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 십 년을 맞이하는 새 겨울

그 끝자락에서

2023.02.27 | 조회 4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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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심

내가 사랑한 모든 존재들에게

 

안녕하세요. 미지입니다. 오늘 제가 있는 곳은 날씨가 정말 좋았어요. 봄이다, 하고 느낄 수 있을 정도루요. 여러분들의 날씨는 어땠나요? 부디 포근함 한 줄기가 깃들고 있기를!

이전에 번외 느낌으로 제가 지형과 주고받았던 편지를 기억하고 계신가요?

2회에 걸쳐 보내 드린다고 했었는데, 오늘 그 두 번째 편지를 배달해 보려고 해요. 흑심은 앞으로도 이렇게 미지와 주연, 따로 또 같이 쓰면서 굴러갈 것 같습니다. 이번 주에는 주연과 사랑에 대한 대담이 예정되어 있어요. 물론 정리해서 여러분들께도 닿을 수 있도록 할 거구요.

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만남도 기대해 주세요! 또 만나요.

총총.

 

 

 


 

 

언니에게

겨울 잘 보냈어? 본의 아니게 해의 시작과 겨울의 종점을 찍는 편지가 돼 버렸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쓰고 있습니다. 사실, 편지 자체는 1월 말 즈음에 마무리된 상태였어.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핑계가 먹히지 않을 정도로 쉬기도 했고, 처음으로 어른의 사정이라는 걸 몸소 겪어 보면서 거나한 숙취의 세계에 대해서도, 가족과의 이별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얘기가 정말 많았는데, 퇴고하는 과정에서 뭔가 아니라는 기분이 들었어. 그냥, 이런 이야기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어. 나한테는 이 편지가 조금 무거웠나 봐. 이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누가 궁금해한다고, 싶었던 거지. 내가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줄 만한 위치도, 자격도 없는데 의미를 담은 글을 쓰기 위해 쥐어짜고 있었어. 이래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결국 편지를 지우고, 생각해 봤어. 언니에게 내 스물의 어떤 모습을 알려 주고 싶었는지. 스물만이 쓸 수 있는 글은 무엇인지. 명료하게 답이 떠오르질 않아서 며칠 골머리 좀 썩히다가, 포기 상태에 접어들기 직전에 생각이 난 거야. 그냥 쓰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너무 어렵게 받아들이고 있었어. ‘그냥이 전부였는데.

이십 대로 접어들고 처음 맞는 겨울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나 뭐 했더라?’. 모든 계절을 통틀어서라도, 이번 겨울은 우울할 틈도 없이 정신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는데, 남는 게 없었어. 아무리 돌이켜 봐도 선명한 기억이나 찰나의 기분 같은 게 떠오르질 않아. 어떤 하루는 글만 쓰고, 어떤 하루는 잠만 자고, 또 어떤 하루는 약속이 연달아 잡혀서 종일 밖에서 고생만 하고. 아주 단편적인 사실만 남고, 정작 기억하고 싶었던 것들은 모두 사라졌더라. , 허무하다고 해야 할까. 실은 지내온 일흔여섯 개의 계절 중에 거창하게 보낸 계절이 더 드물었는데도. 시간에 의미 부여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그러고 있었나 봐. 그래도, 아직 포기하긴 이르지. 내 스물에는 아직 세 개의 계절이 더 남았으니까.

, 정말 선물 같은 일이 있긴 했어. 우리처럼 변화에 기민한 사람들은 겨울이 유독 힘들잖아. 폐부까지 들어차는 숨이 너무 차가워서 우울하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낙엽도 없을 정도로 거리가 비어 있어서 외롭고. 그런 걸 계절 탄다고 하던가. 여하간, 나는 그게 심했어. 겨울 맞을 생각에 가을부터 힘들었고, 뜨거운 여름을 보내다가 날씨가 조금 풀어지면 곧 가을이 온다는 생각에 슬펐어. 그만큼 겨울이라는 게 나한테는 큰 공포였어. 여태 살고 싶던 나를 생사기로로 밀치는 그 계절이. 아니나 다를까. 12월 끝자락에 나는 애인과 헤어지게 됐고, 집은 여러 문제로 시끄러웠고, 나는 여전히 우울했어.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지. 그런데, 1월을 맞고 나니 문득 이번 겨울은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거야. 다가올 미래의 어떤 겨울에 죽더라도, 이 겨울은 내가 살아야겠다고. 거창한 이유도 없이 든 그 생각이, 본능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어. 생존 본능만큼 큰 부피를 차지하는 게 자살 욕구니까. 중요한 건, 이번 겨울은 내가 살았다는 거. 살고 싶었고, 아주 잘 살아남았다는 거. 꽃봉오리가 갈라지고, 퍼져나가는 걸 언니와 함께 볼 수 있다는 거.

