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일찍 문을 닫아도 괜찮다

한계와 내려놓음을 통해 기쁨을 되찾다

2025.11.15 | 조회 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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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ening Heart

관상적 기도, 경청, 그리고 삶 (contemplative prayer, listening, and life)을 위한 글

1. 에고는 공백을 견디지 못한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다. 글쓰기도, 설교도, 영성수련 모임도.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모든 것들이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겉으로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 같지만 내면에는 미세한 무거움이 깔려 있다. 공간이 아니라, 공백이 느껴진다.

그 공백을 에고는 견디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순간, 침묵이 조금만 길어지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소리가 올라온다.

"이렇게 멍하니 있어도 되나?" "뭔가 하고 있어야 가치 있는 사람이지."

그러면 에고는 곧바로 자극을 찾는다. 유튜브에서 흥미로운 쇼츠를 누르고, 더 재미있는 영상을 찾고, 혹은 일에 스스로를 던져버린다.

이상하게도 해야 할 일이 많고 마감이 쫓아올 때 에고는 안도한다.

"바쁘면 적어도 쓸모는 있는 거잖아."

하지만 그 길 끝에서 나를 맞이하는 것은 기쁨이 아니라 메마름이다.

자극이 끝나면 공허가 찾아온다. 그 공허를 덮기 위해 또 다른 자극을 찾는다.

그렇게 조금씩 무기력해져 간다.

 

2. 완벽주의라는 얇은 갑옷

독자들의 기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부터였다. 손이 가지 않기 시작한 것은.

나는 '잘 해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실망시키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이미지에 나 자신을 끼워 맞추느라 정작 나는 사라져 있었다.

기쁨이 사라진 자리에는 항상 에고의 두려움이 있었다.

내가 나의 역할과 동일시되는 순간 본질은 숨고 가면만 남는다.

가면은 무겁다. 가면은 숨을 막는다. 가면을 쓴 채로는 기쁨이 올라올 수 없다.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동시에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차는 타들어가고 나는 지쳐간다.

 

3. 전기가 나가던 밤

“고요 속에서, 나의 한계마저도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Image generated by ChatGPT
“고요 속에서, 나의 한계마저도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Image generated by ChatGPT

이번 주, 전기가 예고 없이 나갔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촛불 하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내와 저녁을 먹고 어두운 아파트 마당을 걸었다. 어린 시절 별빛 아래를 걷던 기억이 떠올랐다. 촛불 켜고 가족들과 이야기하던 밤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그때 깨달았다. 저녁이 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쉴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 그것이 축복이었다는 것을.

전기는 결국 다시 들어왔지만 내 안에는 이런 생각이 남았다.

저녁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아예 정해 놓으면 어떨까?

 

4. 침묵 속에 그냥 앉아 있기

다음 날도 에너지가 올라오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였다.

그런데 나는 산책을 나갔다. 산책 후 방 안 기도의 자리에 앉았다. 요동치는 마음을 그냥 지켜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졸기도 했다.

점심을 먹고 다시 산책을 했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 아무 것도 붙들지 않는 침묵 속에 머물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니 몸과 마음이 고요해졌다. 평온이 찾아왔다.

그 빈 마음으로 영성수련 모임에 들어갔다. 나는 여전히 힘이 없었다. 준비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하셨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빈자리를 통해 오히려 더 역동적으로 움직이셨다. 사람들의 마음이 열렸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일어났다.

나는 그것을 지켜보았다.

끝나고 찾아온 평온함. 그것이 증거였다.

진짜 준비는 발제를 완벽하게 쓰는 것이 아니었다. PPT를 멋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존재가 하나님의 현존 안에 깊이 머무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5. 할머니의 작은 맛집

시골에 할머니가 운영하는 작은 맛집이 있다. 혼자 일하시기 때문에 그날 준비한 재료가 다 떨어지면 일찍 문을 닫는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한계를 안다. 그래서 정말 맛있는 음식을 낸다.

그 이미지가 마음에 머물렀다. 듣는마음공동체를 세울 때도 이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낼 수 있는 것이 적으면 일찍 문을 닫아도 괜찮다.

무리하게 완주하다가 무너지는 것보다 신실하게 꾸준히 가는 것이 낫다.

한계를 인정할 수 있으려면 한 가지가 깊어져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심겨진 존재다." (에베소서 3:17)

이 확신.

그 사랑 안에 내가 뿌리내리지 못하면 언제나 마음은 이렇게 속삭인다.

