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스포츠 올림픽에 대한 IOC와 사우디 아라비아의 동행이 끝내 파국으로 끝났습니다. 지난 2024년 7월, IOC와 사우디는 올림픽 타이틀을 사용하는 e스포츠 대회를 만들기 위해 12년짜리 파트너십을 맺었고, 대회의 이름은 '올림픽 e스포츠 게임'으로 정해졌습니다.
하지만 압도적 재력과 추진력으로 EWC(e스포츠 월드컵)를 개최했던 사우디답지 않게 '올릭픽 e스포츠 게임'은 별다른 소식이 없었습니다. 이후 IOC는 올해 2월 첫 대회 개최 시기를 원래 계획이었던 2026년에서 2027년으로 미룬다고 발표했지만, 끝내 지난 11월 3일 파트너십의 종료를 알리는 IOC의 성명 발표가 있었습니다.
※ IOC와 사우디의 파트너십에 대한 지난 소식들은 그 동안 e스포츠 크리틱이 전해드린 뉴스레터들을 보시면 전체적으로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기존의 우려 사항들

e스포츠 업계는 애초부터 사우디와 IOC의 파트너십에 대해서 우려의 시선을 보냈습니다.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고요. 복습하는 차원에서 지난 뉴스레터에서 어떤 우려를 했었는지 간단히 요약해보겠습니다.
- 아시안게임과 다른 모델: 아시안게임은 e스포츠를 정식 카테고리 중 하나로 받아들였고, 덕분에 각 e스포츠 종목의 국가대표는 스포츠 선수들과 똑같은 대우와 권위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별도의 대회를 표방한 올림픽 e스포츠 게임즈는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특수한 장치를 고민해야 합니다.
- 모호한 정체성: 만약, IOC가 이전에 개최했던 '올림픽 e스포츠 시리즈'처럼 정식 종목을 신체 활동을 베이스로 한 게임으로 한정짓는다면, 올림픽 e스포츠 게임즈는 e스포츠도 아니고 스포츠도 아닌 모호한 대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 자금조달에 대한 고민: 단독 대회를 표방한다면 이를 운영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한데, 원저작권자(게임사)가 존재하는 e스포츠의 특성상 올림픽처럼 천문학적인 중계권료 수입을 기대할 수 없고, 스폰서-광고 수입 역시 첫 대회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사우디에 크게 의존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 EWCF의 역할 범위 설정: EWCF(e스포츠 월드컵 파운데이션)는 압도적 자금력으로 단숨에 e스포츠씬의 큰 손이 되었습니다. 프로게임단은 물론 주요 게임사의 지분까지 확보하며 20개가 넘는 종목으로 EWC를 개최하고 있죠. 파트너십이라고는 하지만 올림픽 e스포츠 게임즈가 실제로 구현되려면 EWCF이 많은 일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IOC가 EWCF에게 어느 정도의 권한을 부여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문제나 갈등이 발생하지 않을지 우려되었습니다.
과연 이 우려사항들은 실제로 IOC와 사우디의 파트너십이 깨지는 중요한 원인들이 되었을까요? 지금부터는 외신 보도 등을 통해 알려진 파국의 원인들을 살펴보면서 IOC와 사우디의 향후 행보까지 예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파국의 원인들

