게 두려움이 만들어지는구나."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분석하고 있지 않았다—그저 붙들려 있었다. 생각들은 지나갔지만, 나는 하나님의 고요한 손 안에 머물렀다. 생각과 나 사이에 공간이 생겼다. 이것이 관상기도의 힘이었다. 침묵 속에서 에고의 작동을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을 갖는 것.
바쁜 삶—일, 관계, 책임—한가운데서, 이런 질 높은 침묵의 시간이 더욱 중요했다. 하루 중 단 20분이라도, 에고의 소음에서 벗어나 참자아와 만나는 시간. 그 시간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오게 했다.
사명의 삶: 해야 함에서 부름으로
세 가지 층위의 삶
이 여정을 통해, 나는 삶의 세 가지 층위를 발견했다.
해야 하는 삶은 에고의 두려움과 의무감에서 나온다. "목회자니까 해야지." "책임감 있는 사람이니까 해야지." 이 삶은 무겁다.
하고 싶은 삶은 개인의 선호와 욕구에서 나온다. "이것이 나를 기쁘게 해." "이것이 재미있어." 이 삶은 가볍지만, 때로 얕다.
사명의 삶은 참자아에서 나온다. "이것이 나의 참자아를 풍성하게 한다." "이것이 나를 진정으로 살린다." 이 삶은 깊고, 충만하다.
사명의 삶은 항상 즐겁지 않다. 때로 힘들고, 불편하고, 두렵다. 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평화가 있다. "나는 지금 제자리에 있다"는 감각이 있다.
참자아를 풍성하게 하는 선택
삶이 단순해지면서, 나는 더 많은 선택의 순간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매 순간, 나는 선택할 수 있었다. 에고를 보호하는 선택인가, 참자아를 풍성하게 하는 선택인가?
나 자신에게 영양을 주지 않는 만남들과 모임들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영성지도에서 "뭔가를 보여주려는" 욕구를 따르기보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그냥 함께 있으려 했다.
처음에는 "이러면 나는 고립되는 거 아닌가?"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삶이 단순해지자, 에너지가 모였다. 흩어졌던 주의가 중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나는 조용한 기쁨을 맛보기 시작했다—내 일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의 일에 속해 있다는. 진짜 나를 살리는 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영성지도에서는 오히려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곤 했고, 그것이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을 수 있는 마음이 조금씩 더 커져갔다.
영적 대화의 본질
영성지도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어제 한 피지도자가 경계 설정에 대한 질문을 가져왔다. 예전 같으면 나는 그 문제를 보다 해결하는 쪽으로, 그래서 보다 구체적인 어떤 통찰과 안내를 받고 갈 수 있도록 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런 알아차림을 가지고 임하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떻게 변화시켜 오셨나요?"
그녀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마치 적절한 말을 찾는 것처럼. 그리고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5년 전, 3년 전, 작년, 그리고 지금. 하나님께서 그녀 안에서 일하신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그녀의 눈이 빛났다. 목소리에 생명력이 돌았다. 그녀는 단지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일하고 계신 사람이었다.
세션이 끝날 때, 그녀는 말했다. "이제 알겠어요. 하나님께서 계속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는 그저 그 일하심을 신뢰하고 따라가면 되는 거군요."
이 과정에서 나는 영적 대화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영적 대화는 문제 해결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함께 머무는 것이다.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빛이 스스로 일하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것."
이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능동적인 사랑의 행위이다. 상대가 자신을 미워할 때도, 막혔을 때도, 답답할 때도,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있는 것.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였다. 나 자신이 먼저 내 안의 참자아와 연결되어 있을 때. 내가 먼저 "나는 충분하다"는 진실 속에 머물 때.
여전히 "뭔가를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올 때가 있다. 하지만 조금씩, 그저 함께 머무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
"나는 충분하다"—갈라디아서 2:20의 고백
"나는 충분하다."
이것은 긍정 확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발견이었다.
나는 완벽하지 않다. 지금도 여전히 서툴고, 부족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나는 충분하다.
왜?
나는 무언가를 이루어서 충분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아서 충분한 것이 아니다. 완벽하게 살아서 충분한 것이 아니다.
나는 존재하기 때문에 충분하다.
이 존재는 진공 속에 있지 않다. 나의 존재는 존재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 안에서 나는 존재한다. 하나님의 숨결로 나는 살아 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나는 이미 충분하다.
바울은 말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이것은 신비로운 이론이 아니었다—그것은 내 삶의 조용한 구석구석에서 실재가 된 사랑이었다. 에고가 물러나고 참자아가 깨어날 때, 나는 더 가볍고 자유로웠다. 두려움이 작동하지 않을 때, 나는 더 사랑할 수 있었다. "나는 충분하지 않다"는 거짓말에서 벗어날 때, 나는 더 온전해졌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었다. 이것이 참자아의 진실이었다.
오늘의 초대
나는 존재하기에 충분하다. 하나님 안에서 숨 쉬는 존재이기에 충분하다. 에고의 소음이 잦아들면,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조용히 드러난다.
오늘 단 한 번이라도 멈춰 물어보자.
"나는 지금 무엇으로부터 살고 있는가?"
"이 결정은 나의 참자아를 살리는가?"
"이 순간, 나의 몸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고 지금 잠시 멈춰, 이 질문들과 함께 앉아보자.
- 지금 내 몸은 가벼움과 무거움 중 어디를 말하고 있는가?
- 오늘 한 번, 두려움이 아닌 사랑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작은 행동은 무엇인가?
- 내가 붙들던 소속·이미지 중, 참자아를 가리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불안 속에서도, 불완전함 속에서도, 나는 존재한다. 하나님 안에서 나는 존재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아마도, 언제나 그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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