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일 구독자유니의 문장
모든 문장은 아래 책 속에서 나왔어.
《제4의 벽》, 박신양·김동훈 지음, 민음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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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건 축하받을 일일까? 살아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일까?
그리고 축하하는 방식이라는 건 꼭 정해져 있어야 하는가?
지금 내가 느껴야 마땅할 것 같은 감정들이 평소에도 익숙하지 않은데
생일날에는 더욱 생소해진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나'는 원래 있지 않다.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나는 하나가 아니며 정신분열증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나는 여러 개이다.
또한 그 각각의 나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불변의 성질을 가진 것도 아니다.
나는 어쩌면 그리움이라는 별로 오해의 여지 없는 감정을 방패 삼아
새로운 일이 벌어지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말없이 표현하는 방법에 대한 철저한 훈련.
저건 어떤 훈련과 과정을 통해 가능하단 말인가.
그리고 어떤 선생님이 학생들의 저런 의도를 철저히 이해하고
그것을 용인해 준다는 말인가.
그 선생님은 도대체 누구라는 말인가.
주저 없이 슈킨 대학교로 옮겼다.
그렇게 또다시 1학년으로 돌아갔다.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일이 학년 때 다 배운다는 확신으로.
세상의 모든 새로운 시도는 강력한 반발을 동반한다.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마치 계명처럼 붙들고
아는 것이 흔들리는 경험 앞에서는
마치 지구가 망할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그래서 조금이라도 새로운 모든 움직임에는
거세다 못해 목숨 걸고 항거할 정도로
반발과 비난을 퍼부어야 직성이 풀리고
그렇게 나의 안전함을 확인하려는 것 아니겠는가.
지름길을 가려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 드는 가책과 죄책감은
정말로 오랫동안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건 뼈아픈 일이다. 그래서 헛된 꿈은 꾸지 않는다.
헛된 꿈을 포기하는 순간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은 비교적 단순해진다.
진심인가, 진정인가, 불순물이 들어 있지는 않은가,
정말로 솔직한가?
지금도 나는 내가 충분히 확신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그래서 무언가를 진정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서
기쁜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아무리 짧아도 제대로 말하기가 힘들다.
그게 비록 나에게 주어진 대사일지라도.
러시아인들이 대혼란기에 예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볼 수 있다면
나도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좀 더 큰 시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혼란 속으로 들어가서 직접 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은 없는 일이었다.
혼란을 안에서 겪는 것과 밖에서 지켜보는 것은 다른 일이다.
나는 혼란의 안쪽에서 그것을 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작은 미술관에서 어떤 그림 앞에 섰는데
이 우주에 오직 그림과 나만 존재하는 것 같은
엄청난 순간을 경험했다.
거기가 어딘지, 내가 지금 여기에 왜 서 있는지,
어디서 왔는지, 내가 누구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 그림과 나만 있었다.
몰입과 이화(또는 이완)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몰입은 어딘가로 빠져들도록 상상력을 작동하게 해준다.
반면 이화는 몰입을 방해하고 이성 작용을 발동시킨다.
그리고 그 둘에 대한 이해와 사용과 균형,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총체적인 리듬과 이미지는
표현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관람하는 사람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고 유기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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