파트너십 취소에 대한 IOC의 공식 성명 발표 이후 IOC나 사우디의 추가적인 입장 발표는 없었지만 , 여러 해외 미디어들은 취재를 통해 파국의 원인들을 다양하게 분석했습니다.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지난 6월에 취임한 새로운 IOC 위원장(커스티 코번트리)의 취임 이후 사우디와의 큰 견해 차이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특히, 올림픽 e스포츠 게임즈를 위해 EWCF가 국제e스포츠연맹(IeSF), 글로벌e스포츠연맹(GEF)와 연계/협력해야 한다는 IOC의 입장이 가장 큰 마찰 이슈였다고 합니다.
- Insidethegames의 보도에 따르면 IOC가 모든 관리 기관에 여성 지도자, 리더급으로 채용하고, 올림픽 비차별 원칙과 국제 제재를 준수해야 한다는 요구로 인해 IOC와 사우디의 추가적인 마찰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 Esports Advocate의 보도에 따르면, 지난 8월 EWCF의 네이션스 컵 발표는 사실상 IOC와의 관계 종료를 선언하는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e스포츠로 하는 국가대항전은 올림픽 e스포츠 게임즈와 겹치는 컨셉이었으니까요.
- GAMESMARKT는 사우디에 대한 너무 높은 의존도를 원인으로 분석했습니다. 첫 대회 이후 올림픽처럼 여러 나라와 도시에서 순환 개최를 하는 등 IOC 주도의 대회로 만들기에는 10년이 넘는 긴 파트너십 계약과 사우디의 압도적 재정, e스포츠 산업 내에서의 독보적 위치가 방해 요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 종목 선정에 대한 이견 역시 여러 보도를 통해 전해지는 마찰 요소입니다. IOC가 과거 '올림픽 e스포츠 시리즈'에서 신체 활동을 기반으로 한 게임(대표적으로 스포츠, 심레이싱 등)만을 e스포츠 종목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토마스 바흐 전 IOC 위원장은 리그 오브 레전드, 도타2 같은 종목들을 'e게임'이라는 정체성 모호한 단어로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알려진 원인들을 종합해보면, IOC와 사우디는 '올림픽', 'e스포츠'를 두고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요 현안에 대해서 이견을 좁히지 못해 마찰이 있었고, 이는 압도적인 자금력과 사업 추진력을 가진 사우디와 IOC의 주도권 싸움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IOC '잠시 멈추고 돌아보겠다?'
'올림픽의 이름을 건 최초의 e스포츠 대회'는 많은 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시작도 하지 못하고 끝나버렸습니다. 성명에 따르면 IOC는 잠시 멈추고 돌아보면서(Pause and Reflect) 올림픽 e스포츠 게임즈의 새로운 접근 방식과 파트너십 모델을 재구성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IOC가 과연 e스포츠를 제대로 품에 안을 수 있을까요?
IOC는 1년이 조금 넘는 사우디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무엇을 얻었을까요? e스포츠라는 개념, e스포츠 시장의 특성에 대해서 조금은 배웠을까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현재까지 공개된 결별의 원인들을 살펴보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EWCF에게 IeSF, GEF 같은 글로벌 e스포츠 협단체와의 협업/연계를 강요한 것은 IOC가 e스포츠 산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방증 중 하나입니다. 어떤 이유로 IeSF, GEF를 앞세웠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두 단체가 글로벌 e스포츠에서 가진 위상과 권력은 생각보다 크지 않습니다. 게임사와의 협상, 대회 구조 구축, 스폰서십을 비롯해 재정적 투자를 실무적으로 해야하는 EWCF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쉬운 조건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종목 선정에 대한 이견은 결국 좁혀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IOC는 'e스포츠'라는 개념을 독특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IOC는 이미 '올림픽 e스포츠 시리즈'라는 대회를 개최한 바 있지만, 대회는 e스포츠 팬들에게 크게 주목 받지 못했습니다. 'e스포츠'를 문자 그대로 'electronic'과'스포츠'로 해석하며 종목을 '신체 활동을 기반으로 한' 게임이나 스포츠 기반 게임으로 한정했기 때문이죠. 만약, 이 관점이 관철되는 한 '올림픽 e스포츠 게임즈'는 '올림픽 e스포츠 시리즈'에서 이름만 바뀐, 스포츠도 아니고 e스포츠도 아닌 모호한 대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우디 입장에서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고요.

새로운 파트너십 모델을 만들겠다는 IOC의 계획도 험난해보입니다. 글로벌 최대 e스포츠 운영사인 ESL FACE IT을 소유한 사우디와의 파트너십이 깨진 상황에서 이를 대체할 만한 파트너가 뚜렷하게 떠오르진 않습니다. 독자 노선을 걷는 것도 방법일테지만, 상당한 시간과 투자가 필요할 것입니다.
실제로 아시안게임은 실내무도대회를 통해 2007년부터 e스포츠 도입을 실험했고,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시범종목을 거쳐 2022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e스포츠를 정식 종목으로 도입했습니다. 여러 대회를 거치며 경험치를 쌓았고, 게임 종목사, 각 국가별 e스포츠 협단체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 무려 15년 이상을 쏟아 부은 것이죠.
타격 없는 사우디, ENC에 집중