꽤 좋았어. 내가 가진 삶에 대한 열망을 여과 없이 느낄 수 있는 계절이었어. 겨울은 원래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시기라고도 하잖아. 남들이 보기엔 별거 없고, 형편없을 수도 있지만, 살고 싶었구나, 그 하나를 깨닫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엄청난 준비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 있지?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은 늘 이런 마음으로 살고 있었다고? 완전 손해다!’ 하기도 했는데. , 어쩌겠어? 지금이라도 깨달은 것에 의의를 두고 열심히 살아가려고. 과거를 곱씹는 일보다 미래를 그려가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았으니까.

언니의 겨울은 어땠어? 서른이 맞는 겨울은 어때? 이번 겨울이 언니에게도 조금은 살고 싶었던 계절이었으면 좋겠다. 어제 정현우 시인의 시집 소멸하는 밤을 읽었어. ‘기도밖에 할 수 없는 / 마음 위로 마음은 왜 쌓이는가.’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그게 어쩐지 나 같더라고. 나처럼 신앙심이 얄팍한 사람도 없을 텐데, 난 언니를 생각하면 기도하게 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에게 자꾸 매달리게 돼. 더 기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언제나 풍요로운 마음을 갖게 해 달라고. 해 줄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는 무능력한 동생이라니, 좀 그런가? 언젠가, 언니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많아지는 날이 오더라도 기도는 멈추지 않을게. 나는 그게 꼭 이뤄졌으면 좋겠거든. 일시가 아니라, 아주 오래. 영원히.

세상과 싸우는 무기로 다정을 고른 만큼, 우리 올해는 더욱 굳건한 마음으로 살아가자. 늘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고, 사랑할게. 내 편지 받아 줘서 고마워.

ps.

왜 울고 난 뒤 두 눈은 따스할까

그토록 뜨거운 심장을 가져본 적이 있다고 믿기 위해

정현우, 스콜

 

 


 

 

지형에게

안녕. 식상한 날씨 인사가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때가 왔어.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그 사실을 누군가와 함께 나눈다는 건 어쩐지 지는 계절 속에 그 사람이 있었고, 피는 계절 속에도 있으리라고 말하는 것 같지 않니. 그래서 말인데, 네가 있는 곳은 어땠어? 오늘의 내가 봄 기운을 느낀 것처럼 너도 느꼈을까?

어떤 시기의 끄트머리에 닿으면 지나왔던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되지 않니. 겨울이 어땠냐는 너의 물음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 겨울을 회고했을 텐데, 네가 그렇게 물어봐 주어서 혼잣말에 그치지 않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어. 가까운 과거를 돌이켜보는 일련의 과정들이 외롭지 않게 진행되었다는 말이야.

네가 그러했듯 나 역시 녹록치 않은 겨울이었어. 집안 상황, 나 개인의 무력함과 우울함, 쉽지 않은 재취업의 여정까지.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어제까지의 일인 것 같아. 오늘의 나는 알 수 없게 후련해. 명확히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어째서일까?

나는 내가 스물까지 살아 있을 줄 정말 꿈에도 몰랐어. 천재지변을 당하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어떻게든 그 전에 죽을 것만 같았거든. 그런데 너무도 멀쩡하게 스물이 되었지. 그걸 받아들인 후에는 어렴풋이 서른을 예감했던 것 같아. 나는 또 서른이 되겠구나. 그리고 정말 서른이 되었지. 지난 편지에서 말했었나? 서른이 기껍다구. 정말 그래. 어릴 때였으면 더 길고 깊게 아파했을 일들을 서른의 나는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어. 그래, 불행은 때로 극복이 아니라 수용의 문제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해.

살아 있다는 게 죄스러웠던 과거의 나는 사실 특출나지 않은 나를 인정하지 못하고 그걸 숨기고 싶어서 모든 것에 과한 자격을 부여했던 것 같아. 그러고는 그 자격에 미달됨을 마음껏 슬퍼했지. 지금은 어떻냐구? 그냥, 나는 나인 그대로 나라는 생각을 해. 어떠한 자격이나 기준 같은 것 없이. 단지 나. 그냥 나.

우리는 그냥 우리로 살자. 조금은 더 단순하게. 유연하고 단단하게. 딱딱한 건 부러지기 일쑤지만 단단한 건 구부러질 수 있는 이미지니까. 그렇게 서로를 향해 늘어지고 기울어지자.

나 역시 기도할게. 신은 믿지 않지만, 세상의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는 너를 믿으니까. "기도란 떼쓰다의 정중한 말"(조시현)이라고 하던데, 정중하게 떼쓰는 언니의 말을 너는 꼭 들어줄 테니까.

또 편지할게. 그때까지 안녕하자.

언니가

 

 


 

 

 

 

<흑심; 내가 사랑한 모든 존재들에게>는 선인장도 안아 주는 '미지'와 고양이처럼 나뒹구는 비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주연'이 함께합니다.

· 미지: poem.aboutyou@gmail.com / 마음을 기다리고 있어요.

· 주연: micoks2@naver.com / 답장에 답장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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