"더 해야 살아남을 수 있어." "사람들이 실망하면 어떻게 하지?" "이번에 못하면 다 끝나는 거야."

그러면 나는 더 바쁘게 움직이고 더 잘하려 애쓰다가 오히려 영혼의 힘을 잃어버린다.

 

6. 바라보고 이름 짓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

이것이 관상적 기도다.

관상은 어떤 신비한 체험이 아니라 조용한 방 안에서 나의 기쁨 없음, 무거움, 두려움, 완벽주의, 인정 욕구를 하나하나 바라보며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주님, 이것이 지금 제 안에 있습니다."

그것을 억누르지도 합리화하지도 않고 그저 빛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

그때 조금씩 참 자아가 드러날 공간이 생긴다. 거짓 자아의 큰 목소리가 조금씩 힘을 잃는다.

그 공간에서 나는 다른 사람 앞에서도 조금 더 온전한 현존이 될 수 있다.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지나가는 통로가 된다.

 

7. 다시 기쁨으로

"처음에 기쁨으로 시작했다가 지금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되었을 때 어떻게 다시 기쁨을 회복할 수 있을까?"

몇 가지 작은 길이 보인다.

낮은 에너지 상태를 적으로 보지 않기

기력이 떨어지고 의욕이 사라질 때 에고는 "망했다"고 말하지만 영혼의 입장에서 보면 이때가 오히려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기회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는가? 지금 동기는 사랑인가, 두려움인가? 이 일은 내 존재와 사명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이 질문들이 삶의 강물이 조금 방향을 틀게 해 준다.

강물이 곧게만 흐르지 않고 굽이굽이 흐르듯 나의 여정에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다는 것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연습이다.

 

오늘 할 수 있는 만큼만

기쁨을 회복하는 일은 대단한 결심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늘 내가 쓸 수 있는 만큼만 쓰기. 오늘 내가 준비할 수 있는 만큼만 준비하기. 오늘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만큼만 사랑하기.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 "오늘은 이만큼으로 충분합니다."

이는 게으름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방식이다.

 

침묵과 몸의 움직임

짧은 산책. 5분 동안 숨만 바라보기. 의자에 앉아 몸의 긴장을 느끼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있기.

이런 순간들이 영혼의 숨구멍이 된다.

머리와 가슴만 일하고 몸이 계속 무시당하면 언젠가 영혼 전체가 신호를 보낸다.

"이제 그만 멈춰 달라"고.

 

처음의 사랑을 기억하기

처음에 이것이 내게 기쁨이었을 때 무엇이 좋았는가?

그때의 가벼움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씩 문이 열린다.

거창하게 완벽하게 하려는 생각을 내려놓는다. 남들을 의식하는 마음을 내려놓는다.

내 안에 있는 미세한 작은 기쁨을 찾는다. 그것을 중심으로 천천히 하나씩 해나간다.

 

8. 오늘은 일찍 문을 닫아도 괜찮다

기쁨 없이도 나는 한동안 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러나 기쁨 없이 하는 일은 언젠가 반드시 나의 존재 중심을 고갈시킨다.

내 안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초대는 이런 말인지 모른다.

"지금 힘이 빠진 네 상태를 잘 보아라. 좀 쉬어라. 네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조용히 바라보아라. 그리고 다시, 내 안에 거하는 존재의 기쁨으로 돌아오라."

오늘 나는 이렇게 선택할 수 있다.

"오늘은 내가 낼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으니 있는 것까지만 성실히 내고 조금 일찍 문을 닫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무리하게 완주하다가 무너지는 것보다 이렇게 신실하게 조금씩 걸어가는 것이 더 깊은 길이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조금씩 배우게 된다.

기쁨은 성과에서가 아니라 현존에서 온다는 것. 많이 하는 데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것에서 온다는 것. 내가 무엇을 이루느냐보다 나는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가 더 근원적이라는 것.

그리고 아주 천천히, 나는 다시 알게 된다.

내가 감당하는 이 사명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 안으로 흘러 들어가기 위한 한 사람의 작은 통로라는 것을.

오늘, 그 통로가 조금 좁아 보여도 괜찮다. 조금 일찍 문을 닫아도 괜찮다.

이 신뢰 안에서 나의 기쁨은 다시 길을 찾을 것이다.


묵상을 위한 질문:

나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그 한계를 만났을 때 내려놓을 수 있는 신뢰가 있는가?

한계 앞에서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 두려움 아래에서, 진짜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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