사우디는 솔직히 잃은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우디가 IOC를 영리하게 잘 이용한 것 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EWC의 첫 대회가 열리던 2024년 7월에 발표된 IOC와의 파트너십 덕분에 '글로벌 e스포츠 산업의 리더'가 되는데에 큰 힘이 실렸죠.
사우디는 EWC를 개최하기 위해 진격의 거인처럼 전진했습니다. 국부펀드 산하의 '새비 게임즈 그룹'을 앞세워 ESL FACEIT Group을 인수해 그들의 e스포츠 운영, 제작 기반을 확보했고, 주요 게임사들의 지분도 확보하며 EWC가 정식 종목을 안정적으로 늘려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그들은 대회 상금 외에도 재정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프로그램 등을 마련하면서 수익에 목말라 있는 프로게임단들이 사우디를 '가장 중요한 e스포츠 시장'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죠.
하지만 서구권에서는 사우디의 이러한 행보를 '스포츠 워싱'이라고 강하게 비난 했습니다. 인권과 여성 권리에 대한 수준이 낮은 사우디가 게임과 e스포츠를 앞세워 이 같은 이미지를 단숨에 '세탁'하려고 한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사우디는 EWC를 통해 다수의 글로벌 e스포츠 팬들에게 호감을 샀고, 이 과정에서 IOC와의 장기 파트너십 발표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IOC는 파트너십 관계를 발표하면서 사우디의 정책을 크게 홍보해주었는데요. 비전 2030뿐만 아니라 여성 스포츠가 빠르게 성장을 하고 있고, 빈 살만 왕세자 겸 총리의 지도 아래 여성의 권한이 많이 강화되었다는 내용이 발표문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우디는 IOC의 지지부진함으로 인해 그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특히, 올해 8월에 국가대항전 컨셉의 ENC(Esports Nations Cup)을 발표했습니다. 아마 EWCF는 IOC가 실제로 도움이 되는 파트너가 아니며 e스포츠에 대한 의지가 크지 않다고 굉장히 이른 타이밍에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2년 마다 열리는 ENC는 호스트 도시가 바뀌는 '순환 개최'와 지역별 예선 시스템이 도입 등으로 인해 'e스포츠로 열리는 올림픽 같은 대회'가 될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만약, 이 대회가 성공해버리면 '잠시 멈추고 돌아봄' 전략을 선택한 IOC는 계속 멈춰야 할지도 모릅니다. 특히, ENC는 EA, 크래프톤, 텐센트, 유비소프트 같은 주요 게임 퍼블리셔들의 참여를 비중 있게 발표하며 대회의 안정성과 지속성도 상당 부분 확보했습니다.
'동상이몽' 성급했던 파트너십

'올림픽 가치'에 'e스포츠'를 접합시켜 새로운 대회를 만들자는 비전은 같았지만 각자 생각했던 그림은 달랐습니다. 너무 성급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올림픽을 통해 본격적으로 e스포츠를 다루겠다는 역사적인 발표였음에도 'IOC와 사우디의 파트너십은 12년짜리에요!' 외에는 이렇다 할 청사진이 제시되지 못했기 때문이죠.
결과적으로 이들의 '동상이몽'은 이토록 허무하게 끝났습니다. 다만, IOC가 사우디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e스포츠 산업에 조금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로 삼아 IOC가 올림픽 정신에 게임과 e스포츠를 적절히 결합해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P.S. 올림픽도 아시안게임처럼 될 수 있을까요?
아시안게임은 e스포츠씬에서 이제 상당히 안정적으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 듯 합니다. e스포츠 팬들은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 과정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프로 팀에서도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죠. 비인기 종목 선수들에게는 국가대표가 될 수 있는 아시안게임이 상당히 중요한 대회가 되었습니다.
비록,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통한 국위선양'이라는 말이 레토릭일지도 모르지만, 게임과 e스포츠의 사회적 인식 개선(특히, 기성세대)에 긍정적 영향을 주었고, 이것이 산업 발전에도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많습니다.
이런 사례와 효과를 생각했을 때, 올림픽도 e스포츠로 뭔가 좀 해주면 좋겠지만...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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